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놀이

최순녕 수묵展   2007_1010 ▶ 2007_1016

최순녕_단양에서_한지에 수묵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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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10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3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한지 수묵과 디지털 수묵의 절묘한 조화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과 자연, 그 상생의 하모니 ● 최순녕의 작품에는 '놀이'라는 제목이 유난히 많다. 「강촌물놀이」,「장성 수묵놀이」,「헨렌강 수묵놀이」... 그렇다. 사실 예술은 놀이다. 굳이 호이징하의「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는 개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냥 마음 가는대로 신나게 한바탕 놀아보는 게 예술이다. 그것은 거침없는 해의반박(解衣般?=옷을 풀어헤치고 두 다리를 뻗고 앉음)의 경지라야 한다. 호구 생각하고 사심이 끼어 들면 그 때부터 신명은 사라진다. 뭔가를 이루려는 욕심. 그것은 작품에 경기(驚氣)를 일으키게 만든다. ● 놀이하는 예술가를 지향하는 최순녕의 노는 법은 예사롭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전통적 의미의 필을 찾기는 어렵다. 문인화적 의경(意境)을 지향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그의 작품은 필법이 자취를 감춘 다소 낯 설은 수묵의 세계다. 동양화에서 묵법과 함께 필법을 중시한 것은 필(筆)을 통해 작가의 내면을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 글쓰기 도구와 그림의 도구는 한가지였다. 따라서 그림의 필 속에 글씨의 습(習)이 전이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러나 서구문화의 유입과 해방 이후의 한글전용은 글쓰기 도구와 화필의 분리 현상을 초래했고 이는 문인화론의 강력한 근거를 이룬 서화용필동법론(書畵用筆同法論)의 존립기반을 앗아가 버렸다.

최순녕_바람부는날_한지에 수묵_2007

전통적 의미의 필법은 수묵화에서 이렇게 이탈해버렸다. 이제 화필은 서법에 기반을 둔 준법(?法)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진 대신 작가의 감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화한 느낌이다. 그러면 어떻게 작가의 내면을 전달할 것인가? 묵법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것인가? 그럴 경우 묵법만으로 내면성의 전달, 즉 사신(寫神)이 가능할까? 물론 감성의 전달은 가능하리라. 그러나 신(神)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는 지적인 측면의 전달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최순녕_西南海-夕_한지에 수묵_2007

최순녕의 작업이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그의 화폭을 보면 전통 수묵화에서 우연적 효과에 의지하던 발묵(潑墨)과 파묵(破墨)이 사뭇 절제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의도된 우연성」의 효과라고나 할까? 그것은 대자연이 만들어 내는 무언의 율동을 새로운 조형어법으로 담아낸 데서 잘 드러난다. 이를 테면「단양에서」라는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갈필(渴筆, 마른 먹)로 채색된 앞산의 실루엣과 적절한 간격을 두고 농도가 엷어지면서 후퇴하는 원산의 중첩된 실루엣은 대지의 생동하는 리듬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것은 대자연에 편재한 음과 양이 상생(相生)을 이루어가며 만들어내는 생기발랄한 평조(서양음악의 장조)의 화음이다. 작가는 이렇게 조직화된 묵법을 통해 대자연을 관조하면서 느낀 정(情)과 경(景)을 융합, 자신의 의경미를 표출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난 묵의 절제된 그러나 리드미컬한 맛은 전통 수묵화에서 작가의 인격을 드러내는 효율적 수단이었던 필법의 빈자리를 메울 만하다. ● 그러나 새로운 조형어법의 탐색을 위한 작가의 실험은 단지 전통적 묵법의 창신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는 화면 하단에 오선지 악보를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한층 강렬하게 전달하는 장치로 활용한다. 서양의 오선지 악보는 그것이 음악이라는 감성적 창작행위의 결과물 임에도 불구하고 본래는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행위에 바탕을 둔 것이다. 서양의 음악은 놀랍게도 수학에 그 기원을 둔다. 수학자로 유명한 피타고라스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는 음악이란 대립요소 간의 조화로운 통일이며 불협화음을 협화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가 말하는 조화는 수적 비례를 통해 산출된 조화를 의미했다. 서양의 고전음악이 주는 절제된 느낌은 이와 같은 수학적 배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고전적 규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낭만파 작곡가 마알러(Gustav Mahler)의 작품에서조차 우리는 지적(知的) 골기(骨氣)를 느낀다. 반면에 오음(五音)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음계는 음양오행설의 영향아래 이루어진 데다 음가(音價)를 나타내는 문자로 채워진 네모 칸 악보(즉 정간보)도 코드화 된 서양악보의 정밀함과는 거리가 멀고 추상적이며 직관적이다.

최순녕_수묵놀이-夕_한지에 수묵_2007

그런데 작가는 하필 수묵산수의 하단에 서양식 오선지 악보를 배치한 것일까? 오선지 악보는 우리에겐 이식된 근대 서구문화의 산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전통 음악조차도 오선지를 통해 인식해야할 만큼 강력한 서구 문화의 영향 아래 놓여있다. 최순녕은 전통 악보를 도입함으로써 허위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에게 익숙한 오선지 악보를 배치하는 솔직함을 택했다. 게다가 코드화 된 오선지악보를 통해 듣는 대지의 노래는 감성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이성적이지 않은가? 이 역시 작가의 내면성을 전해주는 필법의 빈자리를 메우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순녕_홍도뱃길_한지에 수묵_2007

최순녕의 이번 작업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작품을 컴퓨터로 마무리한다는 점이다. 화선지에서 벌어진 수묵놀이는 컴퓨터상에서 벌어지는 포토샵 놀이로 전환된다. 한지 위를 넘나들던 토끼털 붓은 자연스레 마우스라는 기계적인 붓으로 바뀐다. 가상의 웹 공간에 그리는 그 새로운 그림은 고도로 계산된 연산행위다. 수묵의 공간 속에다 작가는 자신과 그를 둘러싼 현대적 삶의 공간을 모자이크한다. 때로는 작가의 모습을, 때로는 동시대의 인간 군상을 그는 전통 산수화에서처럼 아주 작은 모습으로, 자연과의 조화를 거스르지 않는 채 살며시 포치한다. 특히 오선지 악보의 모티프는 전적으로 컴퓨터 작업에 힘입은 바 크다. 그의 익숙한 마우스 조작에 의해 오선지의 음표는 마치 물기를 잔뜩 머금은 발묵처럼 땅속으로 물속으로 파동 치며 퍼져 나간다. 아니 마치 대지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주에 편재한 음양오행의 만물이 상생의 길로 나아가듯이 말이다. ● 최순녕의 작품 속에서 동양과 서양의 패러다임, 과거와 현재의 패러다임이 교차함을 느낀다. 그 만큼 변혁기를 사는 작가로서 새로운 조형어법을 찾기 위해 남달리 고심하며 치열하게 맞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파묵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부조화를 깨고 상생을 향해 나아가는 희망에 찬 경련이다. ■ 정석범

Vol.20071013g | 최순녕 수묵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