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들의 풍경

김태화 회화展   2007_1024 ▶ 2007_1030

김태화_풀들의 풍경展_미술공간현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미술공간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024_수요일_06:00pm

미술공간현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02_732_5556 www.artspace-hyun.co.kr

풀들의 풍경-바랭이와 개망초 사이에서 ● 풀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는 것도 어렵다. 문화적으로 너무 많이 소비되어서이다. 바람에 눕는 김수영의 풀에서,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알 수도 없는 역사의 먼 저곳에서 풀과 잡초에 대한 미술과 시적 변주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풀이 정서적 울림과 조형적인 흡입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 김태화도 풀에 홀렸다. 개망초와 바랭이, 호박, 포도 넝쿨에 발목 잡히고 붓이 얽힌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려서부터 그 잡초들을 보고 자랐으니까. 보고 자란 정도가 아니라 함께 뒹굴고, 쥐어뜯고, 맛보고, 낫으로 베고, 긁히는 과정에서 몸에 스며들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김태화의 풀은 그림 이전의 그 무엇인 것이다. 그것은 체험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의 원초적인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사실 여름이 지난 뒤 가을 풀과 덩굴들은 바라볼 때는 몰라도 야산이나 시골길에서 만나면 꼭 반가운 것은 아니다. 도깨비바늘과 도둑놈의 갈고리 류는 옷과 머리에 마구 달라붙고, 덩굴들은 손등에 생채기를 내고, 멀대 같이 웃자랐던 명아주풀이나 개망초 줄기는 발길을 막는다. 그 과정에서 풀과 사람은 만난다. 더 없이 육체적으로. 그것은 일종의 각인이다. 풀과 사람이 한 세상 같이 살고 있다고 서로의 몸에 찍어주는.

김태화_풀들의 풍경展_미술공간현_2007

김태화의 그림은 그래서 단순한 관조나, 바라봄이 아니다. 미술의 다른 분야, 특히 사진의 경우 잡초와 덩굴 풀을 희미한 톤으로 찍어내는 것이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그 흐름은 지금도 나름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지만 김태화의 그림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겉보기에는 그와 닮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내부에는 풀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차이는 체험의 차이에서 시작해서 심미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전자가 감상적이고 애매한 미적 취향을 바탕으로 풀을 해석한다면 김태화는 풀에 대한 입체적인 생생함을 바탕으로 조형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 문학과 미술의 영역에서 풀과 잡초는 생명력, 끈질김, 민중 등등의 이미 만들어진 상징과 비유의 틀들이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견고하다. 견고함을 넘어 완벽한 스테레오 타입이 된다. 예술이 하는 일은 그 견고함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제 김태화는 그 견고함과 빤한 상징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어쩌면 넘어서라는 것은 일종의 내가 원하는 강요일 수도 있다. 왜냐면 미술 작품이란 무엇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관한 다른 차원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김태화_풀들의 풍경展_미술공간현_2007

캔버스 위에 덩굴을 걸쳐놓고 작가는 뒤로 물러선다. 물러서서 붓 자국을 본다. 한 쪽은 진짜 풀이고, 다른 한 쪽은 이미지다. 그 사이에 김태화가 있다. 그는 이쪽과 저쪽을 왔다 갔다 한다. 풀과 이미지 사이에서 어떤 닮음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몰입의 상태가 된다. 그 몰입은 모든 것에 대해 판단 정지 상태가 된다. 그 순간 붓은 풀이 되었다가 다시 붓으로 되돌아간다. 물론 이것은 내가 눈으로 보는 것이며 동시에 상상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그 찰나, 붓질의 짧은 호흡 속에는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 언젠가 케네드 클락이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앞에서 어느 정도 다가가면 대상이 이미지가 아니라 그냥 물감의 상태이고 얼마만큼 물러나면 그림, 즉 이미지가 되는 가를 살피느라 왔다 갔다 했다고. 그리고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없었다고. 물론 김태화의 그림은 벨라스케스식의 회화성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는 풀의 줄기와, 마른 덩굴과 잎사귀들을 붓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접근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개별적인 풀 하나 하나의 모습은 하나나의 풍경이 된다. 풀들의 풍경.

김태화_풀들의 풍경展_미술공간현_2007

풀들의 풍경은 곧 세계의 풍경이다. 개별적인 풀들과 풀들이 모인 사이에 캔버스가 있다. 풀들은 한 개씩 캔버스 위에 모인다. 나란히 늘어서기도 하고, 서로 얽히고 뒤섞인다. 그리고 풍경을 이룬다. 이룬 풍경들을 뒤로 물러서서 바라본다. 캔버스 속에 풀이 있고, 풀들의 풍경이 있고, 캔버스 밖에는 서울이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김태화의 그림은 현실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현실에 대해 말 한 것이 된다. 물론 그 현실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은 애매하다. ● 모든 시작은 쉽지 않다. 풀과 덩굴의 가을은 김태화 그림의 시작이다. 앞으로 어느 쪽으로 그의 붓이 길을 만들어갈지 알 수 없지만 이미 길은 시작 되어버렸다. 그리고 김 태화는 그 길을 멀리 가야할 것이다. 오래 된 풀들의 풍경 속으로. ■ 강홍구

김태화_풀들의 풍경展_미술공간현_2007

그림을 그린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처럼 갑자기 다가온 특별한 내 마음,,,,,,, ● 어려서 그림을 시작할 때는 고호의 열정적인 삶을 동경하고 그보다 더 진한 삶을 살겠노라 했지만 세상을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항상 내면에서 충돌하고 있었던 그 무엇을 내 나이 40이 넘어서 찾았다는 희열에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 그림이란 영화필름처럼 한 장을 따로 보면 일상의 보편적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여러 장을 겹쳐놓으므로 해서 생기는 새롭고 특별한 조형적 형태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내 머릿속에 경험하고 있던 여러 장의 필름을 겹쳐놓고 보니 시골에서 자라고 지금도 꿈꾸고 있는 이상향 그것이 바로 들에 있는 모든 것들이었다.

김태화_풀들의 풍경展_미술공간현_2007

우주에 떠있는 별 만큼이나 많은 생명들이 태어났다 사라진다, 그 장엄한 순환계를 바라보면 너무나 많은 조형적 형태를 볼 수 있다, 다빈치, 미켈란젤로, 세잔, 고호, 등 수많은 화가들이 자연의 형태를 탐구했고 시간이 흘러 지금 내가 또 다른 시간에서 조형적 형태를 탐구하고 있다, 시간은 역사이다, 선배들이 탐구했던 것을 내가 하듯이 내 후배들이 또 다른 시간에서 새로운 탐구를 할 것이다, 그 들을 위해서 역사를 기록하듯이 조금은 치밀하고 정직하게 이 시간에 존재하는 자연의 조형적 형태를 탐구하고 기록하려 하였다. 역사책을 읽는 것처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기록처럼 그림도 누구나 편안마음으로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내 기록도 누구나 쉽게 편안하게 이해하고 봐 주었으면 한다. 그것들을 작지만 내 마음속에 담아 조형적 가치를 부여한 것들이 이 결과물들이다. 자연 속 조형적 형태를 가지고 있는 넝쿨들 (호박넝쿨, 더덕넝쿨, 등) 잡초들, 꽃들 을 나만의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즐겁다

김태화_풀들의 풍경展_미술공간현_2007

개념적으로 설명하자면 척박한 땅에서 누구에게도 애정을 받지 못하고 홀대받는 그런 사람들을 대변한다고 할까, 이 땅에 태어나 자유롭게 살면서 누구보다도 멋진 삶을 살고 꽃을 피우고 자식을 잉태하는 우리네처럼 그 것들도 그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태어난 곳에서 배척당해 너무나 위험한 길가, 적계지, 논 밭두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형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 작품을 제작하면서는 잡초들에게 너무나 많은 의미나 생각을 담고 싶지 않았다, 잡초도 다시 보니 아름다운 조형성을 가지고 있고나 정도를 전달하고 싶었다. 무심하게 대하던 잡초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들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잡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 김태화

Vol.20071030h | 김태화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