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시공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박헌열 조각展   2007_1003 ▶ 2007_1009

박헌열_색시공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706_브론즈_40×50×14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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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03_수요일_06:00pm

전시기획_샘 갤러리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www.noamgallery.com

신체를 통한 심미적 감성화의 궤적들 ● 1. 감성의 상승적 이행을 향하여 ● 2006년 '나무와 천사' 시리즈로 열 번째 개인전을 가졌던 조각가, 박헌열이 일년 반 만에 다시 열 한 번째 개인전을 마련하였다. 추상조각인 '나무' 시리즈로 이루어진 2003년의 아홉 번째 개인전을 고려한다면, 2006년 '나무와 천사' 시리즈의 양식적 변화는 작가의 내재적인 진화원칙을 보여 주었다기 보다는 외연적 차별성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2007년 가을에 보여주는 작업들은 앞선 작업들과의 다변(多變)의 연쇄고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앞 선 작업과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통해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변화의 의미를 폭넓게 살펴볼 수 있다. ● 2003년 '나무'시리즈들에서 작가는 나무의 신비로운 생명의 힘에 기댄 정신적이거나 내적인 방식이 아니라, 형식적 관계들의 필연성이나 일치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무에 생명과 생기를 부여하였다. 대리석의 조각 재료는 나무와 잎의 물리적이고 구조적인 특징을 개념화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나무' 시리즈 작품들은 작가의 임의성이나 의도된 불일치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대부분의 작업은 변함없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나무의 특징들을 추상한 기하학적 구성원리에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 따라서 나무들은 작가의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체험이나 경험의 묘사라기보다는 작가가 표현하는 의미가 관람자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계획된 전형(典型)과 기호(記號)라고 하겠다.

박헌열_색시공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709_브론즈_30×38×148cm_2007

추상조각 '나무'시리즈 이후 3년 뒤에 보여준 2006년 구상조각, '나무와 천사' 시리즈들은 실제 공간으로부터 분리된 은유적 공간에 놓여있다. 이 은유적 공간에는 서로 구별되는 육체적 시간과 의식적 시간이 함께 흐르는데, 감각할 수 있으며 물질적인 육체의 시간은 의식의 시간에 의해 끊임없이 지워진다. 의식의 시간은 육체의 시간을 지워서야 비로서 자유로운 추상공간을 구축한다. 이 시리즈에서 인간의 육체로 묘사되는 천사들은 존재를 인식하는 주체가 아니다. 천사들은 조각적 환영을 빌어 형태나 재료와 같은 외재적인 것들을 비가시적이거나 비물질적인 세계로 전환시키는 매개체일 뿐이다. 욕망과 고통을 느끼는 육체는 은유적 공간 속에서 욕망과 고통에 결코 침해될 수 없는 영혼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나무와 천사' 시리즈에서는 실제와 가상, 현실과 초현실이 시루떡처럼 겹쳐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 뒤처럼 이 쪽의 보이거나 만져지는 천사는 저 쪽의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세계, 이 쪽 너머를 가리킨다. 현실의 틈새에서 가상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영역에서 현실을 회수함으로써 가상의 영역을 수락하고자 한다. 천사는 전신(轉身)과 변신(變身)이 자유롭다. 팔 대신 날개가, 손 대신 잎사귀가 자리잡고, 봉긋한 젖가슴은 몸 앞 뿐만 아니라 옆과 뒤에도 봉긋하게 솟아있으며, 몸 속 자궁은 몸 밖으로 열린 아기 넣는 주머니가 되고, 등 뒤에 날개를 달고, 하나의 몸에 여러 상반신들이 붙어 있거나, 곤충의 촉수처럼 머리에 날개를 달고서, 무거운 머리를 몸 항아리 속에 눌러 담거나, 늘어진 몸을 감아 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시간에서의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과장된 변화는 의식의 표현 대상일 뿐이어서, 우리의 감각적 능력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의식의 특출한 영역과 능력을 뚜렷하게 확인시켜준다. '나무와 천사' 시리즈들은 중첩되고 과장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지만, 이 감각은 고통이나 위험과 같은 실제의 감각을 수반하지는 않으면서 부드러운 정서적 반응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맞이하는 순화된 미적 경험은 예술작품이라는 특별한 영역에 대한 의미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 2003년 '나무'시리즈 작업과 2006년 '나무와 천사' 시리즈 작업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분명히 구별되지만, 일상을 배제하면서 정화(淨化)의 예식을 통하여 이상(理想)의 열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동일한 시각을 보여준다. '나무'시리즈가 과학성의 속성으로 간주되는 진지함 속에 머물러 있는 반면, '나무와 천사' 시리즈는 유머와 아이러니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두 시리즈 모두 감성적인 것을 정제함으로써 숭고나 영묘한 것의 관계에 이르고 있다. '나무'시리즈에서 작가는 감성적인 요소들을 축소하고 생략함으로써 감성적 실재로부터 거리두기를 시도했다면, '나무와 천사' 시리즈에서는 감성적 부분의 차원 상승을 통해 조화와 일치의 전일적 감성으로의 이행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시리즈 작업들을 멈추어 천천히 들여다보면, 박헌열의 작업에서는 표현요소들의 의미론적 관계가 매우 중요시되고 있고, 심미적 감성의 상승적 이행이 실재 경험의 제거를 통해 일관되게 시도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박헌열_색시공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705_브론즈_40×60×140cm_2007

2. 표현적 환원주의를 넘어 ● 1985년 이탈리아에서 가진 첫 개인전에서 충격과 전율, 모욕과 불안을 통해 현실의 복잡성이나 문제점들을 표현하던 조각가 박헌열과 근래 심미화의 표현에 몰입해있는 박헌열의 사이에는 일종의 단절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2007년 가을에 보여주는 작업들은 오랜 단절의 시간 간격을 좁히고 있다. 앞 선 두 전시를 통해 박현열의 작업들이 다양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심미적 감성의 강화에 관심을 쏟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심미화의 과정에서는 즐거움이나 감정과 관계를 맺는 감각적인 요소들과 인식적이고 대상과 관계를 맺는 지각적인 요소들이 상호작용한다. 감각적인 요소들이 매우 주관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면 지각적인 요소들은 객관적인 범위에서 형성된다. 그런데 감각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해서 모두 심미적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즉 일상의 하찮음 속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감각이나 자연의 시간 혹은 합리성의 시간에 따르는 감각 등을 심미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비일상적인 즐거움이나, 익숙함에 숨겨진 낯설음을 일깨우거나,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측면을 향하게 하는 감각을 심미적이라고 표현한다. 심미적인 즐거움은 사물 자체에서 보다는 사물의 배치에서 비롯된다(육중한 바위 자체가 아니라 그 육중한 바위가 산 정상에 기울어진 채 있을 때, 귀한 과일 자체가 아니라 그 귀한 과일이 보기 좋게 담겨있을 때가 그런 경우이다). 그래서 심미화는 작품 자체보다 작업의 제과정과 관계하고, 작품의 내용보다는 작품의 형식과 관계한다. 심미화는 복합적인 감각을 요구한다. 심미적 감성에서는 지각적인 요소들도 감각적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일상적 방식의 지각을 두고 심미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특수한 측면과 대상을 향한 특별하고 예리한 지각을 떠올리면서야 심미적으로 지각한다고 이야기하게 된다. 지각적인 요소들이 객관적인 범위에서 형성된다고 하더라도, 지각은 지각적 요소들 자체의 객관성보다는 지각적 요소들을 결합과 대비, 조화와 상응, 대립과 유사 등의 관계와 연관지을 때 비로서 심미적이 된다. 즉 사물을 직접적으로 만날 때 보다는 거리를 취하고 대상을 관조적으로 향유할 때 심미적 지각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심미화는 감각적인 요소인 주관적인 감정을 개별의 범위를 넘어 보편적인 감정으로 상승·확대시키고, 지각적 요소인 객관적인 인식을 추상적인 차원으로부터 구체적인 인식으로 내화·심화시킨다. 작가나 관람자의 심미화 과정에서 직관력, 상상력, 조합능력의 중요성과 아울러 폭넓고 개방적인 소통통로의 여부를 문제시 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헌열_색시공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708_브론즈_60×58×155cm_2007

박헌열의 작업은 매우 강렬한 심미적 태도의 지향성을 영속적 논리에 속하는 형태ㅡ선험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개념이기도 하다ㅡ에 의존하여 드러내왔는데, 이 형태는 세부의 형태들을 보다 포괄적인 형태로 결합시키는 형태로서 통일적 효과를 제공하였다. 여기에서 관람자는 감성적인 반성이나 상이한 지각형식을 찾기 위한 긴장을 요청받기 보다는 작품 안에 형성된 코드들을 확인하거나 수동적으로 바라보기를 요구받는다. 자칫 관람자들은 심미적 관조의 일방적인 태도로 기울어질 수 있고, 형식 분석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번 열한 번째 전시에서는 근래 전시에서와는 달리 관람자의 능동적인 해석, 개입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는 위험성이 많이 제거되면서, 심미적 감성의 고양이 이루어지고 있다. ● 작가 박헌열은 초기 전시들(특히 이탈리아 전시에서 보여준 작품들)에서 경험의 순간을 통해 시간 속에서 심미성을 창출하거나 심미의 실존물로서 작품을 제시하여왔다. 조각 그 자체가 그것을 만든 작가의 신체와 동일시되고, 작가의 심리적 내면과 조각의 내적 공간이 동일시되어 양감이나 닫힌 입체감이 전해주는 조각적 이미지는 현존감과 밀도를 지닐 수 있었다. 그리고 관람자들은 초현실적인 시간성을 따라 해부학적 입체를 재구성하면서 작품의 추상적 의미를 파악하도록 유도되었다. 명사형(名辭形)이라기 보다는 동사형(動辭形)으로서, 일시적이거나 현재적인 것에 전념하는 이러한 작품들이 이번 전시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 초기 작품들에 비하여 선적이고 가냘픈 신체들 때문에, 그리고 이상화되고 표준화된 익숙한 신체의 유형 때문에, 물성은 약해지고 상황의 중요성이 감소된 듯 보이지만 근래의 아홉 번째, 열 번째 전시와 비교하면 물성은 강해지고 상황의 의존도가 높아졌다. 다시 말해 작품의 구조를 좀 더 큰 구조 속에 위치시키려는 경향 때문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알레고리적 또는 수사학적 표현에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한 몸에 세 머리를 가진 신체, 신체의 앞 뒤가 하나로 이어지는 대신 한 쪽 방향으로만 향한 신체가 앞뒤로 동거 중인 신체, 보이지 않는 심리적 무게를 압력의 물리적 작용으로 보이게 한 신체 등은 작가가 지각 불가능하게 된 것, 제외된 것, 벗어난 것들, 즉 역사적으로 의미가 해독되지 않은 것들, 과거에 원천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미지 창출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이 가시성과 투명성, 표현의 장(場)일 뿐만 아니라, 비가시성과 불투명성, 침묵의 장으로도 작동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번 전시가 이전 전시에서 보여주었던 알레고리적 또는 상징적 표현 방식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일부 작품들은 표현요소들의 의미론적 관계가 단일하거나 연속적이지 않고 다양한 갈래와 불연속성, 애매함을 허용한다는데 있다. 박헌열의 작업에서 상징은 대부분 각 표현요소가 하나의 전체의 일부로서 정신적인 전체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전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작가는 일반적인 진리가 표현될 수 있을 가능성을 전제로 상징을 구축하였고, 이 상징은 미적 직관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본질에 반응하지 않는 표현요소, 연결의 원리가 부재한 표현과 의미 사이의 벌어짐이 흥미롭게 포진하고 있다. 관람자들은 이러한 벌어짐, 어긋남을 통해 단지 심미적 관조에 머물지 않고 작품과 역동적으로 관계하면서 다양한 의미들을 산출시킨다. 지속적인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개방된 구조야말로 박헌열의 작품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즐거움이다. ● 신체가 영혼의 것이기 때문에, 물질적 신체가 정신적 영혼의 표현의 장이기 때문에, 인체가 영혼의 의미로 간주되도록 인체를 관조의 대상으로 전시하는 것, 즉 외적 표현을 내적 본질로 환원시키는 것은 감수성의 자유로운 고양이나 지평의 확대에 진정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순수한 형식주의 관점에서 보면 조각작품은 자신의 본질적인 핵심을 고유하고, 절대적이며 근본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그 자체 안에 안전하게 묻어둔 채 자신 속에 안전하게 머문다. 그래서 순수 형식에의 몰입은 자기도취적이다. 실제를 배제한 채 형식적 몰입을 통한 폐쇄적 열정, 추상적 순수성을 고집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분리적이며 허구적인 자아는 예술을 신화화하고 예술적 가치를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 조각의 관례, 조각의 규범이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작가 박헌열에게서 형식주의 관점이나 외적 표현을 내적 본질로 환원시키는 표현적 환원주의, 표현적 인과관계의 흔적을 읽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딜레마처럼 여겨질 수 있는 작가의 시도, 즉 익숙한 형식과 형태의 선택을 확대함으로써 고유한 창조적 가능성의 한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위협적인 시도가 빛을 발하는지도 모르겠다. 박헌열의 열한 번째 전시는 작가의 이완을 향한 강한 집중, 또는 심미적 감성화를 통하여 삶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창작열정이 미적 실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동력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 임정희

Vol.20071003f | 박헌열 조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