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50901a | 구성연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829_수요일_06:00pm
쌈지길 갤러리 쌈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38번지 쌈지길 내 아랫길 Tel. 02_736_0088 www.ssamziegil.co.kr
갤러리 쌈지에서는 일상적 오브제들의 낯선 결합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정물 시리즈와 실내장면을 연출, 촬영한 사진 작업을 하여온 구성연 작가의 여섯번째 개인전을 열고자 합니다. 본 전시에서 구성연은 나뭇가지 끝에 팝콘을 하나, 하나 붙여 마치 눈꽃이나 만개한 매화 등을 연상 시키는 장면을 연출하고 이를 촬영한「팝콘」시리즈 신작을 선보입니다. ● 피사체를 제외한 화면의 배경색이 회색, 분홍색, 파란색으로 나누어지는 이번「팝콘」시리즈는 시각적인 면에서 전형적인 전통 동양화의 구도와 절제된 색감으로 마치 한 폭의 매화가 그려진 사군자를 연상시키며, 관객들에게 배경색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계절감을 유발합니다. 팝콘과 나뭇가지라는 생경한 조합처럼 구성연의 이번 신작 시리즈에서는 절제된 이미지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상상력과 특유의 미장센을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쌈지길
미의 평범성, 혹은 화사한 죽음-구성연의 '예술적 피사체' 사진 ● 달걀노른자가, 냄비에든 흰죽이, 한 공기의 쌀밥이 특별할 리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늙은 오이가, 순대가, 두부가, 팝콘이 특별한 미적 경험을 유발할 것이라 기대하는 이가 있다면, 그/녀는 매우 비범한 상상력을 지녔거나 '일상의 미학' 운운하며 상품의 심미화를 조장하는 광고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들은 굳이 '미적'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이는 측이 속물처럼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또 굳이 사람들의 감각기관 앞에 제시해서 심미적 가치판단을 요구하기에도 어딘가 민망해 보이는, 지나치게 날 것 상태에 가까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사물들은 문화적 변용과정의 수준에서 맨 밑에 속하거나(자연 재료) 그 언저리의 것들(조리된 음식)인 것이다. ● 그래서 작가 구성연은 묘책을 쓴다. 범속한 날 것 또는 그 상태에 가까운 사물들에 작가의 '예술적(artistic)' 손길을 '과잉되게' 가하고, 그것을 사진이라는 매체로 이미지화 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하면 '속물스러울 짓'을, 말하자면 노골적으로 형식화함으로써 예술이 되게 한다. 가령 계란프라이의 노른자위 속으로 흰색 나비의 날개를 절반쯤 잠기게 한다든가, 주발에 든 밥의 표면을 푸른 유리조각들로 뒤덮는다든가, 순대에 유리 뿔을 달아줘 승천 못한 이무기로 변신시킨다든가, 팝콘 알갱이들로 매화 내지는 벚꽃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를 흉내 낸다든가. ● 이렇게 사물을 조리하는 구성연의 인위적 액션은 물론 자신의 사진예술을 위한 '작업'에 속하지만, 서두에 슬쩍 지나가듯이 언급한 광고인들 또한 이와 비슷하게 작업한다. 광고의 수사와 미장센과 제스처를 통과한 모든 종류의 '상품 화보'가 그렇듯이 구성연의 사진들은 매끈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이미지적이다. 사물/사태는 녹록찮은 조형적 수사에 의해 새로운 형과 질로 각색되고, 어떤 즉물적 상태도 용인치 않는 미장센에 의해 문화적으로 세련된 의미 지대로 들어서며, 시각이미지 세계의 문법적 코드를 따르는 제스처를 통해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성연의 사진이 광고사진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 작가의 '예술사진'을 '광고사진'과 결부시키는가? 이유는 구성연의 사진이 '자본주의 사회의 꽃'이라는 광고의 이미지가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은폐하고자 전전긍긍하는 '무엇'을 그와 닮음의 관계 속에서 누출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광고가 숨기고자 하는 그 '무엇'은 자신이 '광고'라는 점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실재적인 것도 생산하지 않고 오로지 잠재적 구매자의 소비욕망만을 부추기는 '자본의 시뮬라크르로서 이미지를 판다'는 사실을 광고는 감추고 싶어 한다. 그 소비의 욕망이 광고를 보는 이의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처럼 오인(誤認)시키기 위해서. 그 숨김을 위한 테크닉으로 광고사진은 피사체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인공적 손질을 가하고, 현실이 제거된 매끈한 공간에 놓는다. 대부분의 광고사진이 상품을 배경이 제거된 단색조 평면 공간에 놓는 이유가 거기 있다. 작가가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구성연의 사진은 외적으로 이러한 광고사진과 매우 닮아있다. 그리고 기법에 있어서도 광고사진에서 피사체-상품을 다루는 테크닉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런데 구성연의 사진은 광고와는 달리, 그 이미지 자체가 시뮬라크르임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의 프레임 안에 고정된 모든 사물 · 모든 사건이 실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하이퍼리얼(보드리야르의 의미에서)'이라는 사실을 전면화한다. 구성연의 사진은 우리가 여전히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사진의 자명성, 즉 실재를 재현한다고 하는 사실을 뒤집어 사진 속에서 재현되는 실재란 결국 '보고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기술적으로 조성한 선택적 이미지일 뿐임을 인정한다.
그녀가 이제까지 작업한 사진작품들을 일별하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피사체가 모두 반(反)자연 상태로 다듬어져, 무색무취의 공간에 놓인다는 점이다. 서두에 예를 들었던 사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가정집의 실내공간을 찍은 사진들(「화분」)에서도 우리가 보는 것은 리얼리티가 아니라 '인공적 리얼리티(artificial reality)'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짙은 녹색의 담쟁이 넝쿨이 어린아이의 침실, 잘 차려진 식탁, 전문서적이 빼곡히 들어찬 서재, 호사취미의 중산층 가정 거실 표면에 끔찍할 정도로 달라붙어 그 안락함과 풍요를 잠식하고 있는 이 「화분」시리즈 사진들은 한 눈에 '만들어진 풍경 사진'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이 '만들어진 풍경'이 드러내는 것이 곧 '하이퍼리얼'이다. ● 팝콘이 매화 또는 벚꽃처럼 피어있는(아니, 사실은 매달려 있는) 구성연의 최근 사진들은 언뜻 보면 현실의 꽃나무를 모방한 것처럼 보인다. 또 형식상 조선시대 사군자인 매난국죽(梅蘭菊竹) 중 매화도의 패러디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이 '팝콘-꽃' 사진은 현실의 특정 꽃과도, 문사취미의 매화도와도 '상징적' 관련성이 없다. 그녀의 '팝콘-꽃' 사진에서 그 '꽃을 닮아 보이는 형상'은 이 글에서 그것의 지시어가 '매화'에서 '벚꽃'으로 갈팡질팡해야 할 정도로 정체 없는 것이고 현실의 어떤 사물로 규정될 수 없는 가상이다. 또 회색조의 기품 있어 보이는 배경 위로 봄날의 꿈처럼 아련하게 떠 있는 이 '꽃을 닮은 가상의 형상'은 시각적으로는 분명 문사의 취향을 자극할 테지만, 상징적 질서의 차원에서 사군자의 절개(切開) · 청렴(淸廉) · 청빈(淸貧) · 호방(豪放) 등등과는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팝콘 알갱이들은 평범한 섭취의 용도성에서 벗어나 미적 사물이 되어 있으나, 그 미적 사물은 자연의 어떤 꽃과도 친족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인공의 미적 사물이다. 그러나 또한 이 인공의 미적 사물은 기존 전통의 상징적 기표를 차용하면서도 그 속에 어떤 상징적 질서의 기의도 담지하고 있지 않다. 그러한 기대를 오히려 배반한다는 점에서 말의 직설적 의미에서 '無-의미', '無-가치'의 사물이다.
구성연 사진의 이러한 현상들은 보드리야르 같은 이가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하이퍼리얼'과 '시뮬라시옹'이라는 단어로 요약했던 바에 근접한다. 다만 다른 것은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는 이 현상들이 후기 자본주의 시대 미디어가 주도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황홀경,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부리는 마술, 광고의 마법적-물신적 환등상(Phantasmagoria)이라면, 구성연의 사진에서 그 효과는 작가의 과잉된 '예술적 제스처'에 의해, 눈에 뻔히 드러나는 모방과 차용의 전략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성연의 '팝콘-꽃' 사진은 실재를 사라지게 하는 시뮬라크르인 것이 아니라, 그 시뮬라시옹을 누출하는 시뮬라크르이다. 이를테면 '팝콘-꽃' 사진은 매화 · 벚꽃과 아무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문인화의 매화도와도 아무런 정신적 관계가 없는 순수한 가상이미지임을 표방하는 데서 더 나아간다. 그 순수한 가상이미지라는 것이 제스처에 의해, 미장센의 전략에 의해, 코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매체 이미지, 키치이미지, 상업적 이미지의 정체가 실재의 '화사한 죽음'임을, 그와 닮은 사진이 생중계하는 것이다. 혹은 지금 우리시대 '미'라는 것이 얼마나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는지, 얼마나 공허한 것이 되어버렸는지 예술작품의 수준에서 토로하는 것이다. ● 미술세계가 '아트 마켓'이 전부인 것처럼 작동하는 투기자본의 새로운 성전(聖殿) 한국 미술 판에서 고급예술/대중문화, 미적인 것/상업적인 것, 여기서는 특히 예술사진/광고사진 사이에 처진 빗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이 빗금을 타파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혹은 어떤 작가의 작품이 그 위계의 빗금을 해체했기 때문에 '예술적'이라고 광고-비평한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짖고, 그렇게 비평을 가장한 광고를 유포하는 사람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권력적 · 상업적 담벼락이 바로 또 그 위계의 빗금이다. 그 빗금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예술작품은 안전하게 예술작품으로 승인받을 수 있으며, 도처에 넘쳐나는 미의 평범한 사물보다 우월적 지위에서 고가에 매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성연의 사진 또한 아마도 이 빗금의 정치학 모델 중 하나에 위치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그에 대해 비평하는 이 글은 구성연 사진이 그 위치에 있지 않다고 증명해주는 알리바이 보증서 같은 것으로 읽힐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가, 이 글의 필자인 내가 포기해서도, 인정해서도 안 되는 지점이 있다. 포기해서는 안 될 지점은 예술이 정신적 · 감각적 실재라는 점이며, 인정해서는 안 될 지점은 예술에 더 이상 비판적 인식 · 비평의 담론 · 특수한 미적 경험의 추구가 무의미하다는 거간꾼들의 사이비 광고이다. 구성연 사진의 '예술적 피사체들'이 그러한 지점의 파수꾼들은 될 수 없겠지만, 그러한 문제적 지점을 환기시키는 촉매제일 수는 있다. 이 글이 밝혀보고자 했던 것은 시뮬라크르의 외양을 한 그 촉매의 잠재력이었다. ■ 강수미
Vol.20070903c | 구성연展 / KOOSEONGYOUN / 具成娟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