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7_0910_월요일_02:00pm
박지혜_김신영_김세은_고은정_이재명_최자운_김은경_지승배_정나영_장대훈 박현욱_신지현_김영주_이예원_문지영_소수빈_송예진_양화선_이승민_김민규 조영현_양희_김소정_이미경_배주영_최보연_윤다미_장유진_정동선_이윤창 박지영_오보람_안정화_강혜진_박은영_유민석_유혜진_진선희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서울 마포구 상수동 72-1번지 문헌관 4층 Tel. 02_320_1322
Wh∞P ● (흥분, 환희 따위를 나타내는) 와!, 야! (라는 함성,,외치다,,환성) 라는 뜻입니다. 가운데에 들어가는 무한대를 90도로 회전시키면 8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번 저희 전시가 8번째여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 끝이 없는 이야기 ● 흔히 비재현적이고 비대상적이고 비형상적인 미술을 순수미술이라고 한다. 미술은 다만 순수한 시각요소나 감각요소에 머물러야지, 그것이 그림 외적인 무엇을 떠올리거나 암시하거나 상기시켜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텅 빈 캔버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회화'라는 클레멘테 그린버그의 말이나, '캔버스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프랭크 스텔라의 말은 이처럼 어떠한 의미도 함축하고 있지 않은, 다만 순수하게 형식적이기만 한 미술, 소위 순수미술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순수미술에 대한 강박은 칸트의 순수이성에 대한 강박과 통한다. 그리고 모더니즘 서사 이후 순수미술에 대한 회의는 칸트에 대한 니체의 비판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선험적인 이성(형식)이나 삶을 초월해 있는 순수이성(순수형식)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모더니즘 서사가 회의에 부쳐지면서 이후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결정적인 원리 같은 것은 없게 됐고, 따라서 회화는 종잡을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모더니즘 서사가 억압하거나 간과했던 재현, 대상, 형상, 서사, 일상과 같은 개념들이 재차 복권된다. 나아가 접속, 이접, 기생, 욕망, 환유, 알레고리와 같은 비동일성의 논리가 힘을 얻으면서 현대미술은 그 외연을 심지어는 미술 외적인 것에로 까지 거침없이 확장시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 이번 전시에서는 이런 모더니즘 서사 이후 현대미술에 나타난 다양한 이질적인 개념들, 비동일성의 논리들을 만날 수 있다. 그 논리의 지점들은 다른 이질적인 논리의 지점들과 자유자재로 접목되면서 끝이 없는 이야기, 열려진 서사구조를 만든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먼저 김소정, 강혜진, 진선희, 안정화는 다양한 형태의 생물학적 이미지를 주제화한다.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 본 듯한 세포나 원형질 이미지를 통해 생성하고 소멸하기를 거듭하는 생명체의 순환원리를 드러내는가 하면(강혜진), 이를 통해 내면적인 환타지나 순수한 감정을 표현한다(안정화). 세포의 이미지는 때로 양식화된 사람 형상을 연상시키는 비정형의 얼룩으로 변질되고, 인간관계를 암시하는 군상의 이미지로 전이된다(진선희). 그리고 특정의 신체 부위를 클로즈업한 이미지를 사실적인 기법으로 재현한 그림을 통해 신체 내부의 장기를 보는 듯한 이질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김소정) 등 미시세계의 비의를 드러낸다. ● 그리고 고은정, 이재명, 최자운, 김신영, 정동선은 공간을 주제화한다. 실사로 출력된 이미지에 부가된 비정형의 스크래치를 통해 일상적 공간이 낯설고 이질적인 공간으로 변질되는가 하면(고은정), 모호하게 재구성되는 과정을 통해서 일상적 공간이 일종의 심리적인 공간으로 전이된다(이재명). 이렇게 작가들은 친근한 공간이 내재하고 있는 낯설고 이질적인 성질을 암시하고 그 의외성을 드러낸다(최자운, 김신영). 이런 공간이 내재하고 있는 이중성에 대한 인식은 프로이드의 캐니와 언캐니 논의와 통한다. 즉 친근한 공간이나 낯 설은 공간은 별개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로 중첩된 공간임을 드러내며, 따라서 모든 공간은 일정정도 심리적인 공간임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정동선은 투명하고 가녀린 낚싯줄을 촘촘하게 배치하는 방법을 통해 일종의 환영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옵티컬적인 착시효과가 두드러져 보이는 이 작업에서 작가는 다만 이미지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실제로는 부재하는 비가시적인 공간을 제안한다. 공간의 개념을 추상화하거나 일종의 추상적인 공간을 재현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처럼 공간은 특정의 주체와 관계 맺어질 때 일정한 심리적 성질을 띠게 된다.
그런가하면 김민규, 문지영, 박지영, 김은경, 신지현의 그림에서 이러한 심리적 성질은 일종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의 형태로서 현상한다. 때로 무의식은 그로테스크한 심리적 외상의 형태를 띠며(문지영), 더러는 순수한 감성과 동격인 것으로 드러난다(박지영). 무의식은 이질적인 사물들이 자유자재로 결합하고 분절되고 변형되는 초현실적 이미지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기도 하고(박은영), 자아를 상징하는 빈 의자로 표상되기도 한다(김은경). 이와 함께 신지현은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끄집어낸 듯한 모호한 형상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유년의 추억과 상처를 반추하는 자기반성적인 작업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 프로이드는 이러한 무의식의 본성을 욕망, 특히 성적 기호에서 찾는다. 윤다미, 이예원, 유혜진, 배주영, 양희의 그림이 이를 주제화한 경우에 해당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작가들은 그 욕망이 닿아 있는 각종 사물들을 통해, 주로 장신구와 같은 그 표면에 아롱지는 빛을 발하며 반짝이는 사물들을 통해 그 욕망에 반응한다(윤다미, 이예원). 유혹하는 오브제로 명명할 만한 이러한 사물현상은 때로 단순한 반응을 넘어 욕망 자체의 덧없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말하자면 바로크에 그 기원을 둔 바니타스 정물화의 동시대적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유혜진은 세포를 연상시키는 비정형의 얼룩을 통해 욕망을 암시하며(그 자체 일종의 욕망의 유전자로 명명할 만한), 배주영은 플라스틱 모형의 인형을 빌려 욕망과 이중성을 대리케 한다. 그런가하면 양희는 각종 대중매체에 산재하는 성적기호를 채집하고 이를 양식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일종의 성적 표본을 재구성한다. 이로써 대중매체가 욕망을 자극하고 또한 개인이 이를 내재화하는 은밀하거나 공공연한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이러한 욕망이나 특히 성적기호는 대개 금기의 형태로 억압돼있으며, 따라서 그 본성상 이중적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는 김영주와 이승민의 그림에서 의미의 이중성이나 잠재적인 폭력의 형태로 확대 재생산된다. 김영주는 소위 '노는 아이들'을 통해 놀이와 폭력의 모호한 경계를 암시하는데, 이는 모든 표면적인 의미와 이면적인 의미의 불일치나 차이에 대한 인식과 통한다. 그리고 이승민은 육체에 가해지는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폭력 대신 정신에 작용하는 잠재적이고 미시적인 폭력에 의해 왜곡된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 보이는데, 그 자체가 미셀 푸코의 생물권력 이론(감금으로부터 양심과 지기검열, 감시와 상호견제로 그 권력의 축이 이동하는)을 떠올리게 한다. ● 현대미술의 한 특징으로서 사진의 질감을 닮은 회화의 경향성을 들 수 있다. 일테면 박지혜는 사진을 연상시킬 만큼 사실적인 회화를 통해 시선이 내재하고 있는 심리적인 효과를 주제화하는데, 이는 시선을 매개로 하여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묻는 사르트르의 논의나 시선을 욕망과 동격인 것으로 본 라캉의 논의와도 통한다. 그리고 유민석은 사실적인 회화를 통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극적인 공간효과를 강조하는 한편, 알레고리적인 기호나 서사를 도입하여 회화의 의미를 확장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 그리고 김세은, 오보람, 송예진은 자연을 소재로서 다룬다. 빛과 어둠이 어우러진 자연 이미지를 통해 숲의 비경을 드러내고 암시하는가 하면(김세은), 꽃문양을 소재로 한 자수를 연상시키는 장식적이고 키치적인 회화를 통해 예술의 상품화를 비판한다(송예진). 그 이면엔 소위 '꽃그림'으로 총칭되는 '잘 팔리는 그림'에 대한 풍자나 비판의식이 내재돼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가하면 양화선은 대상을 마치 그림지도처럼 평면적으로 전개하고 중첩시키고 열거하는 과정을 통해서 기억 속의 정경과 현재에 실재하는 정경을 하나의 공간 속에 펼쳐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일종의 지도 그리기(단순한 지도로서보다는 일종의 인식지도 그리기)로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윤창은 캔버스에 구두약을 칠하고 광을 내는 과정을 통해서 캔버스를 일종의 거울(흑경)로 변질시킨다. 여기서 일반적인 거울이 사물이나 대상의 외양을 비추기 위한 것이라면, 흑경은 그 내부(일테면 인간의 내면)를 비추기 위한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얻는다. 또한 장대훈은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단위인 픽셀을 모듈로 하여 재구성된 초상화를 통해서 반복과 복제로 나타난 동시대 이미지의 존재방식을 코멘트 하는데, 그 자체를 일종의 디지털 초상화로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와 함께 작가들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습관이 관성으로 굳어지고 일상으로 구조화되는 메커니즘에 주목하기도 하고(조영현), 그 자체 일종의 메타재현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 사례로서 토이 인형을 소재로 하여 회화의 본성을 묻기도 하고(지승배), 인간의 내면을 투시하는 듯한 일종의 심리적인 초상화를 제안하기도 한다(박현욱, 최보연). 이외에도 캔버스에 오브제를 부착하는 방법을 통해 일종의 저부조 형식의 회화를 제안함으로써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가 하면(정나영), 반복적으로 중첩된 짧은 선들의 집합이나 추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암시적인 이미지를 제안하기도 하고(소수빈, 이미경), 건전지나 레고와 같은 레디메이드를 끌어들여 회화의 범주를 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시킨다(장유진).
이상으로 살핀 그림들을 특정의 주제로, 소재로, 형식으로, 경향으로 묶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묶음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임을 피할 수는 없다. 각각의 그림은 범주화나 묶음의 기획에 반하는 자족적인 구조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들은 차라리 끝이 없는 이야기, 끝이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불러들이고 파생하는 열려진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다만 시작과 끝이 논리적인 개연성이나 내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유자재한 서사구조, 어디서나 시작할 수 있고 급작스럽게 끝낼 수 있는 마치 유기적인 흐름과도 같은 서사구조에 동참하고, 공감하고, 기생하고, 이를 즐길 수 있을 따름이다. ■ 고충환
Vol.20070910b | Wh∞P-Everything is Nothing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