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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10_수요일_06:00pm
학고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39_4937 www.hakgojae.com
화려한 풍경 속에서 길 찾기 ● 양혜숙의 그림은 풍경(風景)을 다룬다. 2001년 '대지(大地)의 풍경'에 이어 2002년 '시간(時間)의 풍경', 2004년에는 산-들-풀-꽃을 뒤섞어놓은 듯한 무의식적 풍경의 '작은 꽃씨', 그리고 이번에 전시하는 '화려한 풍경'을 그려왔다. 전체적으로는 풍경을 다루고 있지만, 2005년부터 작업한 '화려한 풍경'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2005년을 기준으로 양혜숙의 풍경 그림은 수묵과 채색, (반)추상과 구상, 비현실과 현실, 내면의 풍경과 일상의 풍경, 모호함과 명확함,... 등으로 양분화되는 특성을 드러낸다. 2005년 이전의 작업들은 동시대 현대미술의 맥락과 어긋나 있는 동양화의 형식적 틀 속에 갇혀 자신이 처한 삶과 현실의 치열한 반성과 모색을 하지 못한 채 '동양적 사유'라는 막연한 동경과 형식에 사로잡힌 결과에 불과했고, 자연을 빗대어 혼자만 취하고 해독 가능한, (실제적)풍경 아닌 풍경을 그려왔었다. 하지만 '화려한 풍경'은 현실에 주안점을 둔다. 그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인생과 세상의 이치에 대해 전에 몰랐던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순간, 자신(자아)과 '가정-일상-사회'의 관계 속(일종의 구속)에서 스스로 통제하기 힘든 복잡한 갈등구조 속에 빠지게 되고, 여기서 자신의 본능(제도에 전혀 길들이지 않은 인간 본능의 원초적이고 처녀성이 깃든 자아)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본능은 사회적 구속을 일탈하기 위한 제스처로 자기 집을 포위하고 있는, 집 주변의 거리 풍경을 자기만의 시선과 관점의 이미지로 표출된다.
화려한 욕망에 질주하는 빨강 자동차와 그로인해 겪는 허탈함과 외로움의 전기줄, 제자리에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처절한 (망각의)나무와 버려진 담요, 닫혀 진 마음의 창이자 출구인 '문'(창문, 대문) ..., 이렇게 상처받은 온갖 상념들이 결국 위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공허한 '빈 터' 등 길 위에서 (어떤 사연이나 연유로 빚어진 행위에 의해서)벌어지거나 놓여 진 상황과 현상들을 자신의 처지로 전환시켜 '어떤 풍경'으로 은유시킨다.
이런 점에서 전시제목의 수식어인 '화려한'은 '어떤 풍경'에서 반어적 개념으로 구사되며, 동시에 내러티브를 동반한 서사적 스토리를 전개하는 언어적 장치로 기능한다. 풍경의 대상은 거기 그대로 존재하며, 작가의 축적된 인식의 창에 의해 그려지는(옮겨지는) 순간 대상과 분리되어 화면에 그 잔영이 기록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기억과 감성이 오버랩 되면서 수많은 영상들이 스쳐지나갔을 상황을 상상해본다. 순간 예측되는 것은 그의 어릴 적 환상과 작가로서의(아니면 또 다른 이상의) 꿈을 키우기 위한 몸부림이 스스로 조율하기 힘든 사회?권력적 통념에 부딪혀 전혀 예상치 못한 감성기류로 흘렀고, 그 감성은 은둔적이고 반항적인 태도로 돌변해,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온갖 자연과 사물들에 정신적 고통의 응어리들을 풀어헤치거나 안식처로 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또한 화려함을 좋아하고 즐기는 그의 본성(감성)은 현대문명이 초래한 소비문화의 구조 속에서 갈등과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진실의 행방을 좇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그래서 그가 살고 있는 주변 풍경들은 하나의 영화장면처럼 양혜숙의 연출에 의해 일상적 풍경에서 힘겨운 서사적 풍경으로, 욕망이 가득 찬 풍경으로, 무섭고 스산한 풍경으로, 외롭고 쓸쓸하고 적막한 풍경으로, 화려함을 치장한 고독의 응시자처럼 탈바꿈된다. 과연 그는 이 화려한 유혹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까?
'화려한 풍경'은 前의 수묵작업들에 비해 색채가 화려해졌지만, 그 속의 짙은 어두움은 침잠된 묵시적 풍경을 담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기도 하지만, 답답하고 지친 삶의 넋두리처럼 선들은 지글거리며, 스산하고, 병들고, 꺼림칙해 보이듯 모든 풍경이 온전치 않다. 땅과 벽은 갈라지고 나무는 처절하고 하늘은 뻘겋거나 흐리고 냉랭하다. 풍경이 미쳤다. 이렇듯 혼자만의 '앓음'을 은폐시킨 채 '화려함'으로 치장하려한다. 은폐를 가장한 화려함은 누군가에게 속절없이 하소연을 하기위한 목적성이 담긴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목적을 찾는 출구는 '화려한 풍경' 속에서는 없다. 여기서 필자는 '화려한 풍경'의 출발점인 '집'이라는 작업을 떠올린다. 출입구가 없는, 집의 기능을 상실한 집을 그렸다. 숲과 흙더미로 에워싼 집 주변은 마치 이글거리는 화염산(火焰山) 같다. 화염 속에 휩싸여 있는 그 집은 세상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가정으로부터 고립된 자기 암시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억압된 자신의 존재는 주저앉기 보다는 숨구멍(조그마한 창)을 만들어놓고 일탈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로부터 그는 길 찾기를 시작한다. (중략) ■ 이관훈
Vol.20071009b | 양혜숙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