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Slow Distance 두 곳 사이

김형관 회화展   2007_1012 ▶ 2007_1130

김형관_Long Slow Distance 0717_캔버스에 유채_73×10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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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12_금요일_05:00pm

갤러리 소소 경기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569번지 Tel. 031_949_8154 www.heyri.net

더듬어 그리는 먼 산 먼바다 ● 김형관은 그림이란 "기억을 모아두는 곳이며... 또한 망각을 모아두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가깝게는 내가 본 것으로부터 멀게는 알고 있는, 혹은 믿고 있는 것까지"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또 잊어버리는 일, 그러니까 '세상'을 기억하고 또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그는 '그리기'라는 행위를 선택했고, 기억과 망각 사이의 어떤 "불완전한 영역"을 '그리기'를 통해 더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삶이란, 살아간다는 일은 기억하고 또 잊어버리는 일들로 점철되어 있고, 기억과 망각 사이의 회색지대가 바로 실존의 시간이고, 현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화가이기에, 그 실존의 시간을 '그리기'의 시간으로 치환해가는 것일까. ●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품들을 그는 쉽게 "남극"과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말했다. 대개 일반인들이 그림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을 그렸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어떤 '명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실은 자신의 화폭들에 명사형 제목을 붙여놓지 않았다. 「Snowblind」,「Icecovered」,「Long Slow Distance」등 상태나 동작과 관련된 제목을 갖고 있는 그의 거의 검정색에 가까운 모노크롬의 어두운 화폭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어둠 위로 깎아지른 산의 모습이나 빙하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떠오른다. 어리석은 질문인지 알면서도 "가보았나요?"하고 물었는데,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작가는 "가본 적은 없고요, 앞으로 가볼 생각은 있는데, 일단 가보면 그곳을 다시 그리지는 못할 겁니다. "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가 보여준 몇 장의 사진 속에는 잡지나 관광엽서에 나올 법한 조악한 컬러의 풍경 이미지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실재의 에베레스트나 남극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컬러 이미지가 화폭 위에서 거의 모노톤으로 아주 희미한 채도 차이만으로 더듬더듬 붓질로 더듬어가며 확대되어 그림으로 치환된다.

김형관_Long Slow Distance 0716_캔버스에 유채_90×130cm_2007

이 '남극' 혹은 '에베레스트' 그림들은 그가 사진 두장을 겹쳐 그려 시점의 문제를 작업화했던「서점」작업(1996)이나, 사진 이미지를 확대 복사하여 다시 먹지를 대고 옮겨 그렸던「한사람」(1996) 등의 작업을 떠오르게 한다. 김형관이 그간 10여 년에 걸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본다는 행위'와 그림의 관계이다. 특히 그는 사진의 매카니즘, 즉 "그 순간에 그곳에 있었다"는 과거의 현존성과, "시점을 한 곳으로 수렴하고 고정시키는" 일시점의 기계적 시선에 대해 말을 건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이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일단 받아들이면서,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는 사진이 보듯이 세상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하면서도 더듬더듬, 정말 그러냐고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듯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김형관은 사진의 알리바이(그때 그곳에 있었다)를 존중하면서도 사진이 가진 일시점의 고정성을 해체한다. 사진을 카피했으면서도 사진이 아니게 되는, 즉 마치 사진처럼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사진을 바탕으로 했으되 사진과 너무나 다른, 사진을 점자 삼아 더듬어 만져 그린 그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쩌면 사진은 세상을 사진처럼 볼 수 없는, 세상을 절대적 일시점의 기계적 시선으로 파악하기를 사양하는 그의 점자판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김형관_Ice Wide Open_캔버스에 유채_131×163cm_2007

그의 그림에서 사실 그림의 대상(소재)은 이미지화되는 문제에 관한 한 지속적으로 방해를 받아 왔다. 그는「서점」이나「자화상」에서처럼 여러 겹의 시점을 한 화면에 도입한다든가, 아니면 확대 복사된 이미지를 다시 먹지를 대고 베껴 그리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방해하면서 "관찰자의 시선이 그림에 재현된 대상에 대한 관심과 입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가능한 한 막아보고자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에 출품된 남극이나 에베레스트 그림에서도, 관찰자는 어느 정도의 '보기 위한 노력'을 통해서만 빙하의 모습이나 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굳이 이렇게 이미지를 방해하는 것은 "인간의 눈은 사진으로 재현된 평면을 볼 때 조차도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경험 등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설령 사진을 본다 하더라도 사진 이미지와 관찰자의 시선 사이에는 아주 복잡한 상호관계가 발생한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람자는 그림 속에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하고 나면 그 그림을 다 보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은 이름이 아니다. 그림은 '남극'이나 '에베레스트' 같은 명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기'라는 행위로서 비로소 존재한다. 그의 관객은 그리기의 행위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앞으로 뒤로 거리 조절을 해감으로써 비로소 그림 속의 이미지를 발견하지만, 그 이미지는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관객 자신의 모습을 비쳐주기도 한다. 그것은 거기에 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이다. 에베레스트는 혹은 남극은 작가가 가보지 못한, 그러나 사진을 통해 존재 증명을 받은, 그래서 우리가 가지 않았어도 믿고 있는 대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지 못했어도 알고 있는 이미지일 수도 있고, 그저 우리가 믿고 있는 이미지일 수도 있다. 욕망이 '부재'를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듯이, 그림의 궁극적 정체성 또한 그 대상의 부재를 통해 욕망의 달성이 끊임없이 연기됨으로써 비로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과 대화를 시작한다.

김형관_Long Slow Distance 0712_캔버스에 유채_125×125cm_2007

에베레스트도, 남극도 이제는 하나의 검은 거울이 된다. 에베레스트나 남극을 바라보던 관람자는 이제 그림의 공간 속에서 자신의 시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림이 나의 시선을 되돌려줄 때, 나는 어쩌면 나의 실존적 시간의 현재성에 전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의 대사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을 보았어. 오리온 전투에서 불타오르던 우주전함들, 그리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던 씨-빔의 물결들...이 모든 기억들이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을 되뇌이는 한이 있더라도. ■ 정헌이

Vol.20071022d | 김형관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