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7_0808_수요일_05:00pm
바움아트갤러리 서울 종로구 원서동 228번지 볼재빌딩 1층 Tel. 02_742_0480
삶의 본질을 직시하는 '감성'의 힘과 '흥'의 여운 ● 종종 우리의 삶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물음을 던질 때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술의 부가적 기능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예술 그 자체는 어떠한 경제적 생산에도 기여하지 않는다. 쌀 한 톨 생산하지 않는 예술 활동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예술은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수사(修辭)의 힘은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그리고 로고스(logos)의 결합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즉 상대를 설득하는 말의 기술인 수사는 인격과 감성, 이성의 조화를 통하여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적 가치관은 예술활동에 있어서까지 빈틈과 혼돈, 어둠, 감성의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몰아냈다. 심지어 자본의 욕망은 비가치 혹은 가치를 떠난 가치의 세계를 다루는 '파토스'의 세계조차 조작된 감정으로 왜곡시킨다.
김현지는 '파토스'의 신화가 사라진 시대, "사물에 대한 인간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이성과 가치의 시대에 다시금 '파토스'의 신화를 인식표현의 방법론으로 삼아 감각 너머의 세계를 탐험한다. 다만 그의 '파토스'는 에토스의 파탄으로부터 파생하는 불길함이나, 어둠과 고통의 심연, 일시적이며 가볍고 유치한, 타락과 파멸의 경박한 충동이 아니라, 논리나 이성의 틀 안에서 볼 수 없는 총체적 인식에 기초한 감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김현지는 시간이 거세된 무한한 직선의 공간인 논리와 이성을 배제하고, 현실의 시공간과 감성의 예술적 상상을 통하여 삶이 살아 생동하는 '생생불이(生生不已)'의 본질을 직시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철저하게 '흥'에 따라 움직이고, 리듬에 따라 반응한다. 그의 작업에는 미리 계산된 이미지 없다. 단지 행위의 몰입만이 있을 뿐이다. 물과 붓의 작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선지 위에서의 그 행위만이 그의 작업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특정한 주제와 소재가 없는 오직 붓과 안료와 종이의 찰나의 만남이 만들어 내는 의도되지 않은 형상은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의식의 심연을 향해 있다. 질료가 만들어 내는 본연의 세계, 이성적 가치가 투영되지 않은 순수의 세계를 향한 몸짓에서 그는 의식 너머 본질의 세계를 맛본다. 잠재의식에 의한 것도 아니고, 깊은 내면의 반성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심미적 주체가 마음과 마주하는 순간의 접촉에 집중한다. 논리적 여유가 끼어드는 순간 가상(假像)을 만들어 내는 의식을 최대한 배제한 채, 찰나의 느낌만으로 '자연'의 '진정성'을 보장하려 한다.
순수하고 명징한 명상의 세계, 선지 위의 채색과 행위가 만나 흔적을 만들어가는 물소리, 그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맛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단지 표제일 뿐, 그의 작업이 향하는 궁극은 그 너머에 있다. 인위적 판단에 앞선 형식의 구현, 그는 색과 선 같은 시각적 리듬감과 운율로 조형적 요소에 의지하여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고, 형식을 구현한다. 그에게 있어서 인위적인 선택의 과정은 다만 작품이 끝난 후 작품의 성패를 결정하는 순간 뿐이다. 철저하게 '파토스'의 감성에 의해 진행되는 그의 작업 과정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일찍이 누군가 토마스 만에게 왜 『요셉과 그의 형제』와 같은 신화적인 소재로 작품을 쓰느냐고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반문으로 대답을 했다. "바다에서 배가 한 쪽으로 기울었는데,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 ● 파토스와 로고스는 분리될 수 없다. 합리적 이성이 세상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사상의 체계라면 감성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체계이다. 이 두 체계의 차이는 방법론적인 것일 뿐이지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다. ■ 김백균
Vol.20070809b | 김현지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