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FA

정석희 회화展   2007_0905 ▶ 2007_0915 / 일,월요일 휴관

정석희_Sofa-Moon Light_리넨에 혼합재료_102×152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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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90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일,월요일 휴관

더 뉴게이트 이스트 서울 종로구 명륜4가 66-3번지 Tel. 02_747_6603 www.forumnewgate.co.kr

이번 전시의 주요 작업인 소파 시리즈에서 보여지듯, 정석희의 평면작품은 전형적인 회화라기 보다는 페인팅과 드로잉이 결합된 형식이며, 색채 또한 최대한 자제된 모노톤에 가깝다. 유화의 미끌거리고 끈적이는 느낌 대신에 목탄의 텁텁한 질감, 그리고 산뜻하고 화려한 색감 대신에 흑백 사진같이 차분하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대부분이다. 장면 또한 드라마틱한 순간이나 극단적인 상상의 이미지라기 보다는 소소한 일상의 삶이 반영된 차분함이 특징이다. 그가 10여년을 살았던 세계의 수도 뉴욕 조차도 낡은 벽과 눅눅한 공기로만 채워져 있는 듯하다. 작가가 몸담았던 도시는 삶의 주변을 일기처럼 반영하는데 몰두했던 작업의 주요 배경이 된다. 이방인처럼 스쳐 지나가듯 살았을 작품 속 도시는 정적이면서도 삶의 평온함과 불안함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러나 소파 시리즈와 더불어 전시된 소품에는 도시 속 인간의 희노애락이 보다 직접적으로 분출되어 있다. 흑 또는 백의 안료가 덮인 두터운 판을 긁어 만든 거친 인간상들은 소외와 절망, 타인에 대한 공격본능같은 현대인의 무의식이 투사된다.

정석희_Sofa-Father's Hometown_리넨에 혼합재료_102×152cm_2007

정석희에게 도시는 뿌리를 내리는 곳이기보다는 이 세상의 여행자처럼 왔다가 가는 곳일 뿐이다. 10년만에 돌아온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움에 대한 콤플렉스와 열망이 강해, 지표의 역사 자체가 급변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근자의 풍경화에 담아내기도 하였다.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소파 역시 그가 지켜본 도시같은 면모를 가진다. 작가는 우리의 인생이 소파에 잠시 앉아있다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작품 속 소파는 그위에 앉거나 누워있는 인간들만큼이나 익명적이다. 작품 속 인간에 이름과 얼굴 표정, 성(性)이 없듯이, 소파는 누군가의 취향과 손때가 묻은 친근한 소유물이 아니다. 묵상에 잠겨있거나 누워서 창밖 풍경을 바라볼 뿐인 익명의 인간에 비해, 소파 너머 창밖 풍경은 지정학적 정확성을 가지면서도 다채롭다. 정석희의 그림은 근본적으로 인물이나 정물이기 보다는 풍경화이다. 소파와 인간은 창밖 풍경을 위한 도입부에 불과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림 속 인간은 비록 유령처럼 희미하지만 그의 자리는 결코 주변적이지 않다. 그는 화면의 보이지 않는 중심을 형성한다. 그 인간은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현대를 살아가는 보편적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다.

정석희_Sofa-Woods with Humidity_리넨에 혼합재료_97×130cm_2006

전시 부제 'Sofa-세상을 보다'에 드러나 있듯이, 그의 작품은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라는 그림의 본질적인 역할에 충실하다. 창밖 장면들은 모두 그럴듯한 멋진 광경들이지만 막연한 상상의 풍경이 아니라, 작가가 과거나 현재에 보고 느낀 실제의 장소들이다. 가령 미국이나 한국의 도시, 공원, 숲, 들판 등이다. 인간이 있는 소파 뒤로 뚫린 거대한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변화무쌍한 풍경들에서 관객은 마치 대형 모니터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스펙타클을 볼 때처럼, 그 자리에서 시각적 여행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실내와 실외를 매개하는 공간인 창은 같은 크기의 캔버스 안에서 크기를 약간씩 달리하지만, 창 한쪽은 밖으로 통하고, 창위는 벽면으로부터 개방되어 있는 공통점이 있다. 풍경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으나 원근법을 확실하게 지킨 것은 아니다. 재현 자체가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단순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 창으로 건너다보는 현실은 르네상스 이후 강력한 문화적 관습이 되어왔다. 이러한 관습에 의하면 3차원 현실을 2차원의 평면에 고착시키기 위해 창문은 캔버스 면과 동일시된다. 창문 안쪽에서 바깥쪽의 세계를 바라보는 구경꾼은 빛이 미치는 범위만큼 세계를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세계와 눈은 일정한 거리를 전제한다. 이러한 거리의 확보를 통해 '세계상의 시대'(하이데거)가 시작되었다. 확실성과 명료함을 추구하는 시각은 근대 이후 주도적인 감각으로 부상한다. 이러한 시각의 헤게모니는 감각에 기반하는 예술보다는 이성에 기반하는 과학에 보다 적합한 것이었다. D. 주도비츠는 [데카르트 철학에서의 시각, 재현, 그리고 기술]에서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디자인의 요소로서, 합리적으로 규정된 질서로 이해했다고 지적한다. 그때부터 감각세계는 유령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었고, 이에 반해 이성은 환영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의 현실이 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올랐다. 여기에서 시각은 하나의 구성물일 뿐이며, 이 구성물의 회화적인 지시대상은 기하학적, 광학적 체계의 투사물이다. 이것이야말로 근대적인 의미에서 경험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이다.

정석희_Sofa-Behind Window_리넨에 혼합재료_97×130cm_2006

지성적인 거장 화가에 대한 데카르트의 요구는 회화를 모방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상징적 형식으로 재규정한다. 여기에서 자연은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도식이나 기하학의 설계 안에 놓여있다. 그것은 고전적인 미술이론이 되어 아카데미를 지배했을 뿐 아니라, 근대 기술과학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이 되었다. 정석희의 그림은 창문 넘어로 보이는 현실적인 풍경이라는 모티브만을 공유할 뿐, 이러한 환원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파도치는 대양, 비에 젖은 숲 같은 이미지는 낭만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한쪽 창틀을 위로 현실에 개방하여 인공적 틀로 완전히 한정지워지질 수 없는 현실을 지향한다는 점도 그렇다. 그러나 문예사조사를 살펴볼 때 낭만주의는 고전주의과 대비되곤 하지만, 대비되는 만큼이나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역설적인 매개고리가 정석희의 그림에서 발견된다. 그 중 하나는 지각(환영,상상)과 현실(이성,개념)의 구별--이것은 몸과 눈의 분리이기도 하다--이다. 표상의 질서를 구축한 데카르트의 방식은 오히려 예술과 과학의 차이를 분명히 해주었다. 명료함을 추구했던 데카르트는 과학 쪽으로 기울어져 환영을 거부했지만, 그의 세계관은 대상과 구별되는 주체의 탄생을 예고했고, 이 또한 예술이 닻을 내리는 바탕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 차이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 양자의 융합을 위한 진정한 토대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적 사고는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정석희의 소파 시리즈에는 대상과의 객관적 거리, 주체의 자리가 존재한다. 비록 그리기라는 것이 과학적인 눈만이 아니라, 온 몸을 투척하고 온 감관을 다 열어 놓는 작업이라할지라도, 기본적으로 회화는 '빛이 미치는 범위로 변형된 세계는 사적인 주관성의 방으로 점차 멀리 후퇴하는 주체의 대응물'(R. 로마니신)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적인 자아와 내적인 주관성이 탄생한다. 로마니신은 이 정신의 눈은 세계를 빛이 미치는 범위로 한정지음으로서 세계로부터 그 특질을 소외시키고 그 실체를 정화한다고 지적한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시각의 대상이 되고, 주체는 세계로 뚫린 창이 있는 전초 기지이자 망루인 작은 방에서 살아가는데 익숙해진다. 세계는 하나의 극장이 되는 것이다. 상상이 아닌 현실 풍경을 고집하고, 그 풍경과 거리를 두고 대면해 있는 방 안의 주체라는 이원적 구조를 가지는 정석희의 작품이 놓여지는 맥락도 이와 같다. D. 주도비치 역시 정신적인 눈이 통제하는 인지모델, 즉 주체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존재의 확실성을 드러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유행위와 보는 행위 사이의 구별이 제거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신적인 작가와 정신과의 일치가 발견되는 것이다.

정석희_Sofa-Dark Sea_리넨에 혼합재료_102×152cm_2007

어디든 볼 수 있는 뷰 파인더 같은 전지전능한 창틀은 또한 사진적 시점의 산물이다. 정석희는 한국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뉴욕에 가서 T.V와 비디오 등 커뮤니케이션 아트를 공부했다. 전시의 주요 작품인 소파 시리즈는 2002년부터 2005년 사이에 영상작업과 병행한 것이며, 영상작업이 깊이 침투되어 있다. 그가 찍은 사진 위에 그려진 소파가 있는 작은 작품 하나가 현재 작품에 대한 힌트를 준다. 작가가 살고 작업하고 즐겨 찾던 장소를 찍은 작은 사진들에는 그 상황과 맥락에 걸맞는 인간들이 마치 배우들처럼 역할연기를 하고 있다. 대부분 이국에서 고생하면서 외롭게 작업하고 살았을 젊은 작가의 자의식이 묻어나는 장면들이다. 사진과 드로잉이 중첩된 작품은 실제와 애니메이션을 병치한 작품으로 다시 변주되었다. 왼쪽에 애니메이션, 오른쪽에 실제가 배치되는데, 대부분 실제는 잘 움직이지 않는 상황을 보여주며, 움직임과 정지라는 상반된 구조가 좌우로 배열된다. 양자는 대조적 이미지를 가지지만 은유적 연결과 충돌을 통해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 영상은 보여질 때는 회화에 비해 매우 산만하게 흘러가지만, 제작의 입장에서 본다면 철저한 선적 구조--줄거리나 컨셉, 편집, 음향 등의 배치 기술 면에서--를 가진다. 특히 정석희는 애니메이션에 짧은 글을 넣어 자신의 컨셉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한다. 마치 그림일기같이 잔잔하게 그려진 영상은 자신이 처한 상황들을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표현한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서 영상의 흔적은 소파 뒤의 풍경이라고 말한다. 소파 시리즈는 거의 영상이 회화화 된 것이라고 해야할 듯하다. 그의 영상 자체에 풍경이 많이 등장한다. 빗소리, 바람소리 같은 자연적 사운드 등은 공감각적인 효과에 의해 다소간 뿌연 이미지들과 음울한 정서를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그의 그림에 영상이 깔려 있다면 영상에는 그림이 깔려있다. 단순히 그림같은 장면이나 그림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영상에 일종의 문자성literacy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하염없이 성서를 베껴 쓰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있다. 정석희의 영상과 그림은 마치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그림책 또는 그림일기 같은 느낌이 있다.

정석희_Sofa-My Hometown_리넨에 혼합재료_102×152cm_2007

R. 로버트 로마니신 [전제적인 눈과 그 그림자]에서 자아의식의 눈, 즉 책을 익는 독자의 눈은 탈신체화된 구경꾼spectator으로서 자아가 자신의 눈을 단일하고 고정되어 있고 세계에 대해 관조적인 것으로 유지하도록 만드는 역사적 순간에 생겨났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자아중심주의, 개인성이라는 개별적이고 분리된 단자 의식과 결부된다. 알베르티의 원근법적 실험이 세계를 하나의 기하학적인 격자로 다루고 일직선적인 관점 하에 재단하는 바로 그 무렵, 책이 고안되고 대량생산되었다. 기하학적 세계의 일직선성은 책이라는 일직선적 문자성과 상응한다. 문장에 문장이 이어지고 대사에 대사가 이어지는 책의 연대기적인 구조는 연속적이고 순서에 따라 일직선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근대 과학의 시간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개인의 주관성을 의식의 방으로 내면화하는 일은 독서라는 사적이고--이전에 독서란 곧 낭독을 의미하였다--조용한 행위로 가시화된다. 알베르티의 창문은 세계를 오직 그 눈이 미치는 범위로 만들어버린 구경꾼을 창조함으로서 이 프로젝트를 예비한다. ● 그것은 이 세계가 빛이 미치는 범위로 상상하는 단계로부터 세계가 광질료light matter가 되어가는 단계로의 변화이다. 영상 또한 하나의 광질료이다. 근대의 이원적 세계관이 역설적인 방식으로 주체와 예술의 탄생을 알렸듯이, 현대의 과학기술의 총아인 움직이는 뷰파인더 역시 꿈과 상상, 몸의 거처를 마련해준다. 그것은 이제 세계와의 안전한 거리를 타파하고 현실과 꿈, 자아와 타자를 뒤섞는다. 영상은 근대적 눈이 추방한 유령인 상상, 허구, 광기를 복귀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문자성 이전이 아니라, 문자성에 바탕하는, 그러나 문자 이후의 세계라고 할 수 있으며, 정석희의 작품이 위치하는 곳이다. 이러한 작업이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더 이상 문자문화나 감각의 조합으로만 질주하는 영상문화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회화와 영상을 동시에 전공하고, 양자 간의 내적인 관계를 지속적으로 실험해온 정석희는 회화와 영상이 더 이상 모순이 되지 않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키고자 한다. 문자성을 바탕으로, 그것으로부터 고양된 영상의 방식은 시각문화에 성찰적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 이선영

Vol.20070907a | 정석희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