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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17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신관 2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自 序 모호한 나의 조각들 ● 지나가는 삶이란, 삶의 세목들이 거세된 삶의 분위기다. 반성 없이 맴도는 삶의 모양은 징그럽고도 지긋지긋한 시간이다. 그 시간은 생생함과 구체성, 그리고 박진감을제거한 삶이며 삶에 가까운 삶이지, 삶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외관뿐인 삶이며 본질이 없는 익명적 삶이다. 그 삶은 빛나는 것이 없는 세계, 혹은 희망이 없는 세계, 어둠의 세계, 사라짐의 세계로 나타난다. 밝음과 희망은 삶에 의미를 부여 하는 힘이지만 , 나의 사진에서는 그것이 힘으로 작용 하는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 없는 것, 막막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이 있어야만 꿈을 꿀 수 있고 허무하지 않지만, 그러나 없는 것이다. 본질은 없고 외관만 있을 때, 모든 것은 우연히 존재 한다. 그것들은 따로따로 존재하며,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 세계는 외로운 졍치다. 그 외로움은 , 세계가 의미 없다는 것을 인식한 뒤의 외로움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 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현실부정이나 자괴감이다. 다시 말해, 그 외로움의 세계는 바라보아도 만져지지 않는 벌판과 같은 사막에서의 삶이다. 그 사막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외관상 오고가는 것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사물들은, 공(空)으로서의 색(色)이며, 그 색의 세계는 무거워 보이나 사실은 가볍다. 나는 그 색을 텅빈 공(空)이라 여기며, 현재의 색(色)를 부정하는 비극적 세계관으로 인식 한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도 될 수 없다고 선언 한다. 다시 말해 항상 떠나가고파 하며, 땅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지도 못하여, 그런 근거를 마련하지도 못한다. 나는 어둡지만 공처럼 가벼워 떠돌려 하며, 우연적이고, 다른 것들과는 쉬~ 관계 맺지도 못하며, 중심으로 안착하지도 못하여 생기 마저 잃었다.
공(空)으로서의 색(色)만 있는 세계, 본질은 없고 껍데기만 둥둥 떠다니는 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떨어지는 공의 이미지이고, 유모차를 앞에 둔 그림자가 그렇고, 자는 듯 누운 남자의 모습이 그렇다. 허무함이나 무기력함으로 날려 가는 신문은 이미 내 팽개쳐진 생기며, 저쪽으로 향하는 영혼이지, 결코 이쪽으로 향하는 욕망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의 나라저쪽으로의 정해진 떠남 같아 보인다. 그래서 여기서 꾸는 내 꿈은 이미 부서진 꿈이고, 흩어진 세계다. 그래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또 그 무엇도 될 수 없노라 울음 우는 것이다. 이미 꿈이 아닌 절망임을 뒷받침하는 암시들이 모호한 빛이고, 비고, 바다고, 바람이다. 그것들은 공중에서 떨어져 내릴 때에는 찬란해 보이나, 공중에서만 존재 할 뿐, 땅에 떨어지면 부서지고, 사라지는 것이 속성이고 그것이운명이다.
그것은 겨울 한구석 이름 없는 거리에 쌓였다 넘어지는 눈이며, 그 비는 믿을 수 없는 비고, 뱃전에 이는 바람은 허수아비 같은 바람일 것이고, 어디로 인지도 모르고 날아가는 바람인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죽어 가는 것만 살아서,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닌 살아감이다. 그 살아나감은 희망, 밝음이 없다. 그래서 절망이다. 그 절망은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근원적, 모태적 세계로 회귀 하고픈 지친에너지의 삶이다. 그 근원을 상실하고 헤메이는 삶은 언제나 파행과 실패를 낳는 절망 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세계는 나오는 순간부터 사물화되고, 물질화되어 돌아 가야할 근원적인 세계는 이미 잊었다. 달리 말해, 진정한 의미의 돌아가야 할 근원이란 이 자본주의의 생래적 조건에서는 이젠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아가려는 기저의 의지는 처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의'돌아감'이 아니라'한자리를 뱅뱅 맴돌다 간다'는 뜻의 돌아감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렇게 생성과 소멸은 동시적이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세계인식은 그 절망이 「근원-모태」라는 변별적 형상을 갖고 있기에 그 지향점이 되어 준다. 그 구별된 대립은 일차적으로 흘러감/흘러가지 않음의 대립이다. 연대의식의 심화라는 윤리적 측면에서 흘러가지 않음은 비상식일 수도 있겠지만 , 종래의 상투적인 찬사에 저항할 수 있을 때만 이 엄격한 의미에서, 언어적 윤리의식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거라는 인식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 사진들에서 그런 것들이 조금이라도 솔깃하지 않다면, 이 작업들조차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유기룡
Vol.20071021a | 유기룡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