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일곱번째

이소윤 조각展   2007_1017 ▶ 2007_1106

이소윤_장면3-불신_혼합재료_68×28×18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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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17_수요일_05:00pm

미술공간현 / 2007_1017 ▶ 2007_1023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02_732_5556 www.artspace-hyun.co.kr

empty space / 2007_1024 ▶ 2007_1106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2가 66-5번지 Tel. 010_9117_0316

여섯 소녀, 집으로 돌아오다-이소윤의 상황조각과 내러티브무대_여섯 개의 방. 방이되 방은 서로의 방을 향해 열려있어야 한다. 여섯 소녀는 방 안의 어디쯤에 있을 수 있다. 첫 번째 방에는 등받이 없는 벤치스타일의 의자가 놓여 있다. 두 번째 방의 바닥에는 둥근 거울이 있고, 네 번째 방에는 소녀와 똑 같은 평면인물상이 벽을 따라 서 있다. 여섯 번째 방에는 벽거울이 걸려 있다. ● 등장인물_소녀 1, 2, 3, 4, 5, 6 ● 인물성향_소녀는 모두 같은 존재이나 상황에 따라 연령과 감정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녀들은 다른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러나 6번 소녀만 빼고 다섯 소녀의 얼굴은 미소라 하기엔 어딘가 슬프고, 우울하다 하기엔 어정쩡한, 그러니까 표정으로서의 '미소'를 짓고 있다. 여섯 소녀에서 동일한 부분은 헤어스타일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4번 소녀만이 움직임이 있다. 소녀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자신의 그림자 혹은 투영된 자아를 지켜보거나 관객을 바라본다. ● 장면주제_각 소녀는 '설렘과 기대', '불안', '불신', '혼란', '단절', '위로'의 의미를 담고 있다. ● 주제설명_소녀들은 모두 작가의 분신이며, 작가가 살아 온 특정한 시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작가는 첫 개인전에서 그의 기억 속에 기명된 어떤 상처와 흔적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었다. 지극히 자전적일 수밖에 없는 이 작품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조금은 비밀스럽다. 여섯 소녀는 침묵을 지키며 지나친 '관객소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작가의 화제는 자신의 몸에 누적된 시간의 지층에서 같은 '나'이지만, 달리 보면 전혀 다른 시간 속에 존재했던 '나'의 순간들을 꺼내어 우리 앞에 놓는다. '나'와 '나'의 존재들. 그러나 이 모든 '나'는 어쩌면 '너'일 수도 있음을 발견한다. 작가의 삶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너'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너'가 없이 '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이 두 존재의 보이지 않는 상존성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이 이야기의 핵심일 수 있다. 전시장엔 '너'가 없는 '나'의 소녀들이 기다리고 있다. 실사 '너'는 바로 우리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기억하는 '나'의 실체에 대해 묻는다. 때로 우리 안에서 그 밖에서, 아니 어쩌면 경계에서 우리가 상실했거나 잃어버린 '나'의 '그/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이소윤_장면1-설렘과 기대_혼합재료_93×75×54cm_2007

장면 1_설렘과 기대설정_배낭을 멘 소녀가 의자에 앉아있다. 면바지에 연두 빛 남방을 입은 이 소녀의 옷차림으로 보아 초여름의 어느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표현을 굳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면, 소녀의 헤어스타일은 어벙하다. 넓은 이마의 윤곽을 따라 바가지 모양으로 둥글게 라인을 그었고, 뒤는 단발머리와 같다. 다만, 오른쪽 귀밑머리 부분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소녀는 참으로 '소녀적'이랄 수밖에 없는 경쾌한 붉은 테 안경을 쓰고 있는데, 정면에서 바라 본 안경의 풍경은 피곤한 기색을 내 보이며 잠든 눈이다. 사실, 그 너머의 진짜 얼굴은 부리한 눈을 크게 뜨고 세상 밖을 응시하고 있다. 배낭은 부푼 풍선과도 같아서 속내를 가늠하기가 매우 힘들다. 무엇을 그리 잔뜩 넣어 왔을까? 그러나 우리는 짐짓 소녀의 분위기에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텅 빈 배낭을 상상하기도 한다. 의자의 한쪽에 앉은 소녀 맞은편에 작은 손거울이 놓여 있다. ● 통역_이 이야기는 불교의 십우도(심우도라고도 함)와 비슷하다. 작가는 여섯 개의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 다를 뿐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정과 다르지 않다. 십우도의 첫 번재 이야기는 '심우(尋牛)'라 하여 자아의 상징인 소를 찾아 산 속을 헤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소녀의 모습은 소를 찾는 동자처럼 자신을 찾아 떠난 여행객의 모습이다. 소녀의 옆에 놓여있는 거울은 심우의 소와 같은 상징을 가진다. 즉 나는 나를 봄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기 때문이다. 작가 이소윤은 코끼리에 대한 상상을 조형화하기도 했었다. 이번 전시에선 볼 수 없지만 언젠가 코끼리로 환생한 소녀의 이미지를 볼 수도 있을 터이다.

이소윤_장면2-불안_혼합재료_45×20×48cm_2007

장면 2_불안설정_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쪼그리고 앉은 소녀가 저 위에 있다. 소녀의 시선은 좌측 어딘가를 향하고 있지만, 초점이 없다. 청바지와 남방을 입고 있다. 소녀의 불안함은 '웅크림'에서 찾을 수도 있겠으나 벽 위의 난간에 앉아 있는 것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소녀의 몸짓은 어떠한 과장도 없으나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위태롭게 한다. 몸에 비해 훨씬 커 보이는 얼굴, 멈칫거리는 입의 표정. 그런 소녀의 모습이 바닥에 배치한 거울에 비쳐지고 있다. 마치 우물을 연상케 하는 이 거울은 끝없이 추락할 것 만 같은 어지럼을 불러일으킨다. ● 통역_십우도의 두 번째 그림은 '견적(見跡)'이라 하여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조각가 이소윤은 아직 견적에 이르지 못한 소녀의 몸짓을 보여준다. 여전히 소녀는 분절된 자아로 인해 불안하다. 그것이 나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 밑 깊은 우물에 비친 얼굴은 어느 새 사라지고 없다. 이 불안의 심리적 풍경은 거울과의 거리가 더 멀리 느껴지기 때문에 오는 극단적 상황에서 더욱 심화된다.

이소윤_장면3-불신_혼합재료_68×28×18cm_2007

장면 3_불신설정_잿빛 후드 티를 입은 소녀가 울고 있다. 검은 마스카라 화장이 지워진 흔적, 검은 눈물. 소녀는 얼굴만 드러낸 채 몸에서 흐느끼는 슬픔을 눈물로 꺼낸다. 두툼한 후드 티로 보아 늦은 가을이 아닐까 한다. 소녀는 막연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부터 달려왔거나 내려왔거나 혹은 마중이거나 배웅일 수 있는 '상황'을 떠 올리게 한다. 다른 소녀들과 달리 이 소녀에게선 거친 호흡이 느껴지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내성적 자아의 '수줍음' 같은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 수줍음은 가볍지 않아서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무거움이 있다. ● 통역_견적은 이 후드 티의 소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소녀는 고무줄을 쥔 채 드디어 거울 앞에 선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모습은 자신의 과거이며, 어두운 그림자 즉, 등이다. 이것은 스스로 자아를 발견했음에도 이를 바로 보지 못하는 불신에서 시작된다. '나'가 '나'를 불신하는 것은 '나'를 이루고 있는 숱한 환경에서 시작된다. '나'가 아닌 무수한 '너'들로 인해 불신의 유혹은 커졌다 작아진다. 그것은 또한 자아를 미궁에 빠지게 하는 혼란과도 같다. 견적은 참마음과 자기를 찾으려는 일념으로 헤매다가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쉽게 인식될 수 있겠는가!

이소윤_장면4-혼란_혼합재료_61×23×18cm_2007
이소윤_장면4-혼란_혼합재료_61×23×18cm_2007

장면 4_혼란설정_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방 중심에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돌린다. 이리저리, 좌로 우로, 휘둥그레진 큰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다. 소녀가 있는 방에는 무수한 소녀의 초상이 벽에 서 있다. 소녀는 자신의 초상을 등지고 서서 꼼짝달싹 하지 않은 채 마음만 동동거리고 있다. 소녀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몰라 한다. 그런 소녀를 무수한 소녀의 초상이 지켜보고 있다. 어디로 향할 것인가 아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 ● 통역_혼란의 순간은 멀리 있는 자아를 발견할 때 극점에 오른다. 십우도의 세 번째 그림에 해당하는 '견우(見牛)'는 본성의 깨달음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음을 상징하다. 소녀는 자신의 초상 앞에서 자신을 보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 초상들 사이 어디에 거울이 놓여 있음에야 거짓이 작동할 근거는 이제 없다. 소녀는 이 혼란의 유혹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이소윤_장면5-단절_혼합재료_72×70×70cm_2007

장면 5_단절이야기_소녀는 가위 손으로 돌변해 있다. 둥근 반사경 위에 서서 날카로운 가위 손을 벌리고 있다. 멜빵 치마에 손목 긴 남방을 입은 소녀는 뒤집어 비추는 거울을 밟고, 자신의 초상을 난도질하고 있다. 거울 아래 바닥에는 잘려나간 소녀의 초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여섯 소녀 중에서 가장 무채색에 가까운 옷을 입은 소녀의 심리적 풍경은 그래서 감별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럼에도 우린 이 소녀에게서 현실이 아닌 판타지의 세계로 뛰어 든 소녀의 자아와 마주친다. 열 손가락이 긴 가위로 바뀐 이 상황은 영화와 달리 자아의 기억을 잘라 냄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자아를 찾으려는 소녀의 꿈이기도 하다. ● 통역_가위 손의 소녀는 '득우(得牛)'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동자가 소를 붙잡아 고삐를 낀 모습이다. 이때 소는 아직 검은 색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탐진치라 하여 삼독(三毒)에 물들어 있는 거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탐욕과도 상관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소녀의 이야기가 이 십우도를 해석하는 조각은 아니어서 모든 장면을 그리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이 소녀는 오히려 무수한 자아의 인연을 끊어 버림으로써 자아를 획득하려는 순간을 드러낸다. 어쩌면 소녀에게 있어 삼독과 탐욕은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자신이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소윤_장면6-위로_혼합재료_61×23×24cm_2007
이소윤_장면6-위로_혼합재료_61×23×24cm_2007

장면 6_위로이야기_다섯 소녀의 풍경이 다소 흐릿하고, 안개 속에 내비친 것 마냥 선명하지 않았다면, 여섯 번째 소녀는 또렷하다 싶을 만큼 칼라풀하다. 분홍빛의 체크무늬 원피스에 하늘 빛 운동화, 붉은 색 띠가 있는 흰 양말, 홍조 띤 얼굴과 다문 입, 하지만 살짝 내 비치는 미소는 자신과의 화해를 손짓하지 않나 싶다. 실제로 소녀는 오른 손을 내밀어 사탕 하나를 건넨다. 사탕은 작가가 피로할 때 먹는 간식이기도 하다. 거울 앞에서 제 스스로를 향해 건네는 이 화해야 말로 '나'가 '나'에게 바치는 작은 위로가 아닐는지. ● 통역_십우도의 여섯 번째 '기우귀가(騎牛歸家)'이다. 동자는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온다. 이는 내가 내 마음을 타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옴을 의미한다. 소녀의 손짓은 귀가의 손짓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 단계는 아직 미정인 상황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십우도의 그림들이 온전한 깨달음을 통해 한 단계씩 나아가는 것이라면, 이소윤의 작품들은 조금은 겉돌고 또한 조금은 분절적이다.

이소윤_기운내!_혼합재료_3×4×4cm×21_2007
이소윤_go_혼합재료_30×15×14cm_2007

조각가 이소윤은 자신의 전시 제목을 "그리고 일곱 번째"라 명명했다. 여섯 소녀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자기 고백적 제목인 셈이다. 시간의 흔적을 뒤져 과거를 환류시키고 다시 거울에 되비친 현재를 긍정의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이소윤이 발견한 '자아찾기'의 독자적 방식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직 그의 일곱 번째는 남아있을 터이다. 하지만 이 여섯 소녀가 완결점이라고 단정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무수한 소녀들의 기억을 지우고 단지 이 여섯 소녀만이 과거를 치유하는 것이라면, 다른 소녀들의 기억은 수몰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우귀가가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이소윤의 조각은 이야기를 구조화하고 있단 점에서 '상황조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야기 구조화 자체를 상황으로 설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서사적 구조를 배제하고 상상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이소윤 조각이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연출효과는 다분히 서사적이며 상황적이다. 그러나 그의 '상황'과 '조각'은 균형을 갖지 않아 어디지 불안해 보인다. 상황의 시각화를 염두에 두었다면, 그의 조각들은 단지 '하나'에 모든 것을 담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어야 옳다. 여섯 소녀는 그가 보여주는 서사를 담기엔 너무 버거워 보인다. 이것이 모노극이라 할지라도 한 개 장면의 극적 구성은 많은 상황을 내러티브로 갖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십우도를 대입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었는지 필자에겐 의문이다. 그러나 다분히 자전적이며, '성장'의 내러티브를 갖고 있는 이 이야기는 『화엄경』의 선재동자처럼 '깨달음'의 성징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단순한 '성장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우도와 상관하는 이 조각적 맥락은 일정부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소윤의 조각이 소녀취향의 조형성과 전체 연출의 효과가 매우 정적이란 점은 한계로 보인다. 또한, 그 자신이 이후 작업에 대해서 '상황조각'을 지속할 때는 이 한계는 화두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 작은(스케일) 조각들이, 단 여섯 개의 조각이지만, 삶의 리얼리티로부터 숙고한 형상들이란 점에서 희망적이다. 난, 그 첫 발걸음에 주목한 것이고. ■ 김종길

Vol.20071019d | 이소윤 조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