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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822_수요일_05:00pm
가나아트갤러리 기획초대전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Border Life ● 김지혜는 '책가도'의 테마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업을 통해 한국화의 전통을 새롭게 이어가는 신세대 작가로 평가받아왔다. 책가도는 책과 관련된 정물들을 그린 조선시대 민화로서, 방을 장식하는 기능과 더불어 자신의 소유물을 과시하고자 하는 사대부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점에서 책가도는 한 시대 특수한 사회 계급의 문화적 태도를 드러낼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이다. 그것은 일상적 범주와 세속적인 욕망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자연풍경을 그린 산수화보다 현실에 더 밀착되어 있다. 책을 소재로 다루기 때문에 문인들의 고급문화를 투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문화의 기표만을 모방하여 확대 재생산하는 키치(kitsch)이다. 작가미상으로 그려지는 책가도는 책을 중심으로 문방사우, 화병 등 몇가지 유형적 모티프들이 수요자의 취향에 맞게 변경되고 첨삭되며 형성되어왔으며, 작가 중심이 아니라 수용자 중심의 문화적 기반 위에 놓여져 있다.
김지혜의 현대적인 책가도는 전통적인 책가도의 구성을 차용할 뿐 아니라, 책가도에서 문화적 기표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작가의 독창성 보다는 다양하게 조합되는 기물들의 세계에 중점을 둠으로써 보다 범속적인 범주, 현대 소비사회에서는 '대중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문화의 범주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상업미술의 감각을 반영하는 색감과 도안적 구성,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기물들의 유형화를 통해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깊이와 붓자국을 배제한 채 그래픽적 방식으로 칠해진 화면들은 관람자의 시선을 하나의 구획 안으로 집중시키기보다 표면 위로 미끄러지게 만든다. 더욱이 책가도 구성의 역원근법은 서양화의 원근법과 뒤섞여 한층 더 복잡한 시각적 일루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다차원적 이미지들이 의미 없는 기표로서 부유하는 대중문화의 아우라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김지혜의 작업에서 특별히 시선을 끄는 것은 책장의 칸을 이루는 격자들이다. 사각형의 구조는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방을 연상시키는 형식이다. 실제로 그의 2003년 개인전 작품들을 되돌아보면, 대부분 방 안의 공간을 다루고 있음으로써 책가도의 출발점이 실내 정경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내의 일상과 관련된 물건들은 민화의 색감과 패턴화된 문양으로 변형되면서 책가도의 격자 구성 안으로 이동하고 있다. 최근의 책가도 연작에서도 거실, 화장실 등의 이미지들이 책장 안에 삽입되어 책가도이자 정물화이자 실내풍경화인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그 안에서는 전통적인 책거리 그림 도상에서 차용한 이미지와 함께 핸드폰, 스타벅스 커피, 알약과 같이 현대를 살고 있는 작가 자신의 필수 소비품들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작업은 어딘지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기생 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계급적이고 자존적인 여성 문화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아마도 문인화적 전통에 대한 거부와 권위적인 상층문화의 파기, 여성적인 실내 기물들에 대한 애착, 아크릴 물감의 현란한 색감과 의도적인 장식성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지혜의 작업이 이 '규방'과 같은 공간을 통해서, 미술의 역사에서 실내정경이 담보해온 제도순응적인 측면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의 모체가 되는 권위적 문화를 파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지혜의 작업은 제도적으로 안착된 맥락 안에 있으면서도 기득권 바깥에 있는 하위문화의 지대를 향하며, 바깥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실내에 밀착되어 있다. 규방 안에 있는 동시에 바깥 세계에 속해 있는 이 특수한 접점이야말로 김지혜의 작업을 이루는 주요한 특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의 제목이 'border life'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경계'와 '삶'의 조합어인 이 단어는 'still life'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경계에 있는 일상의 특수한 영역을 표상한다. 이 기묘한 경계의 지대는 작가 자신의 심리적 경계인 동시에 현대 소비사회 속에서 우리가 서있는 복합적 문화의 경계이다. 그 위에서 안락한 규방의 영역은 바깥 사회를 투영하는 거울이 되고, 과거의 책거리 그림은 현대 소비사회의 풍속도가 된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산수화 모티프의 새로운 등장이다. '미채산수(迷彩山水)'라고 이름 붙인 이 연작들은 서울 근교의 산들이 많은 부분 군사 보안지역에 속해있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이다. '미채'란 위장을 위해 사용되는 카무플라주(camouflage) 이미지를 의미한다.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된 군사지역의 산들은 멀리서 보면 전통 산수화에 나오는 산처럼 평온하고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현대의 위태로운 정치 현실이 지배하는 장소로서 과거의 산과는 다른 차원에 속해있는 공간이다. 김지혜는 전통 산수화의 형식을 차용하면서 그 안에 현실의 위장된 산수풍경을 끼워 넣는다. '미채산수' 속에서 전통적인 관념 산수와 오늘날의 진경인 카무플라주 산수는 시간을 관통하는 기이한 인접지대를 형성하며 공존한다. 여기서 주지할 점은 산수풍경이 창틀을 통해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틀은 실내공간과 그 밖의 공간을 구분하고 연결짓는 경계면이면서, 캔버스 내에서 산수풍경을 다시 구획해주는 프레임 역할을 한다. 책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격자틀은 전통 한국화에 현대적인 메타-회화의 개념을 부여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김지혜의 작업 속에서 이러한 틀은 작가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것이 바로 안과 밖, 과거와 현대, 관념과 현실의 경계면인 동시에 그 범주들을 관통하는 'border life'로의 진입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은주
Vol.20070823f | 김지혜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