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풍경

김은주 개인展   2007_1010 ▶ 2007_1028

김은주_꽃의 풍경_종이에 연필_129×152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벨벳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010_수요일_06:00pm

갤러리 벨벳 서울 종로구 팔판동 39번지 Tel. 02_736_7023 www.velvet.or.kr

김은주는 부산 작가다. 이 말은 작가의 거처가 부산이라는 지리적 테두리만을 한정하여 말하는 게 아니다. 이 말은 서울이라는 문화적 중심과의 역학 관계가 스미는 말이고 지역이라는 대표성으로서 부산이라는 음절이 가지고 있는 끈끈한 생명력이 풍기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김은주는 지역 작가거나 김은주는 생명력이 강하다거나 혹은 강건해 보이는 심신의 어떤 아우라까지도 포괄한다는 점까지 고려한 말이기도 하다.

김은주_꽃의 풍경_종이에 연필_129×152cm_2007_부분

수없이 겹치고 입혀진 검은 연필 선에 느껴지는 고집스런 형상은 억센 방언이거나 소금 내 찐한 바다 바람, 끊이지 않는 파도의 소리, 냄새, 형태를 닮았다. 이 닮음은 단순히 시각적인 형상의 닮음을 넘어선다. 거기엔 존재론적 물음이 닿아 있다. 2002년 문화일보갤러리와 2004년 인사아트센터에서 보여준 그의 20미터짜리 인물군상의 예를 들어 보자. 이 거대한 작품(필자는 그의 작품을 작품의 사전 단계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드로잉이라는 개념을 일부러 쓰지 않을 작정이다. 드로잉이라는 말은 작품의 밑그림이거나 초벌그림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은 순전히 연필이라는 재료로 이루어진다. 3미터 가까운 높이에 20미터 폭의 연필로 그린 이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검은 인물들의 몸부림에 압도된다. 구멍 난 네모 상자 안에 돼지를 키우면서 구멍으로 삐져나온 살만 잘라 먹었다는 동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작품은 현대인의 실존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김은주_무제_종이에 연필_260×1960cm_2004_부분_인사아트센터

두 발을 견고하게 딛고 선 인물들은 네모 진 프레임 안에서 갑갑하다. 인물 개개인은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다. 움직임이 거세된 구조는 분명 기계화되고 삭막한 삶의 메커니즘을 형상화 한 것이겠다. 2004년에 발표한 「바다」는 화면 가득 산처럼 골이 깊은 파도를 그린 대작이다. 역시 6미터 가깝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선(線)이 바다에서 나온 듯 하다고 말한다. 아버지를 따라 나선 바다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 죽음 이후 강렬해진다. "흐르는 결이 없이 휘몰아치는 바다의 바람, 엉키는 머리카락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상념까지도 끌고 가 버렸을 흔적들..."이 바다를 그린 선 안에 담겨 있다. 아버지요, 상념이요, 흔적인 바다는 검디검은 선의 더께로 팔랑거린다.

김은주_바다_종이에 연필_250×560cm_2004_부분

이렇듯 그의 작품은 단순히 시각적 광대함을 넘어 실존적, 존재론적 물음에 닿아 있다. 무채색으로서 검정이란 색채는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의 성격상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정서의 깊이를 더 한다. 그가 꽃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04년 가을부터다. 그리고 작년 문화일보갤러리에서『가만히 꽃을 그리다』(9월 19-10월 2일)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인 소재다. 톰바우, 파버카스텔 등 연필의 국적에 따라 혹은 제작연도의 차이와 보는 각도에 따라 검정의 베리에이션이 느껴진다. 그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로 꽃잎, 이파리, 화분을 보여주었다. 이번 벨벳 개인전에서 보여주는 작품은 이전 전시보다 여백이 강조되었다. 우선 이전 작품이 확대된 꽃잎, 가지런한 정물로 화면에 꽉 차게 구성된 것이었다면 이번 작품들은 여백으로 인해 꽃과 이파리가 풍경으로 확대된다. 이전 작품이 검은 정물인 반면 이번 작품은 검은 풍경의 한 부분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김은주_꽃의 풍경_종이에 연필_54×74cm2004
김은주_꽃의 풍경_종이에 연필_89×129cm_2007

풍경이게끔 하는 건 여백 효과 말고 원근법에도 있다. 전체적으로 종이 위에 앉혀진 꽃과 이파리들은 근경이라기보다는 멀찍하게 바라보거나 내려다본 시점을 취하고 있다. 원근의 효과는 그려진 꽃잎과 이파리의 크기에서 생기기도 하지만 무더기에서 떨어져 나가 나풀거리는 꽃잎과의 거리에서도 생긴다. 이러한 화면에 배치된 사물의 크기와 거리의 운율은 화면에 조용한 움직임을 보탠다. 크기는 공기를 머금고 거리는 바람을 품는다. 작품과 관객과의 거리에서 생기는 공기의 원근과 꽃 무더기에서 떨어져 나간 꽃잎과의 거리의 원근 사이에 이러한 활동성이 스민다. 화면 속에 미세한 미풍이 설핏설핏 비추는 효과는 덤이다. 찬찬히 보면 작품은 단순히 꽃이 아니다. 실제로 현실의 꽃이 저렇게 한 무더기로 필 수 없고 꽃을 저렇게 듬성듬성 떠받치는 이파리도 없다. 그래서 꽃과 이파리는 관념의 덩어리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무더기 꽃에서 떨어져 나간 꽃잎은 화면 밖 어딘가로 날아갈 태세다. 그럼으로써 여백은 더욱 커지고 우리의 생각의 언저리도 확대된다. 확장된 심상은 우리의 시선을 풍경에만 쏟게 하는 게 아니라 홀대 받던 여백의 어느 한 귀퉁이, 그리고 귀퉁이 너머까지도 염두 해 두게 한다.

김은주_꽃의 풍경_종이에 연필_129×152cm_2007

꽃은 역사적 아방가르디즘이나 개념주의의 사물성 속에 편입된 소재가 아니다. 그저 당연시 되는 생활세계의 지나치는 사건처럼 그렇게 부여되어왔고 작가들은 그렇게 그렸다. 이는 비단 꽃이라는 소재에 테 두른 얘기는 아니다. 회화가 호사가의 응접실에 걸리기 시작하면서 꽃은 세월, 덧없음, 젊음, 사랑, 우정, 희망이라는 수많은 상징을 잃어버린 게 사실이다. 그러나 김은주의 꽃은 여전히 이러한 언어를 잉태하고 있다. 작품이 힘이 있는 까닭이다. ■ 정형탁

Vol.20071010g | 김은주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