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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803_금요일_06:00pm
Kunst Doc 기획展
갤러리 쿤스트독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02_722_8897 www.kunstdoc.com
낯설음에서: 무엇에 대하여 낯설다거나 익숙하다고 하는 것들은 촉감과 무게를 갖는 덩어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의 작용이다. 이 의지의 작용은 숭고한 존재와 영감을 주고받는 고결한 지적지성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직접적이고 충동적이기까지 한 감각의 갈래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신경이 반응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동시에 자극하고 있는 주변의 세계로 자신의 시선을 던지게 되는데 외부로부터의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에서 출발한다. 다르게 말하면 몸이 먼저 말을 걸고 홍채의 지문이 대상으로 각인되는 매우 생생한 체험으로 이것은 기억의 주머니에 쌓이게 된다. 기억의 주머니는 서로를 꿰는 사슬의 구조로 되어 있어서 시선의 체험은 특별한 대상에서 비롯되는 특별한 시선의 체험인 것으로 특별한 대상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될 때 시선의 체험은 일상적인 일과로 되돌아가게 된다. 지극히 익숙한 대상으로서의 공간은 집이라는 장소로 그 가시적 실체를 구체화시킨다. 이 집은 단순히 우리가 살고 있는 가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선과의 사연이 끈끈한 거미줄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집으로부터(집 드로잉): 따라서 집은 낯설지 않는 장소다. 집이 낯설지 않기 위해서는 시선의 연결고리가 필요한데 이것은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난다. 그 사물은 기억의 주머니 역할을 하여 주체의 시선을 유혹하고 주체의 사고에 개입하게 된다. 어떤 이들에게는 지하철이 자신들의 집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회사 사무실이 자신들의 집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포함하여 제 이의 집으로, 어머니의 배속이 되는 제 일의 집과 대조를 이룬다. 제 일의 집은 원래부터 하나이어서 눈동자가 있어도 눈이 감겨 있고 손가락이 있어도 아픔을 모르는 시선과 대상이 구분 없는 영역이다. 단지, 탯줄이 기관과 기관을 연결해주고 경험이전의 교감이 그곳을 빠져나온 밝은 하늘 아래서도 향수되고 있다. 반면, 제 이의 집은 늘 거칠게 던져져 있고 익숙해져야만 하는 비교우위의 친밀감이다. 그곳엔 구조화된 집처럼 구조화된 언어가 있어서 이것으로 서로 익숙해지면서 서로에게 다리를 놓는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모든 언어는 접속사다. 접속사는 재현의 다른 형식으로 이념이 현실화될 때 이미지로 현현하거나 재현되는 것처럼 접속사는 의미를 가시화 시킨다. 넓은 시각에서 이미지와 언어는 서로 다르지 않다. 그 까닭은 원래 언어의 꼴이 비가시적인 이미지인 이념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며 문자라는 것 역시 이미지로 아로새겨진 도장과 같기 때문이다. 예술범주에서 언어와 이미지는 조형언어로 설명된다. 한 예로 스케치나 지도는 외부의 낯선 세계를 익숙하고 용이하도록 하기위한 시선의 기록이다. 그 드로잉 선을 따라가 보면 깨닫게 되는 사실이 대상으로 다가갈수록 시선의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는 꼴이 되고 결국, 사적인 장소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감각적 의지의 활동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의 작업활동으로 미적담론의 명분을 획득하게 된다.
끈(실): 그 획득하게 하는 끈은 집에 대한 관심이다. 거꾸로 표현하면 시선은 보이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사실의 존재시성*이다. 즉,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그 공유하고 있는 시간의 기원이 그 속에 소속되어 있는 여러 갈래의 지평들의 통일성에서 투사된 것으로부터 주체가 되는 시선의 자유로운 확인 작업으로 미적담론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미적담론화가 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확인 작업을 하고 있는 시간의 궤적을 가시적으로 보여줘야 하겠고 다른 한편으로, 시선과 대상이 맞부딪히는 지점에서 시선의 경험이 언어화 되어 그 전체의 풍경이 이미지로서 읽혀질 때다. 그것은 지각의 끈이다. 여기에 정혜승의 작업이 놓여 있다. ■ 김용민
Vol.20070803b | 정혜승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