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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10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내적응시 (Soul Gazeing) ● 조각가 이준석은 슬럼핑기법을 이용해 유리조각을 만든다. 석고 틀을 만들고 몇 겹의 유리를 주저앉히는 기법으로 성형을 하는 그의 작업은 일반적인 조각적 프로세스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겉 형에서 원형의 형상을 찾는 과정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겉 형에 올린 유리를 녹이고 열을 삭히는 과정은 일주일의 시간을 요할 만큼 지난한 작업이다. 760도 정도에서 540도까지 급냉한 후 아주 서서히 느린 시간을 유지하며 온도를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유리가 액체에서 다시 고체로 돌아왔을 때의 표면은 매우 섬세해서 원형의 느낌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다. 작은 흠이나 상처까지도 살려내는 이 작업의 묘미는 재료가 유리라는데 있다.
유리의 상징은 투명성에 있다. 곧잘 창(窓)에 비유되는 유리는 겉과 속을 투영시키는 신비한 재질이다. 반면, 유리는 거울과 같은 반사경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거울은 주지하듯 모든 것을 내면화하고 동시에 타자화하는 이중적 구조를 지녔다. 단지 그것이 되비춘다는 '반사'의 직설적 표현이라면 의미의 발생은 사라질 터이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고래(古來)의 학예적 정화(精華)를 상징했다. 유희의 명수가 되는 일은 데미안과 싯다르타, 나르치스에 편재되는 것이다. '나'의 껍질과 속이 투명하게 변해 유리알 유희와 하나 되는 것, 바로 그 곳에 정신의 정화가 존재한다. 이렇듯 유리를 사유하는 것은 물질의 이면에 자리한 은유적 실체와 만나는 것인지 모른다. 이준석은 자신의 작품을 '내적 응시'라 표현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작품해제의 열쇠가 될 듯 하다. 첫째는 앞서 살핀 것처럼 유리 자체의 의미에서 시작된다. 그의 작품들은 유리의 겹에 의해 서로를 응결하면서 맞붙어 있다. 그 사이에 안료를 넣어 다양한 색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원 재질의 2차 가공에 의한 작품의 탄생은 그 자체로 '응시의 언어'를 함축하고 있다. 그는 특히 유리와 색의 혼융에 의한 물성의 조화에 집중한다. 어떤 형상으로의 전이 이전에 그가 원하는 물성의 특이성이 요구되고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작가와 물질 사이의 '응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칫 시간의 조절을 상실하게 되면 둘의 응시는 파국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조각의 전통적 재료인 철을 다루다가 유리로 돌아 선 데에는 이와 같은 유리의 극단적 속성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즉, 깨지기 쉽고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그 과정을 견딘 후의 결정체는 무엇보다 아름답다.
둘째, 그의 작품들은 모두 쌍을 이루고 있다.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한 한 쌍은 아니나 비슷한 형상이 서로 맞붙어 있는 형국이다. 일란성이라 할지라도 개성의 면모가 확연히 구별되듯이 그의 형상들도 결코 다르지 않은 두 개의 형상으로 서로를 응시한다. 그는 이에 대해 '갈등'과 '대립' '이해'의 메타포를 설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들에서 갈등과 대립과 이해 이전에 한 형상이 한 형상을 마주하고 있다는 지극히 동양적인 사유에 직면한다. 이것저것, 들숨날숨, 음양 혹은 태극처럼 '둘'은 구분되지 않은 하나다. '이것'만 있을 수 없고 '날숨'만으론 살 수 없다. 두 개의 실존과 기운은 언제나 맞선 상태에서 동일한 에너지를 요구받는다. 이것은 균형이며 질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빼어난 색의 피부를 지닌 두 개의 유리가 균형을 이루며 자라고 있는 어떤 성장의 에너지를 먼저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유기체적 형상이 지닌 유연함의 시각적 환상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작품들은 모두 곡선의 묘미를 감추고 있을 만큼 드러나지 않은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내적 응시'는 '자아' '성찰' '분열' '관점'과 같은 의미언어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 '자아'와의 상관성의 매우 직접적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경우에도 내적 응시는 자아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체를 바라보는 관점(perspective)을 도출하는 심리적이며, 철학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니체의 관점주의를 통해 본 G. 데 키리코의 多 시점 원근법 연구」(성신여대. 박사. 2005)에 따르면, 니체의 관점주의를 통해 데 키리코의 다 시점 원근법을 재해석한 결과 그것이 각각의 관점을 갖는 다수의 원근법이라는 의미와 다수의 원근법을 통일시키는 것은 '힘에의 의지'로서의 주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 때, 주체는 보고 보여 지는 주체이며, 그런 주체가 갖는 응시는 내적 응식 즉 초-물질적인(meta-physical)응시가 된다고 한다. 미술사에서 미술의 시점을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의 해석과 이해는 단지 작품에 한정하지 않고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 주체를 대상으로 한다. 이준석의 '내적 응시'를 맞붙은 쌍이 서로를 바라본다는 일차적 시각언어가 아닌 주체의 언어로 환원시킬 때 이 유리작품들은 비로소 제 언어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럼에도 아직 형상의 언어를 구축하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그것이 유기체라 할지라도 원형상에 대한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태반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인체를 활용한 유기적 형상 작업은 그것이 지닌 리얼리티를 제하더라도 물성의 독특함과 색, 빛의 투영방식으로 새로운 조형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철과 유리의 만남이라는 이질적 재료의 혼성도 색다른 조형미를 발산한다. 나는 오히려 주제의 무게를 조금은 덜고 이러한 형상언어의 직접적인 '느낌의 체계'를 보다 심도 있게 밀고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김종길
Vol.20071010c | 이준석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