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기념비-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기획_안지미_이부록_채미애   2007_1017 ▶ 2007_1027 / 일,공휴일 휴관

낙화연작_프린트_가변크기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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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17_수요일_05:00pm

신한갤러리 서울 중구 태평로1가 61-12번지 4층 Tel. 02_722_8493 www.shinhanmuseum.co.kr

인간은 언어적 존재이다. 이 말만큼 인간과 문화와의 관계를 직접 정의 하는 명제는 없을 것이다. 그 중심에 우리의 문자생활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문자는 가령 신문이나 책에서와 같이 활자적인 특성을 갖는 이른바 공식화, 매체화된 것이 대표한다. 그런 층위를 넘어서 우리 삶 속에 문자가 얼마나 다양하고도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의도나 표현에 사용되는 도구적 층위를 넘어서 문자가 그 자체로 시간을 겪으며 탄생하고 변형되고 사멸하는 존재의 영역을 주목하는 일 말이다.

낙화연작_프린트_가변크기_2007
낙화연작_프린트_가변크기_2007

일상의 도구적 문자를 넘어선 영역의 예는 눈여겨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주변에는 아무런 의도나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 낙서가 곧잘 눈에 띈다. 낙서에서는 씌어진 문자(기호)의 형태(기표)로서 읽힐 뿐 그것이 얘기하고자 하는 의미(기의)는 증발되기가 일쑤다. 이는 전혀 다른 맥락의 이미지와 텍스트가 만나 그것을 생산한 주체와 무관하게 문자 자체가 의미를 생성하는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도시란 공간 속에서 문자끼리 관계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현상을 주목할 수도 있다. 문자가 갖는 생성력은 자기들끼리 부딪쳐 변형을 겪으며 번식해가며 도시란 공간에서 그 순간의 기념비적인 어떤 것을 창조한다. 개인의 층위로 시선을 돌리면, 문자는 개인의 기억을 통해 지극히 사적인 기념비를 축조한다. 그것은 몇 장의 이미지와 함께 하나의 서사로 엮이는데, 그 기억을 엮는 끈은 문자적 요소이다. 삶의 매듭들로 현상되는 개인의 기념비적인 세계 속에서 문자의 새로운 존재영역이 드러난다.

엥꼬_플래카드_설치_2007
공고_플래카드_설치_2007

문자를 도구로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문자의 생성적 힘을 억압하는 행위이다.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모델 속에 갇힌 오늘날의 문자는 교환되는 코드체계 속에서 그것 자체가 가졌던 생성력을 상실한다. 그런데 낙서, 문자와 이미지의 우연한 병치, 도시의 뒤얽힌 간판, 개인의 내면적 기억의 풍경 들에서는 문자의 기본 기능인 소통, 설득, 이해를 넘어선 문자 자체의 변용, 생성의 현상들이 다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문자의 잠재적 영역에 들어서는 것은 문자 자체에 주목하기, 다시 말해 문자 존재의 비의도적 의도를 살피는 일이 될 것이다. 『문자의 기념비전』에서 제시되고 있는 이러한 예들은 문자를 매개로 한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탈시간적 존재방식들을 시간화한다. 이를 통해 문자는 일상의 기능적 소통에 균열을 일으키고 전혀 다른 질문과 서사를 불러일으킨다. ● 우리는 문자가 탄생된 이후 지금껏 문자를 문자 자체로 보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서양 알파벳 문화를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다. 알파벳은 태생 자체가 결국은 도량형적 의미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 사이의 문명사적 단절, 즉 농경문화가 형성되면서 필연적으로 도량형의 제도들이 필요했고, 그것의 중요한 한 예가 문자이다. 구석기인들이 남긴 라스코벽화의 들소 그림과 신석기인들이 남긴 문양 사이의 차이를 두고 조르주 바타이유만큼 구석기적 생성력의 상실이라며 애도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군무_디지털 인화_32×41cm_2007
문산, 30년 전의 일부_디지털 프린트_설치_가변크기_2007

? 같은 맥락에서 발터 벤야민은 언어와 자연적 본질이 존재론적으로 닮아 있는 아담의 언어'를 제시한다. 벤야민은 커뮤니케이션 모델에 머무는 문자를 자연의 총체성을 잃어버린 파편화'라고 설명한다. 파편화에서 총체성으로 넘어가는 사이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예술가가 마르셀 뒤샹이다. 그는 소변기를 전시장에 옮겨놓음으로써 하나의 작품으로서 미술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예술의 총체적 의미를 질문했다. 이런 반성을 문자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사유한 이가 자크 데리다이다. 그는 『그라마톨로지』에서 "모든 문자는 상형성과 표음성을 동시에 가진다"고 쓰고 있다. 문자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에 의한 스투디움적 기능과 문자 자체의 푼크툼적 기능을 포괄적으로 말한 탁월한 개념이다. 『문자의 기념비전』은 이러한 입장에서 특히 후자의 현상에 주목한다. ● 문자는 이미 수단으로서의 대상이 아니고, 스스로 주체를 형성하는 제도이자 그 스스로 시간 속에서 삶을 사는 존재이다. 『문자의 기념비전』은 문자의 푼크툼적 차원을 새롭게 살핀다. 이는 문자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는 일, 그리고 문자의 자유를 되돌려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 채미애

Vol.20071019f | 문자의 기념비-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