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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12_금요일_06:00pm
갤러리 터치아트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235번지 예술마을 헤이리 ㈜터치아트 Tel. 031_949_9437 www.gallerytouchart.com
ONE + ONE = ? ● 1+1 = 창문(田)이 된다는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기호 또는 이미지의 장난 같기도 했던 등식을 기억하는가? 어릴 적 숫자와 수학 기호가 합쳐져 이미지가 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냥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이러한 장난은 숫자와 기호라는 1차적 인식을 너머 이를 이미지로 그리고 언어로 표현한다면 하나 더하기 하나는 몇 일까? 혹은 하나와 또 다른 하나를 합하면 무엇이 될까? 라는 호기심의 출발은 아니었을까? 다양하게 확장해 보려는 이러한 상상은 물방울과 물방울이 만나면 또 다시 하나의 물방울을 이루고 한 짝의 신발과 또 한 짝의 신발이 만나 한 켤레의 신발이 된다. '눈'이라는 단어와 '사람'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의 단어가 만나 '눈사람'이라는 또 다른 의미와 대상을 지시하는 단어가 되고 왼손과 오른손의 그림자가 만나 한 마리 새가되어 날아간다. ONE +ONE은 무한상상의 동기! 이것에 시선을 고정시켜보자. ● 숨겨진 +one 을 찾아라!_전시를 통해 이미지와 또 하나의 이미지가, 작품과 또 하나의 작품이 더해지고 재료와 또 다른 재료가 만나고 하나의 표현 방식과 또 하나의 방식이 만나게 되면 어떠한 새롭고 다른 이미지와 작품과 재료와 방식이 만들어질까? 역으로 전시를 통해 만나게 되는 하나의 작품 속에는 우리가 만나게 되는 하나의 이미지, 표현, 의미 속에 또 다른 하나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사진, 회화와 조각을 하는 다섯 작가가 본 전시의 구성원이 되었다. 하나하나의 그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사진에 회화가 있고 사진과 설치가 있다. 회화에 조소가 있고 조각과 설치가 있다. 어떤 one을 드러내고 어떤 one이 숨었는가? 어떤 one이 공간을 드러내고 또 어떤 one이 공간을 숨기는가?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은 또 다른 one이 되고 전시 공간을 서성이며 또 하나의 관람객에게 전시 속의 숨은 +one이 된다. 그리고 새로운 관람객의 그림자가 되어 전시 속 숨은 +one을 찾아 나선다.
+one 一色 - 내밀히 숨겨진 측면 ● 사진의 평면에 부여한 고(高)저(低)와 측면이 가진 회화 지층-권두현_사진이 사실을 기록함으로 시작하지만 그 기록의 표면을 흔드는 권두현의 사진은 무언가를 더 보고자 하는 호기심을 유발하여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표면에 몰입하게 하여 그 실체를 더욱더 강하게 각인시키는 힘이 있다. 과거 잘 찍힌 사진이란 초점이 잘 맞아 기록하고자 하는 대상(인물이나 풍경)을 얼마만큼 또렷하게 재현했느냐가 그 판단의 주 근거였다. 이러한 사진을 통해 우리는 많은 정보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권두현의 사진은 이러한 근거를 여지없이 흔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의 사진은 인식할 수 있는 유사형태의 흔적을 최소화하고 대상을 만났을 때의 일차적인 느낌만으로 그 숨겨진 대상의 모든 것을 추측하게 한다. 그는 이러한 바탕에 또 하나의 형식적 실험을 부가하는데, 그 방식은 이미지를 틀 지우는 프레임에 높이를 부여하여 부조형태의 입체감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 사진은 얇은 인화지에 이미지가 안착되었기에 측면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존재하지 않는 측면을 화면의 확장과 깊이로 주목하여 두께를 만들고, 간과되는 측면에 그림을 그려 나간다. 어디 그뿐이랴, 인화지의 얇은 두께가 무색할 만큼 화면 이미지의 잘 표현된 원근법적 깊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화면의 정면에 높이를 만들어 높고 낮음을 형성한다. 기록화 되는 대상 자체의 시간의 깊이를 표현하고자 함인지, 각각의 대상이 내포한 느낌의 깊이를 표현하려 함인지, 분할된 화면의 한 부분은 더 높은 높이로 돌출된다, 이러한 돌출을 가능케 하는 두께가 만든 측면, 그 측면에 그려진 회화로 인해 권두현의 사진은 단 하나만 존재하는 모노 프린트의 운명이 된다. 사진의 복수성을 역행하며 그는 측면에 페인팅을 첨가하며 새로운 의미로 작업을 제시한다. 부조형태, 측면 부각과 회화의 첨가로 사진 자체의 특성을 희석시킴으로써 만들어내는 그의 이러한 합성법은 사진과 부조, 사진과 회화의 간극에서 정의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흐릿하게 흔들어 놓은 대상의 이미지처럼 현재 진행형이다.
+one 二色 - 사진과 견직의 배색이 엮어낸 완결미 ● 사진으로 벽에 수를 놓다. 사진을 너머 설치로-조성연 ● 동트는 아침 한옥의 미닫이문 한지 사이로 깃드는 빛은 은은하다. 하얀 벽면에 놓인 우리네 그릇과 그곳에 담긴 백색의 꽃, 청초한 잎을 담고 있는 조성연의 사진은 동트는 아침의 고요함과 단아함과 닮아있다. 그는 이러한 느낌을 품은 사진과 함께 은은한 빛깔의 얇은 사 견직 패널의 함께 배색하며 사진이라는 한 가지 영역에서 확장된 설치 형식의 작업을 보여준다. 마치 사진과 부분처럼 배치된 단색조의 패브릭 패널은 함께하는 사진이 재현하는 대상의 느낌을 색으로 표현한 듯 서로가 이질감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서로 다른 것이 만나 마치 하나처럼 보여주는 조화미와 그 완성도는 각기 다른 천의 자투리 조각으로 완성되었다고 믿어지지 않는 조각보의 완결미와 쏘옥 닮아있다.
더해서 좋지 않을 바에야 금과 옥을 더해도 이는 사족에 불과할 뿐이다. 사진과 함께 패브릭을 더한 그녀의 작업은 서로 다른 재료의 배색과 매치가 주는 완결미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벽면을 수놓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조각보의 완결미를 현대 사진과 패브릭의 배색을 통해 당대에 그 맥을 잊고 있다. ● 이제껏 가지런한 병렬배치를 보여주었던 조성연의 사진이, 이번만큼은 파격적으로 벽면을 점유하고 있다. 벽면에 수를 놓듯, 반닫이 높이에 따라 놓인 도자기 주둥이가 그리는 높낮이가 자연스럽게 공간에 수를 놓듯이 벽면에 자연스러운 등고선을 형성하며 설치되어 있다. 사진에 재현된 대상의 본질이 품고 있는 시간을 기록하고 배치, 그 시공의 배치가 그리는 기억의 지도를 보여주듯 사진이 그린 등고선에서 설치로 확장된 사진이 주는 신선함은 또 하나의 매력이다.
+one 三色 - 촉각의 시각화 각 시공의 직조술 ● 인스턴트식 시공간의 패치워크가 그리는 New story - 김남표_인스턴트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지금'이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적 규정을 갖는 말이나, 현실에서는 단시간에 필요한 것을 얻고자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상품 앞에 따라붙어 쓰인다. 따라서 욕망충족의 필요에 의해 모든 것을 배제하기에 인스턴트식품, 인스턴트 사랑 등 인스턴트란 개념은 얕고 즉발적인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김남표가 제시하는 인스턴트식 풍경 또한 욕망에 의해 각각의 시간과 공간을 즉발적으로 묶어낸 것과 같이 한 화면에 다양한 시공간이 공존한다. ● 책 위에 올려진 구두에서 우리는 얼룩말을 보고, 그 배경에는 호수인지 바다인지 물이 드리워져 있다. 이 수면 위로 나무가 올라와 있다. 어디 이뿐이랴, 바닥에 깔린 동물의 털가죽은 어느새 이과수폭포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리듯 재현되어 있다. 그 사물의 느낌과 형태가 갖는 유사성을 확대하고 기호에 맞게 각각이 배치되고 있되 배경의 물과 바닥의 털가죽은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모두가 책을 위시해서 나온 상상의 세계인지, 책은 화면의 중간에서 무게중심을 잡으며 이 모든 이미지의 조합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더욱이 화면의 각 부분 부분에는 진짜로 짐승의 털이 붙어있다. 이 또한 모조로서 한 순간 필요의 욕망을 채우면 순식간에 페기 될 인스턴트식 운명이다. 이러한 불안감이 그의 그림에는 가득하기에 이러한 인조 모피의 촉각적 재료의 시각화가 가져오는 의미는 김남표식 스토리텔링의 이미지 융합에 있어서는 실로 지대한 공헌을 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대체로 화면에 동물이 등장하니 생뚱맞아 보이지도 않는다. 한쪽은 장엄한 폭포수가 떨어지는 광활한 자연이지만 다른 한쪽은 이 물이 풀장에 가두어진 물에 불과하다. 또한 이 중간에 떠있는 컵과 접시에는 소비욕망의 대상들이 떠있다. 요트와 자연의 풍광이 그 안에 담겨져서 한 잔의 인스턴트커피처럼 소비되는 현대사회 욕망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말 그대로 자연의 생명들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즉시 상품화 되어 탄생되기도 하고, 싫증나면 즉시 폐기처분 되는 인스턴트 상품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인스턴트식 소비욕망의 총체를 보여주고 있기에 그의 작업은 풍자적 쾌가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인스턴트 풍경' 이라는 그의 작품은 욕망의 재현이고, 현재 우리의 일상이 욕망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인스턴트식 욕망을 즐기든가 아님 신랄하게 비꼬는가는 당신의 욕망에 달려있다.
+one 四色 - 유리구슬이 그리는 마법 ● 디지털 프린트와 조우한 드로잉에 놓인 마법의 지도 - 이강욱_신조어 디지로그(digilog)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로 현대 문화의 한 부분을 대표하는 디지털문화와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혼융되는 문화현상을 지칭하는 대표적 키워드이다. 디지털 기술의 수혜세대인 만큼 이강욱의 작업은 디지털 기술을 적극 도입하고 활용함에 주저함이 없다. ● 그는 미시적 세포, 꽃, 과일을 확대하여 디지털 기술로 천 위에 총 천연색으로 전사한다. 그 다음 이 천연색의 이미지를 순 백색의 미디엄을 가지고 뿌옇고 흐릿하게 이미지를 지워 나간다. 이러한 결과 위에 감수성으로 무장한 작가의 아날로그적인 드로잉이라는 액션을 부가하여 이미지 디지로그의 합성어를 완성한다. 단지 이렇다하면 이강욱의 작업은 이미지 디지로그라는 합성어를 위한 공식에 불과하겠지만, 그는 이러한 과정의 결과의 표면에 미세한 유리구슬을 도포함과 동시에 반짝이는 재료를 첨가하여 마치 검은 벨벳천 위에 떨어져 있는 수많은 다이아몬드를 보듯 환상적이고 신비한 느낌을 만들어 낸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는 듯 그의 화면은 반짝임과 동시에 유리비즈가 스팟 조명에 의해 빛의 광학적 아름다움이 선사하는 반짝임과 보는 각도에 따라 수면의 반짝임이 이동하듯 관람자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화면 앞에서 이리저리 이동하며 그 반사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즐거움을 경험하게 한다. 크고 작은 유리비즈가 화면의 이미지와 완벽하게 하나가 된 이 작은 오브제는 마치 마법사의 마법의 구슬처럼 작품에 신비감과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흐릿하게 침잠된 이미지의 생명력이나 생체활동 중에 수없이 반복되는 세포의 생성과 소멸을 상징하듯 유리구슬은 반짝임을 통해 생의 탄생과 소멸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우주적 공간에 그려진 선들은 내재된 에너지를 확장시키며 아우라를 만드는 마법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one 五色 - 일회성 오브제가 만드는 영원한 로망의 아리러니 ● 빨대로 구성된 풍경너머 무한원형으로 분절된 풍경 -홍상식_전시장에 들어서면 눈 내린 백색 대나무 숲이 펼쳐진다. 대나무 숲에 이는 바람에 댓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러한 풍경의 일루전에 푹 잠길 수 있기에 이 풍경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가 궁금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풍경이 가장 일회적이고 인공적인 재료이며 일상에서 흔히 보는 오브제인 빨대로 재현되었다. ● 환경오염의 주원인인 빨대를 이용하여 구축된 대나무 설경은 너무 아름답기에 이는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홍상식은 이 풍경을 전시장의 유리 벽면에 설치함으로써 확장효과를 획득하게 된다. 즉, 빨대라는 속이 원형으로 비어있는 관 형태가 갖게 되는 관통성으로 인해 대나무 숲으로 다가서면 그 빨대의 원형 구멍과 구멍사이로 푸른 호수와 나무는 물론 허공을 가로지르는 새까지 무한원형으로 분절된 유리벽 너머 외부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빨대라는 것은 액체를 섭취하기 용이하게 하는 도구임을 유의해 보면, 수많은 원형 안에 잡힌 풍광은 수많은 사람들이 섭취하고 있는 자연일 것이다. 마치 코카콜라나 7-UP처럼 자연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배설하는 소비의 과정을 일회용 빨대로 구축된 대나무 숲과 그 너머 무한원형으로 분절된 자연풍광의 유입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의도가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시대의 모순을 읽을 수 있게 하는 그가 가진 유쾌하고 상쾌한 재치다. ● 이러한 그의 의도는 코카콜라 형태의 작업과 그 안에 비쳐지는 코카콜라 양의 차이에서 개개인의 자본주의에서 보여지는 욕망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으며, 각종 럭셔리 패션 아이템(핸드백, 하이힐 등)을 표현한 작업에서 더욱더 명확해진다. 일상적 오브제의 입체화가 주는 유쾌함과 풍경너머의 풍경이 갖는 확장의미를 사회적 모순의 새로운 의미로 파생시키는 작가의 합성법은 절반이상의 성공이지 아니한가? 나머지는 관람객의 몫일 터.
각각의 +ONE을 품은 다섯 작가의 작업이 갖은 오색은 그자체가 한 마리의 오색조처럼 조화롭다. 이 오색에 숨겨진 또 하나가 무엇인가? 하는 호기심과 함께 공간을 가로지르는 오색조의 빛깔을 찾아보는 것이 관람객으로서는 또 하나의+one 이다. 이건 관객의 몫이다. 이시대의 시각적 감각의 선두에서 즐길 수 있느냐 아님 두리번거리는 주변자로 자신을 존재케 하느냐는 전적으로 당신의 적극적 개입성에 있다. 이 오색조의 색을 지정할 수 있는 시간에 당신이 존재하길 원한다면 one+one 은 완성된다. ■ 이정훈
Vol.20071020c | One + One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