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llurements

; 꿈꾸는 사물들, 꿈꾸는 이미지들   최선주 개인展   2007_0905 ▶ 2007_0910

최선주_Tightrope Dancing_캔버스에 혼합재료_135×18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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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905_수요일_06: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신관 1층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최선주가 제안하고 있는 일련의 그림들 속에는 온갖 사물들이 등장한다. 집이 있고, 교회가 있고, 침대가 있고, 소파가 있고, 가방이 있다. 이 사물들은 일상의 맥락 속에서 대개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실용적이기까지 한 어떤 기능과 연관돼 있기 마련이다. 때로는 쉼터로서의 기능을 떠맡기도 하고, 더러는 종교적인 예배의 대상이기도 하다. 편안한 수면을 유도하는가 하면,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물들의 기능은 다만 이 뿐일까. 사물들을 일상적이고 기능적인 맥락 속에서만 보면 다만 무표정하게, 그냥 그렇게 놓여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의 더께를 걷어내고 보면 사물의 이면이 보이고 내면이 보인다. 사물의 이면과 내면에 잠재돼 있던 이상적이고 의미론적인 성질이 어떤 표정을 머금고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이렇게 집은 친근하면서도 낯 설은 이중성을 드러내고, 교회는 유년시절에 들었던 풍금소리나 앞마당의 포석을 밟는 발자국 소리를 떠올려준다. 침대는 요람을 흔들어주던 누군가의 손을 상기시키고, 소파는 꿈꾸게 하며, 가방은 언젠가 본 듯한 이제는 기억조차 아득한 어떤 미지의 장소를 떠올려주며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처럼 그림 속 사물들은 이중의 결로 짜여져 있다. 일상적이고 기능적인 지층과 이상적이고 의미론적인 지층이 한 몸으로 중첩돼 있는 것이다. 이 중 사물에 잠재돼 있는 이상적이고 의미론적인 성질은 일상적이고 기능적인 측면과는 전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아예 그 차원이 다르기조차 하다. 일종의 일탈성으로 부를만한 그 성질은 사물이 일상 속에서의 기능을 상실할 때 더 잘 드러나며, 처음부터 이런 기능성이 희박한 사물들에게서 더 잘 드러난다.

최선주_The Cozyroom_캔버스에 혼합재료_55×79cm_2005
최선주_A chosen Vessel-01_캔버스에 혼합재료_30×30cm_2007
최선주_A chosen Vessel-02_캔버스에 혼합재료_30×30cm_2007

작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다른 사물들, 즉 새장과 구두, 거울과 향수병, 등불과 축음기, 그리고 특히 인형과 오르골이 그렇다. 저마다의 구체적인 기능을 가지고는 있지만, 이보다는 의미론적인 아우라가 훨씬 강한 사물들이다. 그 자체가 일종의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기호들이고 텍스트들이다. 새장과 구두는 가방과 함께 일탈성과 설레는 마음을 암시하며, 거울과 향수병은 나르시시즘과 자기반성적인 계기를 상징한다. 등불과 축음기는 라디오와 함께 종교적인 메타포를 상기시키며(어둠을 밝히는 빛과 신의 음성), 인형과 오르골은 꿈을 떠올리게 한다. 이 가운데 인형과 오르골은 아예 더 잘 꿈꾸게 하기 위해, 꿈을 돕기 위해 고안된 사물들이다. 잃어버린 것들, 상실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치유 불가능한 상처(트라우마)를 상기시키며, 꿈이 아니고서는 보상받을 길이 없는 부조리한 삶을 떠올려주며, 삶의 본질이 실은 결여와 결핍에 기초해 있음을 증언해주는 사물들이다. 화려한 꿈만큼이나 비루한 현실을 증언해주고,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는 꿈만큼이나 억압적인 현실을 증언해주는, 꿈을 도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스스로 꿈을 꾸는 기계들이다. 특히 인형은 사슴과 함께 작가 자신을 암시한다. 인형은 아기가 가지고 노는 친구이며, 아기 자신이며, 작가가 유년시절로부터 되불러온 자신의 얼터에고이다. 작가는 인형에다가 유년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투사하지만, 인형은 다만 꿈꾸기를 책망하는 현실원칙을 상기시켜줄 뿐이다. 인형은 인형일 뿐이며 꿈은 꿈일 뿐, 그 자체가 현실을 대신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슴은 미지의 영역에 그 발을 들여놓은 작가의 분신이다. 세상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고, 기껏해야 상처를 되돌려줄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꿈꾸기를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꿈이야 말로 비루하고 억압적인 현실을 건너가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선주_A bird cage_캔버스에 혼합재료_30×30cm_2005
최선주_Deer Hunting-02_캔버스에 혼합재료_90×150cm_2007

최선주의 그림은 이처럼 꿈을 꾸는 것 같고, 마치 작가 자신의 꿈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현실에 발붙이고 있기보다는 현실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느낌은 작가의 그림들에서 나타난, 사물들을 평면적으로 열거하는 방식과도 통한다. 즉 사물들이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맥락에서처럼 배경화면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배치돼 있다기보다는, 이런 관계로부터 동떨어져 마치 무중력의 공간 속을 부유하는 듯 붕 떠 있는 느낌이다. 사물들은 더 이상 중력의 제약을 받지 않을 뿐더러, 그 크기마저도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맥락을 벗어나 있다. 예컨대 집과 소파, 옷이나 가방, 그리고 침대가 어떠한 차이도 없이 서로 엇비슷한 크기를 부여받고 있다. 이처럼 배경화면과의 유기적인 관계로부터 일탈해 있는 사물들, 무중력의 공간 속을 부유하는 듯 붕 떠 있는 사물들, 그 크기가 엇비슷한 사물들, 중력과 원근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물들이 그림을 평면적으로 느끼게 하며,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으로 느끼게 한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느낌이 작가의 꿈꾸기와 통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꿈을 꾸면서 사물들을 공간 속으로 띄워 올리고, 무의식과 욕망을 풀어 헤치며, 현실을 비현실로 전이시키는 것이다.

최선주_Deer Hunting-03_캔버스에 혼합재료_160×115cm_2007
최선주_The Ventilation_캔버스에 혼합재료_115×160cm_2007

작가는 이 사물들을 직접 사진으로 찍기도 하고, 여러 매체들로부터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하고, 컴퓨터를 서핑하면서 캡처(captuer) 해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을 컴퓨터 속에서 합성한다. 이러한 합성 자체는 동시대의 이미지의 존재방식과 관련해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즉 동시대에 이미지의 존재방식은 더 이상 순수한 창조 - 일테면 무에서 유를 이끌어내는 식의 - 로서보다는 기왕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인용하고 (재)배열하고 (재)배치하는 식의, 소위 이미지의 소비방식이나 그 태도와 더 관련이 깊다. 이미지가 원래 속해져 있던 맥락으로부터 떼어내(탈맥락), 이를 다른 맥락 속에 집어넣는(재맥락) 식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세계를, 현실을 재구조화하고 재편하는 것이다(이런 재구조화와 재편의 방식은 특히 블록 형태의 이미지의 편린들을 조합해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한 작품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기왕의 이미지에 기생하여 그 이미지를 자기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이미지의 소비학과 기생의 논리에 바탕을 둔 동시대 이미지의 생리와 그 메커니즘을 반영하고 드러낸다. 화면에다가 먼저 일정한 마티에르를 조성한 연후에 그 위에다 이미지를 전사하고, 재차 가필을 통해 화면을 최종적으로 조율하는 식의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플랫한 느낌을 회화적인 물성으로 보완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화면에 드러나 보이는 사물들은 현실과는 다른 종류의 비전을 열어 보이는데, 마치 꿈속에서처럼 상호간 이질적이고 무관계한 것들이 자유자재로 결합하고 어우러진다. 일상성과 기능성을 벗어나 재맥락화된 사물들이 의외성과 예기치 못한 상황을 열어 보이는가 하면, 작가 개인을 넘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돼 있는 무의식과 욕망을 엿보게 한다. ■ 고충환

Vol.20070906e | 최선주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