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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1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갤러리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참여연대 옆) Tel. 02_720_9282 blog.knua.ac.kr/gallery175
정체성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은 나와 나 이외의 것에 대한 차이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스스로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여 오던 공간과 사회관계 속에서, 분리됨을 느끼는 순간의 낯설음은 스스로의 거울에 강렬한 시선을 던지게 하며 또한 분리되기 이전의 공간에 대한 강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번 전시의 두 작가는 이러한 낯설음의 원인과 그것의 직접적 경험의 순간을 기본적으로 미디어에서 찾고 있다. 우선 찰리한은 미국에 사는 한인 1.5세 작가로서 자신을 '차이'짓게 하는, 즉 미국사회에서 낯설음을 느끼게 하는 원인을 미디어를 통해 받아들여지는 문화적 권력에 있다고 본다. 자신이 소수계 미국인임에도 문화적 권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는 미디어에 의해 스스로도 모르게 미국인의 일반적인 상징적 요소들이 수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에게 미국국민들 저는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듣기를 제 말을 제가 말합니다 다시 한 번 나는 않았습니다. 가지기 성적 를 관계 과 그 여성 양 말입니다 르윈스키"이것은 찰리한의 비디오 작품인 'Untitled Identity'속의 여러 캡션 중 한 장면이다. 우리에겐 이벤트처럼 받아들여졌지만 미국인에게는 큰 상징적 사건 중의 하나였던 르윈스키 스캔들에 대한 클린턴의 음성 클립이다. 이처럼 찰리한은 미국인들이 들으면 흔히 아는(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를 수도 있고 그다지 유명하지 않을 수도 있는) 미국의 문화적 아이콘들에서 음성을 그대로 따와서 립싱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택시 드라이버', '어 퓨 굿맨'의 한 대사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케네디 전 미대통령의 유명한 연설 중 한 부분들이 영문법의 순서대로 튀어나오면서 국어문법에 맞추어 재배열된 한글자막으로 등장한다. 영문법의 순서대로라면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에게 미국국민들 저는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듣기를 제 말을 제가 말합니다 다시 한번 나는 않았습니다 가지기 성적 를 관계 과 그 여성 양 말입니다 르윈스키'라고 쓰여지는 것이 번역되어 '그러나 나는 미국국민들에게 한 가지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제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제가 다시한번 말합니다. 나는 그 여성과 성적 관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르윈스키양 말입니다.' 이렇게 국어문법으로 재배열되는 것이다.
이렇듯 작품에서 우선 그는 본인의 자화상을 화면에 내세우며 개인성에 대한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여기 그대로 있으나 미국인이 되어 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가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의 입모양과 동화된 소리는 앞서 말한 것처럼 강한 미국적 상징성을 띄고 있다. 그리고 아래에 뜨는 한글자막이 영문법의 순서대로 뜨는 것은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미국인으로 변하는 과정의 이질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소리가 가지는 상징성과 자막의 배치라는 두 요소의 관계는 원래 원만한 것이나 찰리한이라는 개인에게 개입하면서 셋 사이의 심한 차이를 드러내게 되고 이 과정에서 작가는 배후인물로 미디어를 지목하고 있다.
이제 두 눈을 감고 다시 작품을 감상해보면 우리는 상징성이라는 메시지만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떠한 상호작용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듣고 있는 메시지가 영화나 유명인사의 이미지적 음성이라면 더욱 강렬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러한 받아들임이 미디어의 문화적 권력이고 상징성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고 마셜 맥루한은 말한 바 있다. 보낸 사람의 메시지는 보낸 사람의 의도보다는 그것이 보내지는 방식인 미디어에 의해 좌우되며 기본적으로 그 의도와 방법은 같은 것이다. 이렇게 전달된 이미지를 보는 시각과 세계를 보는 시각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우리의 눈으로 전달되는 과정이 직접적인가 간접적인가하는 것이다. 일방향으로 의존된 시각을 제공하는 미디어는 간접적, 즉 그 전달과정 사이에서 변형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형이 커지고 더욱 의도된 것일수록 우리의 사고에 끼치는 영향도 클 수밖에 없다.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찰리의 작품을 눈을 감고 감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음성을 기억한 채로 조심히 자리를 옮겨 마크의 작품으로 가서 눈을 뜨면 찰리의 작품에서 그의 자화상 위에 마크의 작품이 서서히 오버랩 되는 또 다른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마크의 작품은 자화상이나 초상화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화상이나 초상화는 여러 디지털 미디어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되어 기본적인 모습을 거의 상실하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뚜렷하다. 개인이 미디어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되는 모습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미디어를 통한 세계의 변화 속에서 우리의 모습, 존재는 파편화 되고 혼란스러워 진다. 마크는 낯설음, 차이의 결과로 인식되는 정체성이 고립과 혼란으로 드러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찰리가 개인이 정체성을 느끼는 순간에 그가 서있는 그 자리에서 나와 내 주변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에 주목했다면, 마크는 스스로의 거울에 던진 강렬한 시선에서 스스로의 모습에 강한 이질감을 느끼고 고립됨을 경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찰리는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 끼인 자신과 거기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미디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마크는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상태에서 개인의 이미지의 고립과 변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의 고립과 변형은 우리가 미디어의 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으로서 드러나는 것인데 물질적 신체에서 사이버 스페이스적 신체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단계에서 오는 정체성 혼란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휴먼적 신체는 모든 환경적 위협과 인종, 젠더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긍정적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텔레비전 방송의 장면과 혼합된 자화상은 이러한 미디어와의 결합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으나 분명한 것은(우리에게 읽힌 작가의 긍정적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불안한 결합으로서 파편화된 이미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 중 눈에 띄는 세 개가 있는데 현재 미국에서 각 당의 대선후보로 나온 힐러리와 오바마, 줄리아니의 이미지이다. 굳이 정치인이었던 이유는 그의 재미난 이력과도 관계가 있겠지만(마크는 10년간 민주당 보좌관을 역임해 왔으며 최근까지 오바마의 캠페인 매니저 및 디렉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현대 정치 속의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닐까 한다. 현재의 정치만큼 가장 일상성을 가장하는 미디어 이미지 전쟁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해 항상 웃고 자신감 있게 손을 흔드는 그들의 모습이나 사죄할 때의 풀이 죽은 모습, 국가의 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 등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역동적이고 뚜렷한 감정을 표출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심어나간다.
이 세 이미지는 앞서 찰리의 작품에서 봐온 것과는 조금 다른, 그리고 마크의 초상화 작업과는 또 다른 상징성을 띄게 된다. 우리가 그들이 어느 나라의 정치인인지 아는 순간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미디어를 통해 학습된 이미지의 힘인 것이다. 상징화된다는 것, 그것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순간 이미 학습되어 당연시 여기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미디어를 통해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두 작가는 낯선 순간의 경험에서 강렬한 차이를 느끼고 그를 통해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 차이의 순간을 잡으라고."우리 엄마가 항상 말씀하시길 인생은 마치 처럼 상자 속의 초콜렛 네가 절대 모르는 무엇 거라고요 먹을지"(톰 행크스 '포레스트 검프'_찰리 한 'Untitled Identity' 중에서) ■ 서원석
Vol.20071015e | Charlie Hahn_Mark Issac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