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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003_수요일_06:00pm_갤러리 눈 인사동점
수원시미술전시관 / 2007_0918 ▶ 2007_0924 경기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409-2번지 만석공원 내 Tel. 031_228_3647 www.suwonartgallery.com
갤러리 눈/ 2007_1003 ▶ 2007_1009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7번지 미림미술재료백화점 2층 Tel. 02_747_7277 www.110011.co.kr
지독한 리얼리티의 인물들 - 이윤기, 목리에서 마주친 얼굴 ● 목리, 막차를 탔다 ●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목리. 동탄 신도시 편입지구로 사라질 마을 중의 하나다. 목리는 전통 있는 마을의 역사를 가졌거나 전답 부자들의 유세가 대대로 계급을 형성했던 중세사를 가지지도 못한 근대적 마을의 빈곤한 풍경에 자리한다. 수원이나 화성의 개발권에서 밀린 영세농이거나 자활노동을 해야 할 만큼 자본주의 생활장의 경계에 위치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단 얘기가 되는데, 사실, 필자가 처음 마주하게 된 2003년의 가을 풍경은 시대의 빛깔이 누렇게 쌓인 1970년대와 다를 바 없었다. 토착민의 선행적 점유 권력이나 기득권을 찾는 것도 말뿐이어서 그 이후로 빠르게 늘어가는 조립식 공장건물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 같다. 지금, 목리 풍경은 신도시에 눈 먼 부르주아 자본가의 땅 투기로 인해 여기저기 벌건 속살을 드러낸 채 수몰 지구화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조그만 마을도 이제 아파트 밑창에 잠길 테니까. ● 화가 이윤기가 목리에 찾아든 것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원에서 활동하던 몇몇 작가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되면서 그도 이사를 오게 되었다. 수원대 이재복 교수가 후배와 제자들에게 땅을 내어준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작업에 대한 열의가 한창이던 20대 후반~30대 중반의 청년작가들은 시내에서 멀지 않으면서 산들에 묻힐 수 있다는 이곳이 맘에 들었다. 맏형 노릇을 했던 판화가 이윤엽은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해 상주했고, 조각가 천성명, 임승천, 화성공장 공장장 이근세는 거의 매일 출퇴근을 했다. 경기문화재단에 재직 중인 최춘일이 이들의 열정에 공감하고 동참한 것은 이 때의 따뜻한 풍경이었다. 2002년과 2003년의 목리는 아직 시대의 길목에 나서지 못한 뒷방 할 아씨처럼 고즈넉했다. 그러나 1년이 무섭게 상황은 반전되었다. 동탄 신도시가 마무리될 무렵, 목리는 공장으로 채워졌다. 국도 주변은 부동산이 도열했고, 땅값은 천정부지로 날뛰었다. 그러니, 이문구의 『우리 동네』가 떠오른 건 자연스런 일이었는지 모른다. ●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이문구의 『우리 동네』연작에서 오늘의 농촌이 엄청난 외적 세력의 중압과 내적 분열 속에 자체 붕괴에 직면해 있음을 살핀다. 그러면서 농촌이 어떻게 이러한 파괴적인 세력과 중압으로부터 풀려나 보다 사람다운 공동체로 갱생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그는 이문구의 소설이, 그 갱생의 변증법을 모색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그것을 가장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일들에서 또 추상적인 집단적 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자각한 구체적인 인간들의 필요에서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고 평하고 있다. 이문구의 소설이 화성시 발안에서 탄생되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다. 2005년인가, 경기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기전문화예술』은 이곳 시인 이덕규와 함께 소설의 발원지를 찾아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이문구가 살면서 그려낸 그 마을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시간의 소멸이 도대체 얼마나 길었기에 흔적조차 없었던 것일까. 천년의 세월도 아니고 단지 이십 수년이 흘렀을 뿐인데 말이다.
"우렁닥지만한 동네서 자고 나면 마주볼 얼굴끼리 그럴 수는 없을 일이었으나 두고두고 쌓인 감정을 가량하면 그것도 되레 양에 덜 차는 것이었다. 언제고 한 번은 되게 훌닦아 주리라고 별러온 것은 비단 이장을 비롯한 몇 사람만의 심정이 아니었을 터이다. 팬츠를 게다 재걸고 전시하는 지 열흘이 넘어도 아직 말둑을 뽑거나 황의 집에 걷어다 준 이가 없음만 보아도 능히 대중할 일이던 것이다." -「우리동네 황씨」중에서 ● 우렁닥지만한 이곳 목리도 이제 막차를 탔다. 최춘일과 이윤엽은 원상복귀와 새 터를 만들었고, 화성공장은 이윤기의 작업실에 동거중이다. 작업실을 제대로 짓겠다던 이들의 꿈은 조립식 가건물로 이뤄졌으나 멀지 않아 다른 곳으로 흩어져야만 한다. 목리는 이들의 고락을 기억으로 묻어둔 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버티는 중이다.
이윤기, 말의 씨알을 삼키다 ●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은 어쩔 수 없이 한 밤이 되곤 했다. 직장이 우선하기에, 출장을 휘둘러 일을 마감한 후 동탄으로 핸들을 돌리면, 밤 9시가 훌쩍 넘곤 했던 것이다. 그와 만나는 일은 대부분 그랬다. 어느 때는 가족 나들이로 목리행을 하지만, 이때 대화를 한다는 것은 그저 사소한 요구와 안부를 묻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5년 가까이 그의 작업을 지켜보았으니 딱히 뭔가를 따져 묻는 인터뷰도 썩 훌륭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의 담화가 싱겁게 끝났던 것은 그런 이유일 터이다. ● 전시를 앞두고 다시 인터뷰를 시도한 것은 최근 그의 작품이 '신명'의 활기를 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인물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 그는 아이들의 표정에 빠져들고 있었다. 우린 거기서 다시 시작했다. 9월 5일 수요일, 밤 10시가 다 된 시각, 목리 작업실에서. ● "그랬죠. 그때는 얘들 표정을 보는 것이 좋았어요. 하지만, 내가 그린 아이들은 다른 얘들하곤 달라요. 어딘가 그늘 진 표정을 가지고 있어요. 시골 아이들은 상처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 "한 얘가 어느 날 머리를 자르고 왔어요. 발랄하던 얜데, 싹 뚝 잘린 머리가 얼굴을 더 환하게 하지 않고 무겁게 하는 것 같았어요. 그 얘의 표정이 인상에 착 달라붙는 거 에요. 그래서 자르기 전과 후를 그렸죠." ● 그는 여러 아이들의 표정을 화면에 새겼다. 그 아이들은 때로 낯설고 슬프지만, 상실의 표정은 결코 아니다. 또한 그가 그린 아이들은 한 화면에서 두 개의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한다. 아이들의 내면에 자리한 희망의 근거를 들춰내거나 아픈 곳에 씨알을 묻어 생명을 싹틔워내는 방식이다. 몇 년 째 방과 후 미술교사로 참여하고 있는 학교에서, 그리고 목리에서 만난 아이들이 이 화면의 주인공들이다. ● "대추분교 유리창에 어르신들의 초상을 그렸잖아요. 또 벽화도 그리고. 그때부터 무엇을 그릴 것인가 하는 고민이 시작된 것 같아요. 뭔가를 주워오는 것을 좋아하는데, 대추리엔 고물들이 많이 있었죠. 고물들도 사연이 다 있어요. 누구를 만날 때의 느낌, 뭐 그런 것이랄까. 그래서 주어 온 오브제에 인물들을 그려봤죠." ● "우리 엄마가 많이 아팠어요. 엄마는 화분을 좋아해요. 어느 날 깨진 항아리가 보였어요. 항아리가 깨지면 화초를 가꿀 수 없잖아요. 그래서 깨진 항아리를 가져와 거기에 엄마를 그렸어요. 몇 년간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리기도 했지만 여자를 그린 건 엄마가 처음이에요." ● "저 맥주병은 훌랄라 호프집에서 파는 맥주에요. 친한 벗이 있는데 선생이죠. 이 친구 참 바른 친군데, 술만 먹었다하면 후련하게 속을 털어 놓는 거 에요. 그래 저 친구를 그리자. 저 맥주병만 보면, 그 친구 얼굴을 보채는 것 같지 뭐예요." ● "겨울에 연탄을 떼요. 작년 겨울에 내가 연탄 나르는 것을 승천씨가 봤어요. 집게로 아슬아슬하게 나르는 게 좀 그랬나 봐요. 승천씨가 연탄 통을 사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연탄 통을 보니 '임승천 2호'가 떠오르지 뭐 에요. 왜 승천씨가 배를 만들잖아요. 1호, 3호는 있는데 2호가 없어요. 그래서 연탄 통에 승천씨 얼굴을 그렸어요." ● 그는 쉴 새 없이 작품의 뒷담화를 풀어냈다. 그의 작품 중에 일부는 이렇듯 오브제에 그려진 초상들이다. 오브제는 모두 어떤 대상들과 인연의 고리를 매개하고 있다. 처음에 정처 없이 굴러들어 온 것들이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은 자신의 작업실을 중심으로 거미 망처럼 얽힌 사연의 매개물인 것이다. 인물과 오브제의 결합은 마치 전신사조의 미학처럼 사실화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정신을 포착하려 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는 오브제가 끌어당기는 시각적 환상이 강하게 근접해 올 때 드로잉을 시작한다. 때론 갑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하고, 생각이 쌓여서 형상화되기도 한다. 맥주병(PT), 화병, 깔깔이(군용), 연탄 통, 부서진 여행가방, 양수기 호수, 버려진 축구공, 개울가 막돌, 판화 프레스기, 커피 병, 용접 마스크, 골드 커피 겉봉지, 약봉지, 나무 도마, 볼록반사경(도로안전반사경)처럼 오브제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깔깔이는 목리 풍경을 그려진 「목리도」로 돌변했고, 양수기 호수는 멋진 가방이 되었다. 버려진 축구공엔 별을 그리고, 막돌엔 아이디가 '찬타'인 여성의 얼굴을 그렸다. 하얀 소복을 입은 그녀의 표정은 읽기 어렵다. 돌에 묻힌 슬픔을 꺼내 보기가 조심스럽다. 우린 그의 슬픔에서 개울가 물소리를 들을 뿐이다. 그의 부서진 여행가방은 요셉보이스의 여행가방보다 더욱 진한 리얼리티를 가졌다. ● 민음사가 다시 '오늘의 작가 총서'를 펴내며 『우리 동네』에 대해 해방이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거칠게 진행해 온 우리네 삶의 속살이 담겨 있고, 거기서 놓쳐버린 진정한 삶의 모습이 목마름으로 나아 있는 소설이라며, 시대의 거울이 아닐 수 없다고 찬한 것을 기억한다면, 우린 이윤기의 '부서진 여행가방'에서 발견하는 숱한 물건들이 바로 이문구의 '김씨' '황씨'와 다를 바 없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의 가방에는 목리를 거쳐 간 사람들의 목마름이 있다. 그 숨결이 있다.
생활미술의 미학 ● 이윤기는 자신의 생활을 그리기라는 미술형식을 차용해 미학화한다. 그에게 미술은 일기의 한 형식이자 영적 담화를 응집하는 묘판이다. 그래서 그의 미술은 농사월령의 시간처럼 사계의 순간들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좀 더 더하고, 빼고 하는 것 없이 묵묵히 제 시간을 쌓아가고 있단 얘기다. 작업실에 흐드러진 얼굴 꽃을 보는 일은 풍작의 들녘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형식이 완결성 없이 부유할 수 있다는 점도 발견한다. 인물의 세부묘사가 거칠고, 화면의 여백이 뚜렷한 의지를 갖지 않아 정신의 근거를 약화시키는 면이 없지 않고, 오브제가 지닌 본래적 성질과 상징을 인물과 결합하는 것도 덜 섬세하다. 전통 인물화가 세필을 이용해 품격의 방향을 잡아낸 뒤 일종의 '품평회'를 거쳐야 본 작업에 시작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대상이 되는 인물과 한달 여를 동거하며 전체로서의 상을 되새김했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 사실주의와 현실주의의 리얼리티는 '닮음'의 오차가 아닌 '닮음'의 영성에서 오는 것이다. ● 그럼에도 이윤기의 시작은 들국화처럼 꼿꼿하다. 그의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가능성의 파동 안쪽에 있게 한다. 그리기에 대한 집요한 시선, 색의 차이와 언어를 달굼 질해 나가는 행보는 그에 대한 희망이다. 생활미술의 힘은 '생활'에서 온다. 일상이라거나 날들이라거나 하는 반복적인 '날(日)'의 연속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기록하는 것을 생활미술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기억이며, 현실이며, 시대다. 생활미술은 현실언어에서 지독한 리얼리티가 발생한다. 이윤기의 희망은 그 지독함이 이제 막 꽃망울을 가졌단 사실에서 시작된다. ■ 김종길
Vol.20070924b | 이윤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