초대일시_2007_1109_금요일_05:00pm
스페이스 바바 서울 강남구 신사동 514-1번지 5층(포토피아 5층) Tel. 02_3442_0096
윤호식의 사진에 대하여 ● 사실, 인간이 사진을 다룬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의식의 영역에 몸을 담그는 일(일 것)이다. 너무도 일찍 자신과의 갈등으로부터 해방된 다이안 아버스가 갈망했던 것처럼, 사진가라면 누구나 자신이 "사진으로 보여주어야만 누구든 볼 수 있는 그런 순간의 생산/포착에 지극한 관심"이 있게 마련이다. 이 지루하고 불편한 세상에서 사진가는 그런 현실의 틈을 비집고 휘돌며 새롭게 자신의 의식/영역을 구축하려 애쓰고자 한다. 설혹 그것이 있는 현실의 찰라(Henri Cartier-Bresson)던지, 혹은 애써 마련한 계획된 순간(Gregory Crewdson)이던지 말이다. 그 새로운 장면의 외현은 그래서 사진가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총체적 집적이기도 하고, 또 가고자 꿈꾸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현실'과 '비현실' 혹은 '여기'와 '상상'과의 수평적 교배는 그래서 사진이 가지는 특권이자 동시에 가능성이기도 하다. 물론 여타의 다른 예술의 형식이 그러한 가능성에 못 미치고 오직 사진만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허구의 영역을 개연의 영역으로 회귀시키는 문학에 있어서나, 혹은 훨씬 더 작의(作意)/자의(自意)의 가능성이 큰 회화의 영역이 사진보다 상상의 외현이 자유로운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사실과 현실을 압축하는 추상(ab-structure)의 가능성이 월등히 뛰어난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장르의 작업들은 그것이 글이든 그림이든 어쩔 수없이 바로 그 추상의 영역에서 사실의 영역으로 회귀하게 되는 방식을 따르게 된다. 그러니까 아무리 사실적인 묘사의 글이나 그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사실에 근거한 '유사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진은 바로 그 방식의 역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이 만들어진 사진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의식 속에는 그것이 전혀 '사실'이라는 혹은 '사실 일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바라봄을 시작한다. 최근 들어 디지털 이미지가 양산되면서 이 사진의 특질이 다소 훼손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사진이라면(디지털 이미지가 아니라)우리는 그것을 사실의 반석 위에서 인식하게 됨은 틀림이 없다. 이것이 사진인 것이다.
윤호식의 사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아직 세상의 경험이 일천한 듯 보이기는 하지만, 그가 짧게 연작해 놓은 이번 작업들은 매우 상호 충돌적이다. 사실로써의 배경과 그 배경 안에서 노니는 모델들의 관계는 전혀 이질적이다. 상호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보이는 이 두 개의 시점은 그러나 그 충돌의 지점에서 상상을 허락한다. 상상은 물론 개별적이다. 누가 보고 어떠한 상상을 하던 사진은 결정하지 않고 허락할 뿐이다. 그 시점의 충돌이 번역해 주는 결정은 없다. 때문에 그의 사진은 어쩜 한가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아무런 시각 번안의 구속이 없는 사진은 때로 허무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좀 더'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허무가 '좀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어쩜 윤호식의 계산일 수도 있겠다. 세상에 맞서서 자신의 고함을 종결할 수 없는 경우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세상이 맞고 내가 틀리던 또는 반대로 내가 맞고 세상이 틀리던 그 확인의 여유도 없이 세상은 '나/내 고함 소리'를 묻어버린다. 그 황당한 세상의 새로운 자본주의를 향한 '진화과정' 앞에서 사진가가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하여, 무심하게, 무작위한 듯 가장하여 세상을 희롱/제시해 보는 것이 최선의 공격일 수도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게 보인다. 그렇기에 윤호식의 사진은 황당하면서도 동시에 그럴듯한 개연을 포함하고 있다. 나아가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의 지극한 통속적 분위기는 지금의 시대를 살며 답답해하는 다른 동시대인들의 '심리적 초상'일런지도 모른다.
한 가지가 더 있다. 이번 윤호식의 작업은 흑백이다. 이 너무도 아무렇지 않는 장치가 지금은 세월의 변환 때문에 매우 놀랍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윤호식의 사진은 흑백이면서 동시에 아날로그이며, 섬유질 인화지에 매우 정교한 솜씨로 프린트 되어있다. 지금 나는 포트폴리오 형식인 8x10인치 크기의 사진을 보고 있지만, 정작 전시 때는 1m가 넘는 롤지 형태로 인화를 할 계획이란다. 이는 두 가지를 다 시사하는데 하나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듯 한 도발의 의미다. 최근 들어 더욱 사용의 폭이 좁아지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레 되살아나는 것이 흑백사진이다. 즉 아날로그로의 회귀다. 이는 이십 여 년을 풍미한 디지털 이미지에 인간의 시선이 지친 이유이기도 하고, 스타일의 복귀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작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 반영적 의미이다. 디지털로 작업을 할 경우 여지없이 그 최종의 프린트는 내 손을 떠나기 일쑤다. 장치의 경제적 크기로 인한 이유이기도 하고, 또 그 사용이 일반 사진가들이 정밀하게 다루기 힘든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과거에도 타인에게 프린트를 대행시킨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디지털 출력은 케미컬 방식에서 잉크젯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다. 여전히 싼 값의 프린트야 케미컬 방식에 의존해야겠지만, 높은 질을 요구하는 예술품에서는 보존력이 뛰어난 잉크젯을 선호한다. 때문에 그 기계의 이동이 수월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개개의 사진가가 보유하면서 사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여, 촬영은 비록 아날로그로 하더라도 최종 프린트는 디지털 출력 전문가에게 의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헌데 지금 윤호식은 그 간편한 방식을 물리치고 스스로 암실에서 어렵사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의미를 담지한 흑백작업과 앞서 이야기한 무덤하게 제시하고 있는 대상의 상호충돌은 그래서 닮은꼴이다. 양쪽이 다 너무도 현실/실천적이다. 현실/실천이 담보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작업이다. 사진의 본질처럼 말이다. 윤호식은 아마도 태생적으로 저항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을 애써 외면하거나 거절하면서 고집스런 자신의 양식을 고집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가 이번 작업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며, 이를 통해서 더 깊은 작업의 도정에 몸을 담글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우리'가 그랬듯이. 희망해 본다. ■ 정주하
종종 나는 나의 말투, 표정, 행동들을 되새겨본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때론 거울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애써 연기 아닌 연기를 왜 하고 있느냐고. 거울에 반영된 현실공간의 내 모습과 거울 속에 생성된 가상의 나로 부터, 내면과 외면의 충돌을 느끼고는 한다. 하지만 이제는 느낄 수 없이 익숙해졌다. 거울 없이도 태연히 나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으니까. ■ 윤호식
Vol.20071109b | 윤호식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