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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908_토요일_04:00pm
갤러리 모아 성동훈 초대전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갤러리 모아_GALLERY MOA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469번지 Tel. 031_949_3309 www.gallerymoa.com
21세기, 신화소의 형상을 찾다 ● 꿈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잠언 중의 하나는 장자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밤 나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훨훨 날아다니며 내 운명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다 홀연히 잠깨어 보니 나는 다시 장자였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장자가 된 꿈을 꾸는 한 마리의 나비란 말인가, 아니면 한 마리의 나비가 된 꿈을 꾸는 장자란 말인가?" 장자는 우리의 실재를 화두로 놓는다. 데이비드 콕스헤드(David Coxhead)와 수잔 힐러(Susan Hiller)는, 꿈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며, 현재의 우리가 실재하는 것만큼이나 똑같이 실재하는 듯하다는 점에서 꿈의 기본적인 역설이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꿈을 꾸는 사람은 빈손으로 깨어나지 않는데, 여자든 남자든 그런 사람은 꿈 세계의 탐험가로서 주술적인 노래나 춤, 치병 방법, 미래나 멀리 떨어진 곳에 관한 정보, 또는 참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 가지고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꿈은 신화성의 샘과 같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게 꿈과 꿈꾸는 시간은 존재의 완전히 신화적인 과거, 현재, 미래이다. 꿈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현재에도 있지 않다. 그 원주민들이 말하기를 백인은 꿈을 꾸지 않으며, 다른 길을 간다고 지적한다. "백인, 그들은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다시, 장자는 말한다. "공자와 자네도 한낱 꿈이며, 자네가 한낱 꿈이라고 말하는 나 자신도 꿈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의 역설처럼 들리겠지만 훗날 어떤 현자가 나타나 그것을 설명해줄지 뉘 알겠는가?"
귀향, 소리나무를 듣다 조각가 성동훈은 먼 시간여행에서 귀향했다. 1990년대, 야생마를 호리며 생존의 파고를 널뛰던 돈키호테를 통해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이면을 꼬집었던 그는, 이제 시간의 퇴적을 넓게 사유하는 품을 보인다. 1990년대 후반을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의 주제를 옹골차게 밀고 간 그의 조형적 기질과 매스(mass)의 힘을 떠올릴 수 있을 터이다. 십여년 동안 그가 보여준 조각은 세속의 틈을 뒤 흔든 트릭스터(trickster)의 고독한 몸부림이었다. 철골구조에 엉겨 붙은 거친 시멘트와 위태로운 동세를 과장한 말과 인물의 형상성은 '풍자'의 언어를 날 세운 시각적 충격이기도 했으며, 그가 만들어낸 20세기 말의 '시대어'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다시 돌아왔다. "6년만의 개인전이에요. 갤러리사비나에서『에로스』전을 개최한 것이 2001년이었으니까. 1999년부터 3년 동안 에로스작업만 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죠. 가족과 시대의 변화가 있었고, 그 사이 친구의 죽음도 보았죠. 이때부터 외국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어요. 한 7, 8년 되었지 싶어요." 그랬다. 그는 외국의 조각 심포지엄과 기획전을 위해 많게는 한 해에 절반가량을 나가 있기도 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화의 종다양성을 보았다. '뚝심의 작가'인 그가 자신의 예술언어를 구축하는 완고한 형식마저 바꾼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처음 외국에 나갈 땐 작품에 관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했어요. 한데, 그 나라 환경과 맞지 않는 거 에요. 생각해 보니, 스튜디오 작업만 해 온 버릇 때문이었죠. 그 뒤로 미리 준비하지 않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많은 생각을 해요. 도착하면, 다시 가다듬죠. 그 나라의 공구와 재료를 본 후 아이디어를 얻기도 해요. 코스타리카에서 처음 '소리나무'를 만든 것도 그런 연유죠." 경기도 이천의 설봉공원에 서 있는「소리나무」의 원형은 코스타리카에서 시작되었다. 이천 여개의 도자기 종을 매달아 놓은 이 나무는 바람이 불때마다 맑은 소리가 난다. 이천 여개의 소리는 소리의 진향처럼 세상을 향해 번진다. 이런 조각적 변화의 진폭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20세기말의 시대령에서 보여준『에로스』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세기말이 보여준 욕망의 변주곡을 신화적 판타지의 기형적 혼돈으로 표출한 그의 언어는 강렬한 새디스틱 칼라로 눈부셨기 때문이다. 억압과 해방의 이중적 극단이 표출한 심연에서 강철 새잎이 돋는 '생명'의 원초성은 그 내부의 뜨거운 심장과도 같았다. 그로부터 6년, 그의 언어는 현실 이데아를 향해 화살을 당긴다. "이라크 전쟁, 세상의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그런 것들에 전 민감해요. 또 종교적인 문제들, 거기에도 어떤 부당함이 있죠. 서양문화, 기독교... 십자군 전쟁을 떠 올려 봐요. 종교란 원래 사랑을 전하는 것이 핵심 아닌가요. 하지만, 현대 사회는 모순에 차 있어요." 2001년 이후, 그가 세상을 돌면서 보게 된 많은 것들은 모순의 알레고리였다. 그는 그 중심에 종교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인식의 기명과 조형화의 단계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 존재한다. 이 언급은 그의 조각들이 축적의 방식을 통해 제작되지만 어디에도 그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일종의 '명제성'에서 비롯된다. 미시물리학에서 인과율은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관계를 서술하지만, 동시성의 원리는 서로 다른 사건이 한꺼번에 일치해서 일어나는 현상을 다룬다. 성동훈에게 있어 6년 동안의 일들은 인과율을 가지지만, 작품으로 표현될 때는 동시성의 원리처럼 하나의 주제로 명료화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풀어 말하면, 그의 제작과정은 인과율이지만 문제의 화두는 동시성에 의해 결정되어 표출된다는 것이다.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제작한 네 개의 작품은 그 안에 있다. "겉으로 보면, 주물이나 스테인레스로 보일 거 에요. 하지만 반생이(굵은 철사)를 이어 붙인 거예요. 용접을 한 후, 그 위를 다시 용접봉으로 붙여요. 그런 다음 갈아내죠. 하나가 전체가 되는 거죠."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종과 같았다. 소리나무에서 시작된 소리, 그리고 소리 없는 종의 울림.
형상의 발견, 신은 어디에 있는가! 형상은 구름이다. 구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중 하나는 구름이 아닌 원시적 향취가 강한 토르소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구체적 형상을 갖추었다고 해도 구름이라는 원형은 바뀌지 않는다. 그는 꿈, 생각, 믿음, '천천히 오는' 속도를 떠 올린다. 이 단어들을 조합하면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이 된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사전적으론 동요, 설렘, 감동, 떨림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구름을 상상하는 동시성의 원리는 그 내부에 앉아있는 부처에게서 찾아야 한다. 10세기 경 중국에서 그려진「마야 부인의 꿈」을 보면, 하강하는 구름위에 둥근 원이 있고, 그 안에 흰 코끼리를 탄 부처가 있다. 이 그림은 불타의 참된 잉태와 화신을 보여준다. 성화에서도 동정녀 마리아의 꿈은 마야 부인의 꿈과 다르지 않다. 14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Simone Cie Crociffissi가 그린「동정녀 마리아의 꿈」은 마리아의 가슴에서 솟은 황금빛 나무를 통해 꿈의 예언을 보여준다. 나무에는 십자가에 매 달린 예수가 있다. 이미 예언은 "영원한 것이 역사 속으로 들어가거나, 역사를 바꾸기도 한" 시간의 밖을 향한다. ● 이 장면화의 원리는 안팎이라는 이상과 현실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데 있다. 꿈의 실체는 영원의 찰나와 같다. 그러나 그 내부는 현실의 혼돈과 순교의 숭고함을 동시에 갖는다. 성동훈의 작품은 이러한 이분화 된 장면성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종의 내부에서 듣는 소리는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다. 「구름 속의 강Ⅰ-또 다른 믿음」은 전투기에 매달린 십자가상을 안착시켰다. 이 화두는 마리아의 꿈 정반대 영역에 있다. 황금나무에선 천사들이 보좌하지만, 이 구름은 신을 자살특공대로 전락시킨다. 존 레넌은 노래했다. "상상해보라, 종교 없는 세상을."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만들어진 신』에서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 폭탄테러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화약 음모사건도,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도, 유대인을 '예수 살인자'라고 박해하는 것도, 북아일랜드 '분쟁'도, 명예 살인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입은 채 텔레비전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고대 석상을 폭파하는 탈레반도, 신성 모독자에 대한 공개처형도, 속살을 살짝 보였다는 죄로 여성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행위도 없다고 상상해보라"고 외친다. 「구름 속의 강Ⅱ-황금코끼리」는 매우 중의적인 작품이다. 성동훈은 "황금코끼리는 미국 공화당의 심볼이기도 하다"며 단지 이것이 종교적인 내러티브로만 흐르는 것을 견제한다. 미국의 보수적 인물들은 존 레넌의 노래를 부를 때 "종교 없는"이란 구절을 종종 빼고 부르거나 "한 종교가 있는"이라고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한다. 세계를 악으로부터 지키고, 선의 낙원으로 구원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메시아적 도취'라 해야 할까, 아니면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열반에 이른 부처를 닮았다고 해야 할까. 황금코끼리는 부처 앞에서 불의의 꿈을 꾼다. 「LOVE」는 세계의 모순이 결국 근원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대지적 형상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풍만한 여체 토르소는 '에덴'의 신화소로 작동한다. 최초의 땅은 어떠한 '악'의 요소도 갖지 않았다. 아름다움(美)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즉, 선과 악, 미와 추의 개념이 이곳에선 하나의 응결체일 뿐이다. 부처와 예수, 마야와 마리아를 구분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부처의 머리위에 서 있는 마리아상이 토르소 안에 있다. 더렵혀진 옷을 벗고 '사랑'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은 이렇듯 '잉태'의 씨알에서 찾아야 할 지 모른다. 『신화의 힘』에서 캠벨과 모이어스는 그 모티브를 이렇게 얘기한다.
캠벨 :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모이어스 : 낙원, 궁극적 실재, 천복, 환락, 완전성, 그리고 신으로부터 추방당한 상태를 산다는 느낌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느낌이었습니까? 캠벨 : 그럼요. 그때의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환희의 연속이었지요. 일상의 삶과 이 환희의 순간이 다른 점은 전자는 낙원 밖에서의 삶이고 후자는 낙원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고 하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 캠벨은 그 극복에서 '초월'의 의미를 상정한다. 그리고 죽음과 삶의 균형을 잡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양자는 한 사상(事象), 즉 '존재'의 두 측면이기 때문에. 「거북이의 꿈-vibration」은 종교의 신화소, 현실의 신화소가 솟아 오른 그 자신의 내부를 비춘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빗대어 '자화상'임을 강조하는 그에게서 그동안 변화의 부침을 가져 온 심연의 둥지를 보게 한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유머를 뺐다고 했다. 그런 다음 모든 화두를 뜬 구름 안에 넣었다는 것이다. 거북이는 입에서 토해내는 긴 나팔관을 가졌다. 나선형의 나팔은 모든 것을 흡입하고 뱉어낼 것만 같다. "거북이는 나를 닮았어요. 둔하고, 느리고, 묵묵부답이죠. 한데 거북이는 고대로부터의 동물이에요. 더딘 진화를 한 셈이죠. 제 작품의 초기부터 풍자적 동물로 등장했어요. 이번 작품에선 유일한 시멘트 작품인데, 형상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아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나머진 올해 다 만들었구요."
그의 작업은 여전히 노동집약적이다.「블루Ⅰ·Ⅱ」작업은 구슬 수 만 개를 꿰어 만든 작품이다. 「블루Ⅰ·Ⅱ」은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작품의 향방을 가늠하게 한다. 매스의 시각적 일루젼을 확보하면서 그 일체를 덜어버린 뒤 빛을 투과하는 전략은 조형의 맥락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꿈'이라는 강을 따라 흐른다. 그것은 절망이면서 희망이다. 그의 작품들은 밖이면서 안이다. 우리를 향해 그는 그 안을 보라고 말한다. 내부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 즉 그것은 예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절망의 원천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름은 한낱 꿈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린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이 꾸었던 백인의 꿈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김종길
Vol.20070908h | 성동훈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