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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24_수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식도락 작가 세 사람이 모였다. 먹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자신의 미각이 최고라고 서로 자랑하는 여동헌, 이인청, 이유정이 '그림의 떡'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자신만의 취향과 어조로 맛을 이야기한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수많은 '그림의 떡'들이 떠오르지만 재현의 역사에 대한 거창한 담론보다 음식을 정물로서가 아닌 취향으로써 접근하기로 한다.
설탕과 고기에 대한 태도 ● 먼저 여동헌과 이유정은 음식물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공통점을 보여주면서도 소재에 대해서는 상반된 태도를 취한다. 여동헌의 경우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어떠한 불안함이나 거리낌, 불편함이 없다. 그의 음식은 결코 몸에 해롭지 않아 보인다. 그에게는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의 구분이 없고 그저 맛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마네의 동명 작품을 패러디한 여동헌의「풀밭 위의 식사」는 우뚝 솟은 음식 더미가 놓인 식탁을 전경으로 멀리 소풍을 온 두 쌍의 남녀가 노닥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네가 관객들로 하여금 풀밭 위에서 식사보다는 뭔가 수상쩍은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과, 동시에 시선의 정치적 의미까지도 읽어내도록 유도했다면, 여동헌은 그것을 가볍게 뒤집으려는 듯 그의 소풍에 푸짐한 점심 식사만을 한상 차려놓았다. 관객이 읽어야 할 것은 이미지 너머에 숨겨진 의미가 아니라 숨바꼭질하듯 곳곳에 배치되어 지나치기 쉬운 현란한 메뉴다. 비현실적으로 산더미같이 쌓인 음식이지만 지나친 탐욕을 연상시키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열심히 일한 농부가 이룬 가을 수확의 축복처럼 건강하게 충만하다. 썰지 않은 김밥이나 삼계탕 한 그릇, 신선한 까망베르 치즈와 샴페인 한잔, 그리고 그가 그토록 드높인 위풍당당한 스테이크 앞에서 소화 불량의 염려 없이 군침을 삼킬 수 있다. 그에게 음식을 그리는 일은 낙원으로 소풍을 가는 것이다. 여동헌이 만들어낸 그와 같은 낙원은 내주기만 하는 한없이 '착한', 젖과 꿀이 마르지 않는 꿈의 동산이다. 브뢰겔이 훈계조로 묘사한「게으름뱅이의 천국(land of cockaign)」에서 어떤 경쟁이나 근심, 경고도 없이 모든 것을 따먹을 수 있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는 여동헌의 그림을 찾는 잠시 동안이나마 삶의 구질구질한 걱정거리를 떨쳐버린 채 요람처럼 아늑하고 뽀송뽀송한 단꿈을 그저 맛보기만 하면 된다. 그의 회화라는 안식처는 현실의 고단한 삶만큼이나 지치고 찌든 서구 중심의 현대 미술 맥락에서조차 독립적이다. 그의 "고기지상주의"와 "설탕주의"가 유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소고기 ● 반면 이유정에게 설탕, 고기, 밀가루와 같은 음식은 늘 불편한 요소다. 여동헌에게 음식이 자유, 즐거움, 만족, 풍요, 해갈, 낙원 등의 정서와 동일시된다면, 이유정에게 그것은 늘 고통이나 불안 같은 두려움을 동반하는 즐거움이다. 그는 맛에 윤리를 적용시킨다.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가는 입으로 가져가는 모든 것에 옳고 그름이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것이 종종 좋고 싫음에 위배되기도 한다는 것을 함께 배우게 된다.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반사적 스위치는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남아 자신의 욕망과 쾌감을 조절하는 침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미 어릴 적부터 터득한 금기에 대한 호기심과 이 담을 넘는 쾌감의 탐닉은 그에게 '그림'이라고 하는 '탈선' 행위가 가능한 세계에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이 금욕주의자가 다디단 팥빙수를 그린다. 젤리와 과일, 아이스크림, 시럽, 배앓이를 할 것 같은 얼음으로 푸짐한 팥빙수는 언제나 맛있어 보이지만 혼자서는 사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 음식이다. 맛의 기억을 시각적으로 이상화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명암은 뒤엉키고 시점이 난립하며 개체의 크기가 왜곡되어 있고 사물이 놓인 관계는 불합리하다. 사실적인 질감 묘사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벨탑」연작의 일부인「팥빙수」는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불안한 순간의 이미지를 담는다. 그것은 덧없는 인간의 욕망과 그 대가의 함수 관계를 달팽이의 집에 비유한 것으로, 지나치면 무너져버릴 아슬아슬한 공든 탑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한없이 약한 미물로 보이는 달팽이가 아등바등 화려한 욕망의 똬리를 틀어 올리는 모습은 어떤 간절한 염원이 종종 하찮고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욕망 과잉 시대의 만화경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다. 그가 훈육의 대상으로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은 도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콤플렉스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신을 대상화하는 방식으로써 무거운 주제를 팥빙수라는 달콤하고 녹아 흘러버릴 찰나적인 소재로 연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여 그려낸다.
심심풀이 피스타치오 ● 여동헌과 이유정이 따먹을 수 없는 불가능한 떡을 그렸다면 이인청은 떡을 따먹고 난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그는 음식물을 가지고 기꺼이 장난을 한다. 그러한 전혀 다른 태도는 욕망과 사물(대상)에 대한 그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그는 떡을 따먹을 꿈을 꾸는 대신 그 떡을 먹어치우고 남는 시간에 심심풀이로 장난을 친다. 사물은 소비하면 그뿐인 사물 그 자체인 것이다. 그는 그것을 해석하거나 미화시키거나 이상화하거나 학습하거나 꿈꾸지 않고 그저 가지고 논다. 피스타치오 껍질 위에 그린 얼굴 군상 작업은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다. 그것은 지루하고 끈질긴 작업일 테지만 이상할 정도로 담담해 보인다. 그것들은 아르브뤼(art brut) 작가들의 오브제처럼 고통스럽거나 병적으로 집요하지 않고 반복적이지만 기교가 없어 전형이 없으며 표정 묘사에 작가의 심리 상태가 보이지만 무의식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도 없다. 1,700여 개의 피스타치오 껍질 위에 그린 인물의 표정은 "심심풀이 땅콩" 같은 심드렁함 이상의 어떠한 파토스도 뿜어내지 않는다. 울거나 웃거나 절규하는 얼굴은 없다. 그들은 속닥거리거나 수군거리며 하품하고 있지 않으면 쀼루퉁하며 골똘하거나 미소 짓는다. 이들은 모여서 하나의 군상을 이루고 저마다 사연이 있는 듯 무리를 지어 쑥덕거린다. 「왕따」와「원톱」은 최고와 최저를 바라보는 군중 심리에 관한 그의 유머를 잘 보여주는 작업이다. 결국 뒤집으면 같은 꼴이 되어 버리는 두 양상은 소수를 향하는 다수의 극단적이고 과장된 태도를 풍자한 것이다. 작가는 그저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나와 다를 것 없는 인간들인 듯 피스타치오 껍질을 대면하고 이미 얼굴과 인격체로 다가온 형상에 음영을 보태기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속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형상을 찾아내는 것이 심심풀이 땅콩처럼 무심한 마음, 즉 자연에 자아를 이입할 수 있도록 혹은 자아 속으로 자연(대상)이 찾아들 여지를 마련할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고 집착을 놓는 헐렁한 마음가짐이 아니었을까? ● '그림의 떡'이란 말의 언저리에는 실제와 환영이라는 모순 관계가 명백하게 드리워져 있다. 먹지 못할 그림 속의 떡은 이상하게도 실제로 먹을 수 있는 떡보다 먹음직하다. 잡힐 듯하나 잡을 수 없는 불가능성, 눈속임의 허구, 떡의 부재, 먹지 못할 떡의 무용지물로서의 가치, 덧없는 떡의 허무 등은 예술사 속의 해묵은 주제다. 음식이라는 주제는 이러한 화두들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음식 소재의 유행은 풍요 속의 불안이 점점 커져가는 오늘날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기에 어쩌면 당연하다. ■ 이유정
Vol.20071029e | 그림의 떡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