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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831_금요일_06:00pm
책임기획_김숙경
1부 인효진「High School Lovers - Stiletto」 / 2007_0831 ▶ 2007_0906 2부 권순학「Hyperspace Sub」 / 2007_0907 ▶ 2007_0913 3부 최중원「스치던 풍경」 / 2007_0914 ▶ 2007_0921 4부「2007' 역설과 현장...」연합전 / 2007_0922 ▶ 2007_0927
후원_서울문화재단
갤러리 쿤스트독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02_722_8897 www.kunstdoc.com
21세기적 감수성. 디지털적 매카니즘에 의한 사진의 비선형적 제작방식은 포착된 이미지의 변형과 변이를 무한대로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대상의 본성/사실성과 관계한 논리적 상황을 전혀 새로운 가상과 융합의 지점들로 치환 할뿐만 아니라, -1920년대 신즉물주의적 사진과 관계하여- 사진 속 현장의 물성을 더욱 강하게 산출하는 '낯선 사실성'의 확장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7' 역설과 현장..."은 디지털사진의 사실성이 드러내는 즉물성(卽物性/Sachlichkeit)의 새로움에 주목한다. 이는 대상이 지닌 물성의 경계를 '연출과 환각 그리고 연상'을 통해 이어가는 것으로, 그 안에서 대상의 사실성이 '탈-현실적 혹은 비-현재적 상황'에 닿아 있음은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술이 논하는 '현실의 현대적 감수성'이란 이미 인습과 규범을 넘어선 다른 곳에서 현실을 찾아 들어가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 김숙경
인효진「High School Lovers - Stiletto」- 어린 연인들의 불안한 유형학 ● 인효진의 이번 개인전 출품작들은 여고생들이 자신의 실제 남자친구들과 함께 교복을 입은 채 연인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들이다. 굽이 높고 뾰족한 구두를 의미하는 '스틸레토'라는 부제에서 연상하듯이, 우리는 사진에 드러나고 있는 어린 연인들의 관계 자체가 태생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위태로운 징후에 처해 있음을 간파한다. 남녀가 포옹하고 있거나 손을 잡고 있는 등, 연인 사이의 스킨쉽이 표출되는 상투적이기까지 한 '유형적 포즈'들은 피상적으로 이들의 관계가 '연예 중'이라는 현재성의 기표들을 쉬이 드러내지만 이들이 '행복한 연인'임을 방증하지는 못한다. 이들이 입고 있는 교복이라는 제도, 금기, 억압의 기표와 더불어 스튜디오의 벨벳 천이 표출하는 붉은 색의 열정, 욕망과 같은 상징들은 언제 관계가 깨어질지 모르면서도 연애에 열중하고 있는 여고생들의 불안한 징후와 그 현존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 인효진의 스트레이트포토는 연출사진의 방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성인의 육체와 미성년의 감성을 가진 이들의 혼란스러운 연애관을 특별한 치장이나 간섭 없이 훌륭히 끄집어낸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그녀가 모델인 여고생들을 과거 혹은 현재의 그녀로 감정이입하거나 동일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어린 연인들의 포즈와 시선을 살펴보자. 소녀의 '남친'들은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 얼굴로 인해 익명화되고 배경화되어 있는 반면, 소녀들은 모두 카메라 렌즈를 마치 거울을 보듯이 응시하고 있다. 그것은 타자를 보는 유혹의 시선임과 동시에 자아에 도취되는 나르시시즘의 시선이다. 거울을 향한 시선이 언제나 '나'란 주체를 '나 또는 너'의 인칭으로 교란시키는 연동소(shifter)의 공간을 포섭하듯이 말이다.
나아가, 여기에는 그녀들을 카메라의 눈으로부터 거울의 반영 이미지로 치환시켜 자신의 과거 혹은 현재의 주체성과 동일화시키려는 작가의 시선이 개입하고 있다. 모델의 시선과 조응하는 작가의 시선에는,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이들의 충동, 욕망을 감금하거나 훈육하려는 사회적 위계, 집단관습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 불온한 욕망을 꿈꾸는 여고생들을 자신과 동일화시켜 바라보는 연민이 겹쳐 있다. ● '어린 연인들의 불안한 유형학'을 통해서 '에토스(ethos)적 주체'에 대한 반감과 '파토스(pathos)적 주체'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고 있는 인효진의 시선은 그런 면에서 다분히 비평적이기 조차 하다. 사진을 찍히는 이들과 찍는 이의 시선이 교차하는 인효진의 작품에는, '금기와 욕망의 대립'이라는 문화적 담론과 함축적 의미가 끊임없이 코딩되면서 명징한 작가의 의도와 메시지, 즉 '스투디움(studium)'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그녀의 사진에는 이미지가 텍스트화 될 수 없는 지점, 즉 탈코딩이 가능한 어떤 지점이 비집고 들어설 공간이 좁아 보일 수 있다. 관객에게 푼크툼(punctum)에 대한 인식은 순전히 주관적 영역이지만, 작가의 유형학으로 꽁꽁 매어 둔 이미지가 유발시키는 비평적 태도가 조금은 더 느슨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푼크툼처럼 예술적 소통 역시 작가의 메시지, 의도가 관객과 미끄러지는 가운데서 느닷없이 형성되는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권순학「Hyperspace Sub」- 가상 풍경-'환각'의 시뮬라크르 ● 권순학의 사진 연작,「HYPER-SPACE 'sub'」는 모더니즘과 결별을 시도하는 80년대 뉴웨이브(New Wave)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이른바 '찍는 사진(taking picture)'으로부터 '만드는 사진(making picture)'으로 전환한 새로운 사진이 그것이다. 메이킹 픽쳐의 역사는 실상 그 이전부터지만, 권순학이 구사하는 몽타주 방식은, 60년대 팝아트의 영향을 받아 80년대 사진 현장에 급부상한 뉴웨이브의 '멀티-콜라주' 기법으로부터 기원한다. 대상을 멀티플 이미지로 병치시켜 콜라주해내고 있는 호크니(David Hockney)의 사진들은 그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단지 다르다면 호크니의 사진이 '아날로그 멀티-콜라주'라 한다면 권순학의 것은 '디지털 멀티-몽타주'라는 지점이다. ● 권순학의 사진에는, 디지털 편집, 합성이라는 오늘날 메이킹 픽쳐의 감쪽같은 테크놀로지의 효과 외에도 우리가 관심을 두는 또 다른 측면이 존재한다. 대상과 대면하고 있는 카메라가 그 동안 보여주었던 구태한 시선의 방식을 역전시키려고 하는 '멀티-시선'(multi-view)이라는 일탈의 제스처와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고스러운 노동력이 그것이다. 그는 디지털카메라를 통해서 특정 대상에 대한 무수한 셔터 누르기를 지속한다. 일테면 지하철의 전동차 내부를 찍을 때, 매번의 셔터 누르기 동작을 통해 전동차의 위쪽 벽, 그 다음 옆, 그 다음 모서리 식으로 각 부분의 파편 이미지들을 카메라로 채집하기를 지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파편 이미지들은 컴퓨터에 일괄적으로 입력된 후 세밀하게 이어붙이는 '컴퓨터 사진몽타쥬 (Computer Photomontage)'기술을 통해서 전동차의 전 면모가 비로소 드러낸다. 무수한 시간과 노동력이 기반한 '테이킹 픽쳐'와 '메이킹 피쳐'의 조합이 이루는 그의 완성사진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의 모습이 아니라는데 우리의 논의는 촉발된다. 그것은 실재의 모습과 다르면서도 실재 이상의 생생하고 충격적인 이미지이다. 지하철 사진에서 보듯이, 바닥은 휘어져 있고 천장과 바닥, 측면과 정면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기묘한 초현실적 이미지가 등장한다. 한 컷의 사진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폭넓은 공간이 디지털 몽타주 기법을 통해서 변형, 재구성되어 하나의 전체사진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모조의 세계, 즉 시뮬라크르가 된다. ● 권순학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주요한 키워드로 꼽고 있는 '환각'을 통해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듯이, 그의 멀티-시선은 파노라마나 영화적 기법을 모방해서 현실을 완벽히 구현하려는 이전의 멀티-시선 전략들과는 차별화된다. 인간과 카메라의 시선 간의 간격을 메우려고 시도하는 그의 사진은 외려 비현실의 시공간, 즉 가상현실을 창출해내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동차 내부에는 부재함에도 차창에 그 이미지가 반영되어 나타나는 인물, 전동차 내부에 설치된 모니터에 투사된 허구적 인물 등, 실재에 개입하는 허구도 그러하려니와 하나의 공간에 쌍둥이처럼 분산되어 존재하는 인물들이나 그들이 핸드폰 영상을 통해 몰입하고 있는 또 다른 가상공간과의 겹쳐짐은 작가가 의도하는 '환각'의 적절한 환유적 장치이다. 그가 드러내는 가상풍경이란 결국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시뮬라크르의 환각 공간인 셈이다.
최중원「스치던 풍경」-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로 곱씹는 자기 반영의 서사 ● 최중원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풍경을 카메라로 담아낸다. 빽빽하게 밀집한 아파트 주변의 허름한 건물, 인근의 한가한 놀이터, 도시 변두리의 골목, 그 곳에서 장기를 두는 노인들 혹은 잡담을 나누며 걸어가는 학생들의 무리, 지하철 계단을 바쁘게 오르내리는 소시민들... 일견, 그의 사진들은 현대문명이 밀쳐낸 소소한 주변의 삶을 기록하는 것 자체에 강박적으로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일차적으로 그의 작업은 일상의 단편들을 프레임 안에 무수히 가두어 들여 아카이브화하는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존 버거(John Berger)의 '보기의 방식'이 일깨우는 시지각 담론을 확증하려는 듯이 보인다. 즉 본다는 것은 대상의 선택이고 그 선택은 결국 한 주체의 사물을 지각하는 태도를 구체화한다는 것 말이다. ● 최중원은 자신의 두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고, 하나의 눈, 즉 카메라의 앵글로 세상을 기록한다. 그가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이미지의 포착을 카메라로 수없이 반복한다 할지라도 그곳에서 우리는 대상에 대한 그의 일관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문명의 주변, 한가하지만 지독한 일상'과 같은 공통분모는 수많은 사진들 속에서도 쉬이 찾아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사진은 형식상 스트레이트포토가 감당하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차원에 자리하고 있다. 그 곳에서는 꾸밈과 거짓이 없는 '재현적 서사', 혹은 '미메시스 서사' 체계가 작동한다. 현실에 대한 그의 다큐멘터리적 조감 방식은 일견 그의 사진을 현실의 흔적, 자국과 같은 지점으로 치닫게 해서 퍼스(Charles S. Peirce)나 크라우스(R. Krauss)가 언급하는 '인덱스'의 가치를 훌륭히 재생산해내고 있는 듯이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최중원은 카메라의 '한 눈'으로 기록하는 풍경(landscape)을 '재현적 서사'에 묶어두길 원치 않는다. 그는 기억과 마음이라는 '또 다른 눈'으로 기록하는 '자기반영의 서사(narration)'를 감행하고자 시도한다. 즉 눈으로 보는 풍경(landscape)에 마음으로 보는 풍경(mindscape)을 덧입히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무수히 찍어 아카이브화한 디지털 사진들을 그의 표현대로 '몇 개월 동안의 숙성기간'을 거친 다음에야 끄집어내어 다시 살피면서 작품화할 사진을 고른다. 작가는 '마음이 동(動)해' 선택한 사진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실제 눈으로 본 당시의 감정과 기억이 되살리는 이미지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사진 보정의 과정을 거친다. 그는 화면의 미드톤만을 살려 사진 전체의 명도를 한 단계 가라앉히고 세부 이미지들을 포토샵으로 따내어 그것의 명도를 높이거나 낮추는 식으로 보정을 행하며 기억과 감정을 더듬는다. 이런 방식은 프레임 내부의 단일한 빛의 효과를 깨뜨려 자연스러운 풍경 이미지를 해체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낯선 현실의 이미지에 직면케 한다. 수고스러운 노동의 시간을 들여 마음의 눈으로 어루만지고 되살려내는 그의 마인드스케이프는 우리에게 낯선 현실로 드러나지만 그에게는 기억과 감정이 작동하는 익숙한 현실이 된다. 달리 말해 최중원에게 있어 그의 마인드스케이프는 '자기반영의 서사'가 되는 셈이다. ■ 김성호
Vol.20070911a | 2007' 역설과 현장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