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y

강유진 회화展   2007_0830 ▶ 2007_0916

강유진_Garden in the TA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에나멜_162×112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선컨템포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830_목요일_05:00pm

후원_서울문화재단 젊은예술가지원사업(Nart 2007)

갤러리 선컨템포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02_720_5789 suncontemporary.com

표면을 흘러내리는 회화 ● 강유진의 작품에는 여러 층위의 시선들이 있다. 시선들은 무엇을 바라보기 위한 것들이 아니라 어떠한 것들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들이다. 장치들은 자칫 상징들로 오해 받기도 하는데 그녀가 선택한 오브제들은 도시의 것들 즉, 도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스펙터클한 풍경들이다. 도시풍경은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많은 시선들을 만들어낸다. 건물이며, 도로이며, 인위적 수영장의 풍경까지, 도시는 언제나 바라볼 수 있는 어떠한 시각적 틀을 제시한다. 그녀는 이러한 틀을 이용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단순히 도시의 풍경을 재현한다거나 도시적 감성을 표현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진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강유진이 회화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도시성은 무엇일까?

강유진_Garden into the TA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에나멜_130×162cm_2007

그녀는 도시를 여러 시선들로 바라본다. 마치 도시계획을 하듯 도로를 구성하고 건물을 배치하는 조감원근법적 시선과, 도시 속에서 고층빌딩의 마천루를 바라보며 동경하는 시선이 함께 교차한다. 그리고 이 두 시선에 전혀 연관성이 없는 사물오브제를 던져 넣는 개인의 시선, 바로 이러한 시선들의 교차와 중첩을 통해 작가는 시각이 주는 원근법적 환영에서 벗어나 도시를 새롭게 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회화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회화가 가지는 원근법적 소실점은 도시 속의 실제적인 공간 원근과 맞닿아 있다. 3차원의 공간에서 바라보게 되는 인간의 양안원근법은 바로 회화에서의 투시도법의 기준점이 된다. 하지만 회화의 소실점은 양안의 불일치와 운동시차, 망막의 만곡을 고려하지 않고 시각 소실점이라는 정확한 지점을 연역해내어 내면화시킨 하나의 지점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의식의 눈에 모든 것을 일치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공간의 입체감을 드러내는 여러 시선들을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회화를 평면으로 인식하게끔 유도한다. 여기서 평면성은 단순히 캔버스의 질료적 평면성이나 회화를 벗어나고자 하는 평면성의 의미를 넘어서 두 세계가 양립하는 표층, 혹은 표면(surface)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평면은 하나의 현상, 혹은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이 지칭하고 있는 기표적인 오브제로 작용하지 않는다.

강유진_In the Gallery 미술관 안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에나멜_130×130cm_2007

도시의 건물과 수영장, 도로는 하나의 칼리그램이 아니라 화면을 구성하는 구성요소일 뿐이다. 즉, 평면은 단지 표층, 표면인 것이다. 강유진은 이러한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하기 위해 액션페인팅 효과인 흩뿌리기와 물감 흘리기를 사용한다. 물론 이러한 우연적 효과는 자동기술적인 우연성보다는 작가의 의도된 표현에 가깝다. 그녀의 의도는 바로 작품의 표면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표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의 의미로 함축된다. 첫째는 회화의 파노라마적 원근법을 파괴함으로써 회화가 환영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함으로써 회화라는 매체 자체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이중 장치의 근본적인 물음은 바로 '회화란 무엇인가?' 라는 명제에 있다.

강유진_Inward or Outward between heart and Guggenheim Bilbao Museum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에나멜_162×227cm_2007

Artist와 Painter의 경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그녀의 태도는 바로, 회화를 어떠한 영역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매체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영역의 경계에서 해석의 여지를 관객들에게 넘겨주는 작품들의 애매모호함을 작가는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표면으로의 지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의 작품이 내뿜는 힘찬 에너지는 커다란 캔버스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벽을 가득 메우는 커다란 작품은 사각 캔버스의 프레임을 인식시키지 않고, 화면 즉 그것의 표면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다. 표면이란 그것의 내용으로 침잠해 들어가거나, 혹은 내용의 연결고리들 조합, 분석해내는 것이 아닌 바로 그 자체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조는 작품의 내적 구조이자 작품 외적 환경과 조우하는 체계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은 오버랩 되는 여러 공간들이 지칭하는 의미 층에서 벗어나 그것을 구성하는 체계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러한 몰입을 위해 작가는 적극적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선형원근법을 사용한다. 회화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회화를 벗어나게 만든다는 작가의 전략은 상반되는 요소들의 병치, 혹은 공존을 통해 인식의 틀을 매체자체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강유진_Meat in the Galler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에나멜_162×112cm_2007

여기서부터 강유진 작가의 이번 전시 'Gallery'는 시작된다. 앞서 설명한 대로 작품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틀을 보지 못한다면 자칫 그녀의 작품을 오해할 수 도 있다. 왜냐하면 화려한 화면과 거대한 스케일, 그리고 여러 오브제들의 조합은 단순히 재현을 위한 도구들이 아니며, 그녀의 작품이 생산성을 목적에 둔 테크닉적인 회화이거나 재현에서 추상회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번 전시 'Gallery'는 형식과 내용에 대한 이야기이다. 갤러리, 혹은 미술관은 한마디로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인공적인 건물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갤러리는 기능적인 공간, 가치적인 공간, 인식적인 공간 등 여러 관점들을 모두 수용한다. 현대 미술에서 갤러리가 가지는 의미는 개개의 작품 이상의 가치일 수 도 있다.

강유진_Poo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에나멜_162×112cm_2007

작가는 갤러리가 고정된 건축물이지만 그 내부에서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짐에 관심을 갖는다. 특히, 각기 다른 작가들의 예술적 언어가 갤러리라는 공간에 들어가 그 곳의 틀에 맞춰져 다른 이야기로 전환됨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갤러리의 느낌은 작가의 말에 의하면 "가득 찬 공허, 풍부한 빈 공간"이다. 여러 지칭하는 의미들이 하나의 구조체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들로 치환되는 곳, 그곳이 바로 갤러리인 것이다. 물론 작가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갤러리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양한 에너지들이 드나들며, 채워지고 비워지는 갤러리를 평평한 표면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 이른바 고고학적 해석의 시작이다. 이것은 단순히 갤러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에 대한 것이며, 그것보다 먼저 갤러리에 걸려 질 자신의 회화작품의 존재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인공적인 갤러리에 투영된 자연의 모습과 도로의 안전표식의 격자들, 수영장의 반짝이는 수면, 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과 고깃덩어리, 이러한 모든 오브제들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외적 환경과의 관계를 드러낸다.

강유진_The Road to the Museum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에나멜_130×194cm_2007

따라서 그녀의 작품은 외부에서 시작하여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는, 혹은 내부에서 뿜어져 나와 외부로 드러나는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이 바로 표면의 이야기인 것이다. 표면이라는 것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에 있으면서 두 세계 모두를 아우른다. 반대로 표면은 모든 것을 버리며 그것 자체의 평면성을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평면성, 특히 표면성은 현대미술에서의 갤러리(회화)의 위치와 갤러리(회화)의 본질을 요구하는 논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물어지는 물음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음은 하나의 해석 기준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항상 선 이해(혹은 선입견)로써 작용한다. 그 기준점이 되는 회화적 소실점은 결코 관객들을 회화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작품을 바라보게 만들지 않으며, 또한 그러한 것들을 해체하고자 하는 평면성으로 인해 회화를 다시 인식하고 구성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작가 강유진이 회화를 바라보는 시선이며, 그녀가 말하는 표면으로서의 회화감상이다. 결국 회화는 스스로 회화임을 드러낼 때 비로소 그 의미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백곤

Vol.20070910c | 강유진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