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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27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0ooam 06:00pm / 일요일_02:00pm~06:00pm
Anders Galerie im stilwerk Grunstraße 15 40212 Dusseldorf, GERMANY Tel. 0211_6016666 www.andersgalerie.de
정적을 향한 교란_이환권 매체의 특징 ● 최근 한국 미술현장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하다. 높은 가격이 새롭게 매겨진 거장들에 관한 기록과 많은 액수로 낙찰된 생소한 미술가들에 관한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 소수의 신문사는 다소 과장된 통계를 들이대며 이 불길에 부채질을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 이환권의 작품이 작년부터 그들과 함께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이환권은 이미 상당한 거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딘 공정의 매체를 매일 마주하며 땀에 젖고 협력자들과의 끊이지 않는 회의로 침이 마른다. 이제 그의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그는 분투해야 하는 가난의 습성으로 여전히 자신의 삶을 지탱한다. ● 이환권의 성공은 그의 매체가 접근을 쉽게 하는 한편 어리둥절한 낯선 경험을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얼핏 비친다. 그의 제작물에는 누구나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대상의 재현과 왜곡된 형태의 생소함이 항상 함께 발견된다. 그 때문에 그 앞에 선 관람자는 "어지러움을 느낀"다고 표현한다. 그러한 역설적 통합은 그가 자신의 훈련기에 만난 동료들을 묘사한 2000년의 개별 버전들에서 최근 "바람부는 날"연작(2007)에 이르러는 동안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외관으로 보인다. 나는 이환권의 버전들과 연작들을 관류하는 일관된 작용에 주목한다. 이는 이념에서 자유로운 세대(1970년대 태생)가 스스로 매체를 정의해가는 자생력의 분투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동기 ● 이환권은 1990년대 초중반에 전문적 미술가로서의 수업기를 시작했다. 이 시기는 이념적 논의가 힘을 읽고 대신 갈필 잡을 길 없는 다양한 정보 앞에 미술대학의 학생들이 노출되던 때이다. 이환권의 훈련기는 서태지와 아이들 그룹의 활동에서처럼 자신감 있는 대중문화의 활기, 급격히 발달한 인터넷과 첨단 테크놀로지의 보급, 생태미술(Eco-Art)의 출현과 같은 윤리의식을 환경으로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대형 상영관의 광폭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전환할 때 목격되는 "늘어난 세상"에 대한 상상으로 형태의 왜곡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그의 반응이다. ● 생기를 추구하지만 정지된 동작에 한정되는 전통적 조각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미술가는 그 시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정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미술가의 자신감이다. 한편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 같이 관람자를 외면한 채 스스로의 동작에 충실하고 있다. 마치 관람자가 우연히 등장인물의 세계에 뛰어든 듯하다. 이는 대상을 자기중심적 인본주의로 구성하기보다 대상 그 자체의 생태적 질서로 더 많이 재현하기 때문이다. 테크놀리지에 대한 호기심, 생기 추구의 자신감, 대상 재현의 생태론적 태도, 이들 세 가지는 이환권이 자신의 매체를 출발시키는 세 가지 동기이다.
교란 ● 이환권의 매체는 전통적 조각에서 보이는 좌대가 없다. 매체의 알맹이가 그대로 환경에 던져지는 것으로 설치된다. 실재하는 공간과 예술의 공간을 구분하는 틀이 없는 셈이다. 그럴 때 매체는 부각되지 못한다. 그의 제작물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 삽화 속의 특정 대상처럼 환경에 그대로 녹아 있다. 좌대만이 아니다. 동숭동 서울대학병원 분관 외벽의 한 기둥에 설치된 이환권의 "민형"은 기둥이 좌대의 역할을 함에도 눈에 잘 띠지 않는다(도판 1). 세로축을 중심으로 축약된 형태는 여타의 사물에 묻힐 수밖에 없다. 일상의 환경에 익숙한 관람자의 눈에 그의 매체는 갑작스럽게 발각되지 않을 정도로 친밀하다. ● 이환권의 형태는 죄다 불현듯 포착된 장면이다. 그의 인물들은 전방의 관람자를 주시하거나 삶을 교란할 파격적 몸짓이 없다. 연작들과 버전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상에서 쉽사리 경험하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복사 집 아들 딸 내미"버전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정확히 정지하는 동작을 취함에도 관람자의 눈길에 소호하지 않고 스스로의 시선을 위로 두고 있다(도판 2). 따라서 관람자는 생소한 감정의 자극 없이 그들에게 쉽게 접근할 정도로 친밀하다. 이환권 매체의 친밀은 전통적 틀의 재거와 형태의 축약에 따른 환경동화, 경험된 기억에 호소하고 태무심한 태도를 취하는 대상의 재현에서 비롯된다. ● 하지만 관람자가 그의 매체를 환경에서 발견하게 될 때 경악하고 "어지러워"한다. 수직으로 길어진 형태를 "볼록거울"의 경험을 통해, 심지어 "뭉크(Edvard Munch)의 '절규'"나 "자코메티(Alberto Giacometii)의 조각을 통해" 이미 알고 있을 것임에도 그는 당황해 한다. 친밀할 대상이 갑자기 변형된 모습으로 관람자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곤경은 이미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관람자의 기억이 갑자기 출몰하는 현실의 생경한 사실과 충돌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 이 충돌은 대상을 판독하는 시간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을 판독하는 시간 간의 차이를 야기한다. 관람자의 시점이 옮겨감에 따라 배경의 실재하는 공간에 비해 제작물은 빠른 변화를 보인다. 그것은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비해 좁게 축약되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속도를 낳는다. 여기서 이환권이 목적하는 생기 있는 조각이 실현된다. 관람자는 판독의 차이에 의해 생겨나는 충돌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통합하려 한다. 곤경은 관람자에게 비평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의 매체는 항상 관람자에게 경험된 과거와 경험하는 현실간의 차이로 인식론의 질문을 던진다. 결국 이환권 매체의 교란은 주변을 서성이는 관람자를 멈추게 하고 생각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미지 ● 이환권은 일상의 인물을 먼저 "사진으로 찍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미지의 "좌우를 줄이거나 위아래를 줄인 뒤 그 모습을 입체로" 재현한다. 그의 컴퓨터 모니터 상의 이미지나 그것을 출력한 이미지는 이미 160여 년 전에 카일보트(Gustave Caillebotte)에 의해 시도되었다(도판 3, 4). 카일보트는 ?또 다른 세상?(Un Autre Monde, 1884)이라는 삽화집을 발간하면서 초현실적 환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목적을 가졌다. 이를 통해 그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좀체 경험하기 힘든 세계를 사실적 재현을 통해 제시했다. 더 소급해 1670년 위러(Gegoire Huret)은 전방과 후방의 급격한 차이를 통해 일정한 질서를 논증하려 했다(도판 5). ● 카일보트의 사실적 재현과 위러의 질서는 이환권이 의존하는 형태 변형의 단초가 된다. 이들 뿐만 아니라 훨씬 이전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삼차원 공간의 현실을 이차원 평면으로 재현하는 법칙의 개발에 분투했다. 이들은 그 법칙을 고전고대의 선배들이 주장한 수학적 비례에 따라 화면의 곳곳에 등장하는 형상의 크기와 색의 변화에 균일하고 정밀하게 이것을 적용했다.
이 소급은 곧 회회공간의 발전적 맥락을 환기한다. 과거 회화의 거장들이 자신들이 생산하는 이미지가 현실의 대상과 닮으려고 했고 심지어 현실이 되고자 하는 믿음을 보여 왔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자연과학적 정밀한 관찰을 통해 획득된 경험을 종합함으로써 기호화된 중세의 관념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또한 현실의 경험을 이차원 평면으로 요약하는 법칙을 고안했다. 그들은 회화가 삼차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현대회화는 조각을 닮으려는 것에서 그리고 실재가 되려는 것에서 출발하여 점차 그것들에서 떨어져 평면 자체로 독립하는 매체로 진화해 가는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 조각은 환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회화의 조건과 달리 이미 그 판독의 조건이 삼차원의 실재하는 공간에서 주어진다. 그의 말대로라면 조각은 이미지의 환각에 개의치 않고 양감이 점유하는 공간으로 당당할 것이다. 여기서 이환권의 매체는 조각의 진화론적 맥락을 역행하고 오히려 회화를 닮으려고 하고 있다. 아무리 그의 제작물이 공간을 점유할지라도 그것이 교란의 관람자를 창출하고 어지러움을 야기하는 한 그것의 판독은 회화공간(pictorial space)의 조건에 의존한다. 그것을 그의 컴퓨터에 내장된 프로그램이 돕는다. 그 프로그램은 과거의 거장들이 법칙으로 귀납한 수고를 대신한다.
정적 ● 이환권은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제작을 종합했다. 한번은 2005년의 개인전을 통해 개별 작품들과 버전들을 "버스 정류장"연작으로 묶었고 나머지는 2007년의 개인전을 통해 "바람 부는 날"연작으로 모았다. 이들 두 전시회 사이에 2006년 "타자 사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가졌으나 이 전시회는 "버스 정류장"연작을 구성하는 동일한 버전들의 다른 에디션으로 구성되었다. 최초의 "버스 정류장"연작이 그의 수업기에 제작된 것들을 상당수 포함한다면 최근의 연작은 상하 좌우의 압축에서 생겨나는 형태변형 뿐만 아니라 전방 혹은 후방으로 전진하는 형태의 변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의 매체가 단순히 관람자가 디뎌 선 현실의 공간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향해 침투하는 변화이다. ● 더욱이 바람("바람 부는 날"도판 6)이나 권태("오늘은 공부하기 싫어"도판 7)와 같은 비가시적 표현을 위해 이미지의 변형을 적용하는 점이 최근작에 두드러진다. 바람이라는 움직임과 권태라는 마음의 동요는 상하좌우가 아닌 앞으로 돌출하거나 뒤로 밀려가는 더 확장된 변형을 통해 성취된다. 이제 그는 과거의 선배들이 시각의 견고함을 획득하고 매체의 독자성을 위해 개발했던 그 법칙을 미술의 고유한 시각적 특성을 능가하는 비유를 표현하기 위해 활용한다. 변형의 법칙이 이환권에 와서 "휘청거리는 움직임"이나 "따분한 마음"과 같은 서술의 표현을 가능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 법칙이 이미지 상태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 실재하는 환경에 구현하는 점에서 그의 매체는 과거 거장의 것과 구별된다. 굳이 말하자면 이환권의 매체는 비평적 회화공간을 창출하는 조각인 셈이다. ● 한편 급속한 축약과 변형이 환경과 충돌하는 마찰이 클수록 다소 문학적이기까지 한 비유는 부질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환권의 매체는 여전히 그 비유만으로 판독되거나 감화를 줄 암시가 친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작으로 올수록 인물 주변을 보조하는 소품들은 없어지거나 인물과 대등해진다. 이는 주연, 조연의 구별이 없어지고 제시되는 형상 자체의 독자성을 강조한 형태 때문이다. 이제 그의 매체는 환경과 대상의 마찰에 머물지 않고 시각과 비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간의 대비처럼 더 확대된 개념들을 충돌시키고 있다. 이 충돌의 폭은 앞으로도 점점 확대될 경로를 향하는 듯하다. 그의 말대로 "빠른 정신의 속도"와 "관찰자의 관측"의 충돌이다. "정신의 속도"의 주체는 나아가려는 반면 "관측"의 주체는 머물려 한다. 그 충돌의 끝에 긴장된 정적이 감지된다.
이환권은 평면에서만 정당화되는 것으로 믿어 온 이미지의 변형을 실재하는 공간에 조각의 매체를 통해 구현함으로써 생경한 경험과 함께 그 믿음을 교정하려 한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매체가 끊임없이 관람자에게 그의 존재를 되묻는 인식론적 질문을 유발하는 장치를 가능하게 했다. 이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미술가의 호기심과 전통적 조각의 모순을 극복하여 생기를 복구하고 현실의 대상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 미술가는 그 목적을 위해 현대미술의 발전적 맥락을 역행하는 실천을 보임으로써 이미지를 단순한 상상이나 관념의 상태가 아닌 실재하는 뚜렷한 대상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실천은 수학적 비례에 의존한 과거의 거장의 방법과 동일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비평적 회화공간의 창출이라는 새로운 지점에 그는 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그는 개인으로서의 미술가가 과거에 반응하고 자신의 시대에 반응하는 뚜렷한 사례가 될 것이다. ■ 이희영
Vol.20071104a | 이환권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