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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810_금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 2007_0627 ▶ 2007_0703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미추홀 갤러리 / 2007_0810 ▶ 2007_0816 인천시 남동구 문화회관길 80번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內 Tel. 032_427_8401~5 art.incheon.go.kr
가면의 숲에 흐르는 충족될 수 없는 욕망 ● 2006년 개인전 이후 차경진은 끝없이 불타오르는 작업에의 열망을 안고 다시 6개월 동안 작업실에서 나무와 금속조각들을 이어 붙여 나갔다. "숲의 욕망(Desire of the Forest)". 지난해 개인전의 주제를 "실존의 그림자"로 삼았다면, 이번 개인전의 테제를 '숲의 욕망'으로 설정하고 풀어나가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개인전은 실존과 욕망의 문제가 동시에 융합된 이중주곡(二重奏曲)이라 할 수 있다. 실존이 개인의 주체성과 존재확신의 구체적 증거라고 했을 때, 그의 가면 연작들은 잠재된 자아의 페르소나이자 실존의 각인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페르소나(persona)는 그리스어에서 연유된 말로, '외적 인격' 혹은 '가면을 쓴 자아의 또 다른 이미지'를 의미한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사람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그림자와 같은 페르소나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 내지는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융은 자아(ego)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차경진이 실존에서 욕망의 문제로 조형적 사유를 이전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면이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이론가 자크 라캉(Jacque Lacan, 1901-1981)은 "주체는 결핍이고, 욕망은 환유(換喩, metonymy)이다."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주체는 대상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결핍을 완전히 채워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을 얻어도 욕망은 여전히 남으며,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상태는 죽음뿐이라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라캉 역시 동조한다. 라캉은 욕망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대상은 실재처럼 보였지만 허구였기 때문에 실재라고 다가서는 과정이 상상계(the imaginary)이고, 그 대상을 얻는 순간이 상징계(the symbolic)이고, 여전히 욕망이 남아 그 다음 대상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실재계(the real)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캉은 욕망은 기표이며,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기는 텅 빈 연쇄고리라고 보았다. (자크 라캉,『욕망이론』, 권택영외 역, 문예출판사, 1996, pp.13-19.) 이런 논점과 관련하여 차경진이 실존의 그림자이자 자신의 페르소나로서 가면 연작들에서 욕망의 문제로 옮겨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주체의 결핍이 그 대상으로 자리를 바꾸는 전치(轉置, displacement) 혹은 환유의 구조화 과정이란 결국 주체형성의 거울단계(mirror stage)인 상상계에서 사회적 자아를 인식하는 상징계를 거쳐 욕망의 허구성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실재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따라서 차경진이 이번 개인전에서 욕망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 것은 실존적 자아를 확인하기 위한 무의식으로의 잠행이자 불행한 기억과의 화해를 모색하려는 태도일 수 있다. 특히 그가 상정한 주제에서의 '숲'은 일종의 사회적 전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의 기억 속에 파편화된 고통, 애증, 고립 등과 같이 내면에 잠재된 불편한 기억의 나무들을 정렬화하려는 의도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숲은 검은 빛으로 출렁이는 울창한 밀림과 같다. 그 숲은 또한 차경진의 기억 속에 유폐된 가난과 학대의 기억들, 눈물 속에서 피어난 욕망의 그림자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는 주름진 영토이다. 그래서 그의 이번 개인전은 그런 숲에 깃들어 있는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기억들과의 화해하려는 시도이자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흔적들을 불러내어 씻김굿과 같이 진혼하려는 살풀이인지도 모른다.
차경진의 조각작업이 갖는 주요한 형식적 특징은 '가면형태와 집적(集積, accumulation)'이다. 그가 가면의 형태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가면에 천착하는 이유는 가면이 본질적으로 존재의 이면에 억압된 양면성을 드러내 주기에 인간 내면의 복잡한 드라마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적합한 매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상 가면은 원시시대 이래로 인간의 본성을 감추고 신과 교통하거나 집단무의식을 대리하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인간 삶의 허무성과 절대자에 대한 외경심을 피로 헌사했던 페스티벌의 기원 속에도 가면은 존재했고, 언캐니(uncanny) 개념의 한 켠에도 가면은 초월적 지위 혹은 절대적 권위를 부여받기도 했다. 그러나 차경진에 있어서 가면은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의 파편들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려는 의지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어쩌면 그의 가면 연작들은 유년기에 겪여야 했던 교통사고로 인한 지울 수 없는 상처의 어루만짐이자, 자신의 어머니가 재봉틀을 통해 씻어내고자 했던 삶의 한(恨)을 반추하려는 반복충동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그의 가면은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은닉된 과거의 상처를 '보여짐(gaze)'의 단계로 이끌어 내려는 사회화의 과정이며 이로써 '바라봄(view)'의 거울단계에서의 탈피를 모색하면서 '희열(jouissance)'의 지점을 지향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희열의 단계는 결국 차경진의 가면들이 조각조각 이어지는 가운데 자신이 자화상이 되고, 이러한 작업과정을 통해 상처의 치유를 경험하고 그것은 다시 타인과의 소통을 모색하는 것으로 나아가면서 새로운 의미의 연쇄가 가능해 진다. 「나에게 외치다」,「떠도는…」,「남겨진…」,「하나 아닌 둘, 둘 아닌 하나」,「바람되어」와 같은 제목들은 차경진의 주체적 자각인 동시에 타인과 소통하려는 공존의 목소리들로 되새겨진다. 이처럼 그의 가면들은 욕망의 허구성을 깨닫는 지점에서 여전히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새로운 대상을 찾아나가려는 기표들이며,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끝없는 반복적 고행의 발걸음인 셈이다. 욕망의 완전한 성취 혹은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 상태는 죽음밖에 없다는 인식에 이를 때, 우리는 욕망하는 것만이 실존일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차경진의 가면연작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거울에 비친 욕망의 얼굴이며 상처 입은 영혼의 현존(現存)이다.
다음으로 집적의 문제는 앞의 가면 연작들과 함께 단위들의 반복적 결합을 통해 구축된 목조작업(숲의 욕망)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폐자재로 버려진 나무들을 모아 수천개의 피스못과 너트와 볼트로 엮어 가면의 형식으로 구축한 그의 나무작업은 가면 연작들과 마찬가지로 단위 조각들을 결합시켜나가는 집적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차경진에 있어서 집적은 파편화되었거나 개별화된 사물들이 가진 생의 자취, 흔적, 궤적들을 전체화하여 새로운 의미를 파생시키는 것과 관련된다. 기표는 단 하나의 기의에 머물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낳게 되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집적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미의 연쇄공간이 된다. 그의 나무조각들이 집적된 목조작업은 실공간과 허공간이 단지 실물과 배경공간으로 역할하는 보족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허공간이 주체화가 되는 주객전도의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바라보다」나「내안의 풍경」과 같은 설치작업에서는 실공간이 허공간을 위한 조연의 위치로 도치되고 있다. 차경진의 이러한 형태적 실험은 내면과 외면, 진실과 거짓,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 의식과 무의식과 같은 개념들을 대립적 관계항으로 두지 않고 상호연결적인 것으로 보려는 태도를 엿보게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그의 금속조 혹은 목조로 이루어진 가면들은 화해와 이해, 긍정과 치유의 지평을 향한 내면의 울림들로 다가선다. 차경진의 이번 '숲의 욕망'전은 라캉이 언급한 욕망의 구조처럼 환유적이다. 숲이 역사, 과거, 사회와 같은 새로운 기의로 부상하는 의미의 언덕에서, 문득 그의 가면 연작들이 충족될 수 없는 욕망들 사이로 바람처럼 가볍게 그의, 아니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듯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희열의 문, 그 쥬이상스의 빈 공간 너머로 언캐니한 그의 가면들이 또 다른 욕망을 바라보고 있다. ■ 장동광
Vol.20070810b | 차경진 조각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