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장선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07_0912_수요일_06:00pm
덕원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www.dukwongallery.com
백설공주의 분홍가시 / 공포를 통한 공포의 극복 ● 회화, 렌티큘러, 오브제 등 여러 매체가 동원된 이번 전시의 중심 모티브는 가시이다. 가시는 식물의 표피가 변형된 것으로, 예민한 형태에 공격적인 면모를 가진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방어의 산물이기도 하다. 장선아는 이러한 가시의 이중성을 주목한다. 달콤한 아름다움이 위협으로, 부서질 듯 한 연약함이 위험으로 전치되는 가시는 여성성에 대한 감성을 압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작가의 자전적인 자의식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여러 방식으로 변주되는 전시장 안의 가시돋힌 사물들을 심리극의 배우들로 변형시킨다. 가시라는 내용적 모티브는 장미에서 온 것이지만, 실제 재료는 약재로 쓰이는 엄나무의 가시들을 이용했다. 전시장에는 줄기가 가느다란 엄나무를 엮어서 기둥들을 만든 작품이 있다. 가시들 끝에는 안료가 맺혀있어, 마치 무엇인가를 찌른 듯한 효과를 준다. 그런가하면 압축 스티로폼을 깍아서 만든 하얀 가시들이 가득 박힌 한쪽 벽면이 전시장 기둥 뒤에 숨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가시돋힌 사물들은 위치나 크기에 있어서 겉으로 크게 드러나기 보다는 은폐적 속성을 가진다. 손에 넣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작은 오브제들을 눈에 띄게 하는 것은 튀는 색채이다. 독소를 가진 동식물이 유혹적인 색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작은 인형들에 칠해진 화려한 껍질은 그 위에 돋아난 가시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가시돋힌 오브제들은 몇 개가 시리즈로 되어 있는 것이 있고, 단독으로 있는 것도 있다. 가령 일곱 난장이가 나오는 작품은 각기 다른 부위에 가시가 돋힌 인형들이 그들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새장 안팎에 배치되어 있는 것인데, 각자 가지는 성격에 따라 가시가 돋힌 부위와 밀도가 다르다. 가령 입에 가시를 하나 물고 있는 난장이는 말 못하는 바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머리, 등, 목 등에 여러 방식으로 가시가 난 토끼들도 각각의 사연이 있다. 예외적인 식물성 오브제인 푸른 사과에는 노란 가시들이 돋아있는데, 그것은 먹을 수 없는 사과를 상징한다. 장난감이나 장난감을 복제한 오브제들의 공통점은 연약한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것들은 대부분 속이 텅 빈 고무 인형, 또는 석고 복제물들이다.
아크릴 받침대 위에 놓인 토끼들, 새장 주변의 일곱 난장이, 발레리나, 곰 인형, 오리들, 아톰, 샴쌍둥이 등이 그러한데, 이것들은 보통 여자 아이들이 잘 가지고 노는 것들이다. 오브제 주변의 재료들도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시돋힌 신랑 신부 인형이 놓인 웨딩 케익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듯하며, 여러 안료가 흘려진 투명 아크릴판 역시 강하지 않은 소재이다. 자연적이기 보다는 인공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색감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취약하다. 그것들은 자연적인 견고함이 아니라, 곧 껍데기가 벗겨지거나 변색될 과도한 표면들로 뒤덮여 있다. 곰돌이 등 작고 귀여운 인형들은 작가가 좋아하는 것들로서, 모든 장난감들이 그렇듯이 현실성보다는 동화적인 세계와 밀접하다. 백설 공주의 분홍가시로 해석되는 'Pink Thorn of Snow White'라는 전시부제 자체가 동화적이다. 분홍색 샴쌍동이가 그랬듯이, 여기에서 분홍은 하나의 색이기 보다는, 부드러움과 여성성을 상징한다. 백설 공주나 발레리나 인형 같은 캐릭터들은 또 다른 자아들이지만, 작가 자신이 직접 등장하는 작품도 있다. 작가의 얼굴에 가시가 나고, 입에 문 꽃이 점점 커지는 렌티큘러 작품은 자기방어 기제와 나르시시즘이 중첩된 작품이다. 눈에서 가시가 나오는 작은 발레리나 인형은 자신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웨딩케익 위에 가시돋힌 신랑신부 인형이나, 앉을 자리에 가시가 박힌 작은 새장 등도 여성이 사회에서 느끼는 구속의 감정을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적 특질들을 감추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솔직하고 즐겁게 표현하고자 한다. 특히 평면작품들은 이러한 고통이나 피해의식을 축제로 승화시킨다. 아크릴 판 위에 안료를 부어서 만든 이미지들은 모노톤의 캔버스 위에 얹혀져, 색상의 대조를 통해 화려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아크릴 박스 액자로 만들어진 평면작품은 3개씩 쌍을 이루어 9개가 한 벽에 설치된다. 붓으로 칠해진 것이 아닌 물감들은 가시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찔려 흘러내리는 체액을 연상시키지만, 시뻘건 색이 아니라, 핑크, 회색 등 연한 파스텔 톤이다. 그것들은 전시장의 작은 인형들의 눈물이나 피를 연상시키지만, 강렬한 감정이 압축된 체액은 동화적 필터를 통해 순화되어 표현되었다. 2005년에 '해우'라는 부제로 전시된 회화작품에서도 그러한 면이 있다. 붓질이 아니라, 스프레이로 섬세하게 도포된 안료 위에 가는 선들이 얹혀있는 듯한 표면들, 그것들은 색채의 우주 위에 하늘거리는 얇은 베일들이 무늬를 이룬다. 그자체로는 두드러지지 않은 이미지들이 중첩을 통하여 복합된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것들은 깊이보다는 표면에 호소한다. 특히 거울 위에 그려진 드로잉들이 그렇다. 거울의 환영 위에 또 한 겹의 베일이 걸쳐진 형국이다. 거기에는 강력한 주관적인 의지가 낳은 분명한 형태보다는, 마치 안개처럼 촉촉이 젖은 감정의 상태가 존재할 뿐이다. 평면작품은 2005년 갤러리 아트사이드에서 열린 전시 [out of focus]의 작품처럼, 중심이나 깊이가 아니라, 주변이나 표면으로 얇게 퍼진다. 뚜렷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질서나 무게 중심이 없는 그것은, 모순 되는 것들이 대립 없이 공존하는 모호한 상태를 예시한다. 그것은 섬세한 내면풍경이지만, 뫼비우스 띠처럼 언제든지 외부로 돌출될 수 있는 잠재적 에너지를 내포한다. 감정이나 육체의 상태를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표면들이 이번 전시에서는 또 다른 표면으로 나타난다. 가로 4m 세로 1m의 긴 아크릴 박스 뒤에 붙은 거울 시트지는 관객을 비추는데, 아크릴 위에서 흘린 안료와 관객이 겹쳐지는 광경이 연출된다. 가로 50cm, 세로 4m의 세로 구조의 작품도 있는데, 이들은 작은 작품들과 대비를 이루면서 주제를 또 다른 층위에서 반복한다. 작가 자신은 물론 제2의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작은 인형들 표피 위에 돋은 가시는 피부 세포의 변형이라는 점에서 소름 같은 느낌을 주며, 몇몇 작품들은 실제로 소름이 끼친다. 소름이란 불안과 공포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증후군처럼 돋아있는 가시들은 정신분석학적 용법으로 말하자면 외상(外傷)에 대한 예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완화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그 외상의 반복이다. 프로이트는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에서 불안이 생겨나는 원인이 위험상황이고, 증상은 자아를 위험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하기위해 생겨난다고 말한다. 방어과정은 본능적으로 위험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시도이다.
많은 이들이 위험에 직면하면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보인다. 그러나 불안이나 공포는 히스테리같은 정신병적 증후라기보다는, 삶의 상수와도 같은 존재이다. 장선아는 이러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작은 인형들로 대변되는 타자에게 부과한다.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법한 막연한 공포를 장난감 같은 유아적 사물들에 투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안과 공포가 출생 외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예시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이 겪어야하는 불안의 첫번째 경험을 출생으로 본다. 출생은 자신을 완벽히 보호해주었던 전능한 어머니에게서 분리되는 것이다. 불안 상태는 출생의 외상이 되살아난 것이다. 출생을 통하여 엄청나게 많은 자극이 태아에게 몰려들어 새로운 종류의 불쾌감을 일으키고, 아기가 출생을 떠올리는 상황을 맞을 때마다 그 불안한 정서를 반복해서 느끼게 된다. 출생은 나중에 생겨나는 모든 위험 상황, 말하자면 변화된 생활양식과 정신적 발달로 생겨나는 새로운 조건 아래에서 개개인을 덮치는 위험상황의 원형이 된다. 이 맥락에서 본다면 더 이상 부드럽게 피부를 맞댈 수 없는 가시돋힌 작은 오브제들은 모성의 보호 속에 균형을 이루었던 충동이 갑작스럽게 단절되는 경험, 즉 공포를 표현하고 있다. 장선아의 경우 공포의 이중성이 두드러진다. 사랑스러운 작은 인형들의 눈과 잎에 가시를 박아넣는 가학적인 행동은 피학적인 상상의 결과물이다. 공격하는 사람은 두려움을 주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사람이 공격을 하기 마련이다. 공격과 방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비슷한 맥락으로 가장 친근한 것에서 가장 기이한 것이 나올 수 있다. 크고 어둡고 무시무시한 대상에 돋아있는 가시보다는, 작고 밝고 귀여운 대상에 돋아난 가시들이 더 괴기스럽다. 그것은 대립되는 것들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기괴한uncanny 미학의 발현이다. 프로이트는 기괴한 것에 대해, '오랫동안 잘 알고 있고 친숙했던 것에 대한 섬뜩한 느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우리 주변에 흔히 널려있는 작은 장난감들은 친밀함과 편안함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낯설고 불편하고 이질적이며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변형된다. 여성 정신분석학자 식수스도 '오직 다른 어떤 것의 가장자리에서만 존재하는' 기괴함의 양면성을 지적한다. 관계성에 의해 규정되는 기괴함은 어떤 단일화된 리얼리티에 대한 모든 재현을 전복하는 합성물이다. 그것은 사물들 사이의 틈새에 스며들고 우리가 단일성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그 지점에서 하나의 간극을 주장한다. 기괴한 것은 불안의 양식이다. 식수스는 기괴한 것이 주는 낯설음을 단순히 전치된 성적 불안이 아니라, 순수한 부재, 죽음과의 대면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직접적으로 묘사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상징하는memento mori 형상들로 표현된다. 장선아의 작품에서 갖가지 사물 위에 돋아난 가시들은 경계 위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나의 육체를 포함한 한 개체의 경계를 불안하게 하고, 대상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기 쉽다는 것을 알려준다. 경계의 침범에 대한 공포를 해결하는 작가의 방식은 심리적 무대 위에서 전능한 연출자의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크리스테바는 공포증 환자들이 명명할 수 없는 공포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은유들로 전환시키는 놀이에 몰두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놀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충동을 폭로하고 터뜨린다. 여기에서 가시는 파열의 도구가 된다. 파열을 통해 전전긍긍하는 자아는 타자와 뒤섞인다. 그것은 합리적인 세계관으로 보자면 혼돈과 광기의 세계이지만, 이러한 전쟁터 같은 장소에서 주체가 생겨난다. 삶의 전쟁터에서 겁을 먹는 것은 '인간성의 징후, 말하자면 사랑에 대한 호소'(크리스테바)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장선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공포증phobia과 여성성과의 관계이다. 그녀의 작품은 평면이든, 오브제 작품이든 견고한 시각성 보다는 촉각성, 즉 전신 감각을 통한 직접적인 의미작용을 시도한다. 그것은 견고한 재현의 구조에 내재하는 남성성을 전복시키는 여성적 언어의 특성으로 간주된다.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이질성과 마주하는 모호한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장선아의 작품은 강고한 경계를 가지는 동일성의 사고를 해체시킨다. 찌르고 터지고 흘러내리는 것에 대한 은유를 통해, 작가는 동일성의 외부로부터 온 위험들을 표상한다. 마치 '비 자아로부터 위협당하는 자아, 외부환경으로부터 위협받는 사회, 죽음으로부터 위협받는 삶'(크리스테바)처럼 말이다. 그러나 장선아의 작품이 공포를 위한 공포에 탐닉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작품은 사회의 상징질서에 의해 금기의 선으로 둘러처진 경계들을 위반하는 위험, 즉 공포는 매혹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저기 돋아난 장선아의 가시들은 물질과 이성에 의해 마비된 현대인의 의식을 자극하고 파고들면서 치유하는 가장 원초적인 수단이 된다. 이는 공포를 끌어들여 공포를 치유하는 일종의 동종요법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선영
Vol.20070920f | 장선아展 / JANGSUNA / 張善雅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