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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107_수요일_05:00pm
목인 갤러리 서울 종로구 견지동 82번지 Tel. 02_722_5055 www.mokinmuseum.com
마음껏 그리고 / 마음껏 쓰고 / 아닌 듯 싶을 때면 / 원점회귀하고 / 다시 시작하여...... 유혜목의 시「지우기」의 부분이다. 시를 보다가 내그림과 방법이 참 닮았다 했다. 지운다는 것은 더하기보다는 빼기의 개념이다. 머리 속의 수 많은 생각들이 잡풀처럼 쑥~쑥 시도 때도 없이 올라와 수풀을 만든다. 뿌연 속을 헤집고 그냥 걷는다. 걷다보면 나의 모든 감각은 모공을 활짝 열어 뜻하지 않은 만남에 즐거워 한다. 오가는 길 위의 조우는 즐거움이다. 풍경 속을 걷는다. 나는 어느새 풍경 속에 있고 그것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여기 저기의 재잘거림은 눈과 귀를 달게하고 손수건 한장 만큼의 자리는 금새 시끄러운 앞마당이 된다. 나의 걷기의 즐거움은 하찮은 것들과의 재롱잔치 같다. 그렇게 작고 하찮은 것들이 주는 즐거움은 나의 그림의 소재가 된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난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는『가지 않은 길』에서 사람이 '더' 다닌 길과 '덜' 다닌 숲 속 두 갈래의 길에서 한 길만을 택한 나그네의 먼 훗날의 회환을 노래했다. 아파트 옆으로 펼쳐진 작은 숲. 장현주 황홀한 비상의 시작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상황은 더 나빴다. 길은 여러 갈래였다. '길은 길로 이어진다.' 『가지 않은 길』의 나그네는 그 사실을 알기에 '하나의 길은 다른 날로' 미루었지만, 작가는 그 사실 때문에 모든 길을 다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단 하나의 길 대신 모든 길을 가기로 하면서 부담은 줄었다. 결과는 자유였다. 꽃이 터지는 소리, 부서지는 햇살의 환희, 미세한 공기의 흔들림, 습기를 머금은 바람, 만개한 꽃들의 향기. 어느 것 하나 찬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몸 안에 숨죽이고 있던 모든 감각의 부활이었다. 이렇게 모든 것은 경배의 대상이 되어 작업으로 스며들었다.
한 발, 두 발. 걸음을 옮겼다. 어디론가 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걸음걸이 뒤를 생각들이 정오의 그림자가 되어 쫒았다. 치열한 결론이 궁극의 목적이 아닌 생각들이었다. 같은 보폭을 유지하는 걷기와 생각하기였다. 걸음이 멈추자 생각도 멈추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정지한 것은 아니었다. 드로잉의 시작은 이 지점에서였다. 마지막이 처음이고, 시작이 끝인 자연스런 순환이었다. 하늘을 향한 나무, 대지에 평화로운 꽃들, 바람과 조우하는 공기. 저마다 고유한 음역을 가진 생명들의 신나는 합주였다. 경쾌한 음에 맞춰 춤을 추듯 검은 선들이 하얀 종이 위에 흔적으로 남았다. 흔적은 사라짐 뒤에 남은 자취나 자국이다. 그래서 명료하지 않다. 바로 이 매듭이 정확치 않음이 장현주 작업에 여운을 드리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래서...' 긴 꼬리 여운처럼 드로잉은 실타래처럼 한 올 한 올 끈기지 않고 풀린다. 길이와 강약이 서로 다른 선들은 작가의 걸음걸이, 작가의 사고방식과 호흡을 같이하며 수 백 장의 드로잉, 작업의 바탕이 되었다.
'무엇이든 되어 가게 가만히 둔다.' 작가의 말처럼 장현주 작업의 미덕은 자연스러움이다. 이렇게 가만히 놓아 둔 자연스러움이 즐거움이 되어 돌아왔다. 노랑, 빨강, 분홍, 파랑, 초록. 자유로운 필선이 생의 정점에 올라선 고운 빛깔들을 무대 삼아 콧노래를 청한다. 존재의 무게를 덜어 내는 활기찬 선들이고, 아름다운 색들이다. 자연스러움이 즐거움으로 되돌아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녹록치 않은 시간들이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를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로 만든 시간들이었다. 정신없던 일상이 저 마다의 속도로 저절로 굴러가도록 나름의 방법을 터득하게 된 시간이었다. 서양화의 캔버스와 유화 대신 한국화의 붓과 안료를 새롭게 공부하고 틈나는 대로 작업을 하게 한 시간들이었다. 무언가를 꼭 얻어야 하겠다는 아득바득함 보다는 어떤 것을 꼭 얻지 못해도 끝가지 완주해 보겠다고 생각한 시간들이었다. 자연스러움이 즐거움으로 되돌아 온 과정의 시간들은 이러했다. 이런 시간들이 모여「지우개로 그린 풍경」이 되었다. 흔히 지우개는 잘못된 것, 이제는 쓸모없는 것을 없애는데 쓰인다. 또한 지우개는 나쁜 기억, 힘든 경험을 말끔히 삭제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작가의 지우개는 그 기억과 경험을 흔적들로 수용하고 저장한다. 덜어냄이 얻음으로 이어지고, 비움이 채움으로 갚음 되는 지움이다. 이쯤에서 지움은 다 지우고 새로 쓰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것에서 다시 시작되는 이어쓰기가 된다. 장현주의 작업은 새 생명을 잉태하고, 그 흔적을 간직하고, 또 다른 생명을 예비하는 자궁과도 같은 '지움으로 그리기'이다. 마침내 모든 것을 최초의 순수로 돌리는. ■ 공주형
Vol.20071107b | 장현주展 / JANGHYUNJOO / 張炫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