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형상과 조각적 원형

편승렬 조각展   2007_1010 ▶ 2007_1016

편승렬_Form_57900036_강철_305×70×60cm_2007

초대일시_2007_1010_수요일_05:00pm

갤러리 아트윌 서울 종로구 관훈동 55-1번지 3층 Tel. 02_722_0048

바람의 형상과 조각적 원형 - 편승렬의 철조각과 조형논리 ● 일견 편승렬의 조각은 물밑 조류에 흔들리는 수초를 닮았거나 꿈틀거리는 뱀을 연상케 한다. 어떤 작품은 거칠게 융기한 뿔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이제 막 대지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응결체 같다. 보기에 따라 이처럼 다양하게 보여 질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바람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 그는 어느 날 바람에 날리는 스카프를 본 적이 있다. 바람결을 따라 유영하듯 떠다니는 스카프는 유기체 형상을 만들며 날아갔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이 형상이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만들어 내는 유려한 형상의 변주는 조형의 유혹으로 다가왔던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매력적인 유혹일지라도 조각적 맥락으로 풀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스카프와 달리 편승렬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유기체를 유기적 형상과 동일시 할 수 없는 '딱딱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형상을 닮게 하는 것으로 완성될 수 없는 한계점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의 작품들이 바람의 형상을 수초, 뱀, 뿔, 응결체와 같은 형국으로 파생시키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곧 바람에서 시작된 의문의 꼬리가 조금씩 '조각적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편승렬_Form_338915_스테인리스 스틸_35×19×38cm_2007
편승렬_Form_651681_스테인리스 스틸_86×15×16cm_2007

조형화의 원리는 딱히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작가적 사유에 의해 모든 조형은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고, 골격의 호불호를 떠나 독자한 개성을 향해 나아가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최소한의 원리를 찾는다면, 편승렬의 경우, 그가 주목한 것이 단지 바람이 아니라 할 때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형상에 이르는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할 터이다. 즉 바람은 스카프를 통해 형상화 되고, 스카프의 형상은 다시 철조각의 형상으로 재현되며, 그 재현화의 과정에서 바람은 사라지고 물질의 조형이 탄생해나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의미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작가는 끝까지 바람의 형상이상의 의미를 찾지 않으려 한다.

편승렬_Form_2082151_스테인리스 스틸_28×20×115cm_2007
편승렬_Form_6498187_강철_179×68×48cm_2007

스카프를 닮은 수초는 스카프의 최초 원형과 많이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수초는 바람의 에너지와 같은 물의 에너지, 즉 에너지의 흐름이 만들어 내는 자연스런 형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스카프를 닮은 뱀은 짐짓 그것이 구부러진 막대기와 같을 지라도 불연속적인 시간의 양태를 나타내거나 유기적 관계를 드러내는 형상이 되고 있다. 신화에서 뱀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시간의 상징으로 곧잘 등장한다. 스카프를 닮은 뿔의 형상은 바람의 에너지를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형상성은 매우 모호하다. 이것이 뿔인지 아니면 융기한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뿔은 바람의 형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실체이지만, 작가의 의지가 그대로 투영된 것인지에 대한 모호함이 의미를 상실시키는 모순을 갖고 있다. 전시장에 가장 큰 규모로 등장할 대지의 응결체 형상은 바람에서 시작된 조형의 맥락이 빼어난 조형성을 획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렇듯 형상의 탄생은 의미제공의 원형성과 달리 전혀 다른 맥락으로 전이되며 확장될 수 있다.

편승렬_Form_7559323_강철_239×57×35cm_2007
편승렬_Form for a Memory_스테인리스 스틸_10×14×140cm_2006

편승렬의 작품들이 흥미있는 점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바람의 형상이 여러 형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며, 반면 그 자신의 미학적 통제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이것들의 의미가 부유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전은 여타의 전시와 달리 작가적 실체가 알몸으로 비춰지는 단두대와 같다. 그렇다면 사유의 유연성은 고도의 시적 응집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술이 인류의 역사에서 전위적 유전자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조각가로서의 열망이 좀 더 긴장되고 뾰족했으면 한다. 그리고 이미 그의 작품에 그런 실마리가 존재한다. 그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고 보듬고 살려내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 김종길

Vol.20071010f | 편승렬 조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