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dise in Seoul

박홍순 사진展   2007_0727 ▶ 2007_0916

박홍순_Paradise-in-Seoul-#002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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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727_금요일_05:00pm

성곡미술관 별관 1층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02_737_7650 www.sungkokmuseum.com

어디에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유토피아-박홍순의'주변부 한강'사진들 어느 IT 업계 프로그램 개발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는 한 여자의 꿈은 '남자친구와 함께 노을 지는 한강을 바라보는 일'이다. 살인적으로 강제되는 노동시간, 각종 피곤하고 숨 막히는 '한국형 삶'의 조건에서 헤어나기가 악몽보다 힘들다는 사실에 잔뜩 주눅 든 이 사람의 꿈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소박하고, 지나치게 구시대적 낭만으로 들릴 것이다. 그렇다. '슈퍼 울트라 하이 테크놀로지'를 구가하는 "IT 강국 한국"의 현재에, 그것도 IT 프로그램 개발자의 애인이 꾸는 꿈이 기껏해야 낙조의 한강 구경이라니! 그러나 이 평범하다 못해 촌스러워 보이는 소망 한 조각이 '겁나 먼(far far away) 왕국'의 권좌보다도, 지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u-topia) 유토피아의 과실보다도, 취득하기 어렵고 맛보기 힘든 것이 '한국형 삶'의 실상이다. 우리는 매일 이러한 숨 쉬기도 곤란한 삶의 조건을 감각으로 느끼며 살지만, 그것을 인식의 수면 위로까지 끌어올리지는 않는다. 체감 못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실상의 전모를 자각하는 일마저도 끔찍할 정도로 사는 데 지쳐있기 때문이다. 여기 그러한 인식으로, 한강 주변을 시각 장(場) 위에 놓은 사진들이 있다. 우리가 아는 '한강'이 죄다 등장하는, 그렇게 모두가 알 정도인 '스테레오타입의 한강'이 현상된 사진들. 강변에는 거북선을 흉내 낸 유람선이 묶여있고, 물 위로는 언제 봐도 당황스러운 백조형 보트가 줄 맞춰 건들거리며, 쓸데없이 웃자란 풀들이 죽을 만큼 지루하게 펼쳐진, 싸구려 페인트칠이 벗겨져 나가고 있는 수영장과 개미 한 마리 없는 테니스장이 덩그마니 놓인, '그저 그런' 한강의 사진들. 박홍순이 2년여에 걸쳐 찍은 이 사진들을 이렇게 모티브(피사체가 된 대상)의 차원에서만 언어로 열거하면, 전혀 흥미롭지 않을 것이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 아는 바로 그 '상투적 한강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강은 상투적인 문화의 현장'이라는 사실과 어떤 작가가 일련의 사진 속에서 '상투적인 한강'을 드러낸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후자가 가능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우선하며 필수적인 것은, 한강이 바로 그런 곳이라는 인식이며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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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식과 통찰은 한강을 둘러싸고 있는 인공 자연의 흔적과 문화적 형식을 통해 구현된 대도시 문화인의 욕망에 침투했다가, 그로부터 빠져나와 그 흔적과 욕망을 거리 두고 바라볼 수 있는, 관찰자의 '깊고 낮은' 시선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한 '깊고 낮은' 시선이, 일차적으로 도달하는 인식은 한강이 매우 조악한 문화적 욕망의 산물이라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건대, 또한 그의 사진들을 들여다보건대, 박홍순의 깊고 낮은 시선이 도달한 다음 인식이 있다. '상투적 문화가 즐비한 한강'이 식자(識者)들의 문화 비판의 대상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아니 숨 막히는 자본주의 노동에 강제되고 있는 "IT 강국"의 모든 식민(植民)들에게는 '유토피아 같은 곳'이라는 것! 출퇴근을 위해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를 아침저녁으로 지나다닐 때 시선의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그 낮게 깔린 한강과 한강고수부지가, 정말 쉽게 찾기 힘든 유토피아 같은 곳이라는 인식! 거기 수영장의 짙은 녹색 파라솔 밑에서 선탠을 하거나 거기 테니스 코트에서 '황제 테니스' 치기는 꿈도 꾸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돈 한 푼 안 드는 석양의 강물 바라보기도 그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현실 인식! 박홍순은 그 실재의 사막으로부터 우리가 꿈꾸는 삶의 지향, 그의 표현으로 하면 "파라다이스"라는 사금파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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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이미지에서 관상학적 사진으로 1. 깊고 낮은 시점, 2. 피사체를 엮고 있는 현실 사회적 맥락(context)에 대한 각성. 이 둘을 나는 박홍순의 최근 '한강사진'이 그의 이전 사진들과 불연속하면서 작품의 질(quality)과 의미 차원에서 상승하게 된 핵심 요인이라 생각한다. 모티브로만 보면, 2005-2007년 사이에 찍고 2007년 여름에 선보이는 박홍순의 한강 사진은, 작가가 2005년 전시한 「한강」 작업의 연장이자 후속 작에 속한다. 작가는 이를 대한민국의 산과 강을 사진에 담는 일련의 연속 기획(「대도여지도 Projet」) 중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최근의 한강사진들은 과거 박홍순의 작품들과 상이하다. 후자가 '잘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 혹은 '저기 멀리 장대하게 펼쳐진 자연 풍경 사진'에 속한다면, 전자는 '사회적 심리에 대한 관상학적 사진'이라 이름 붙여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과거 「백두대간」 사진은 풍경의 외피를 스펙터클하게 만드는 데 만족한 '정형적이고 익명적인 이미지'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그가 찍은 한강 사진들은 물리적 체계에 감싸여 거의 무감각해진 한국 사회의 리얼리티와 멘털리티를 포착하고, 시각이미지의 영역으로 부상시킨 '실재'라 말하고 싶다. 이 사진들은 이전 자연풍경 사진들만큼 거창한 프레임을 자랑하지도 않고, 고립무원의 절경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만큼 이전 사진들에서 어쩔 수 없이 감지하게 되는 사실, 즉 이 작가가 사진 장치의 메커니즘과 자연의 존재(being)를 충분히 운용하지 못하고 기계적 ? 기법적으로 재현하는 데 적절한 선에서 타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들지 않는다. 최근의 한강 사진들은, 박홍순의 카메라가 하늘로부터 매우 낮게, 지상에 매우 가깝게 위치해, 한강의 주변부를 심도 깊게 파고들었음을 예증한다. 전체 면적에서 하늘이 절반 이상, 심지어는 9/10를 차지할 정도로, 파노라마 형태로 길게 펼쳐진 이 사진들에서 시선의 높이는 낮다. 또 한강에서 보면 겁나 멀고 높은 남산타워가 쑥떡 위에 꽂힌 이쑤시개처럼 보일 정도로, 이 사진들에서 시선의 깊이는 깊다. 그런데 이 기계 장치의 물리적 '낮기'와 원근법적 '깊이'가 박홍순 사진의 '눈요기-이미지성'을 낮추고, '사고-의미'를 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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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부재, 환상의 번식 당신이 실제로 박홍순의 사진을 보게 된다면, 위에서 말한 '깊고 낮은 시선'이 사진가의 물리적 태도만을 지시하는 것도, 비평이 둘러친 상징어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그가 한강을 대상으로 작업한 최근 사진들은 '리터럴하게' 깊고 낮은 지점에서 작가와 카메라가 태도를 취함으로써, 우리가 실제 한강 주변에서 바라보는 '생활세계로서의 한강'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부분심도를 사용하여 바로 코앞의 나뭇잎이 아니라 저기 먼 남산타워가 또렷이 보이는 사진은, 우리가 한강 고수부지 풀밭에 은색돗자리 깔고 누워 한가로이 남산 쪽을 볼 때 육안으로 잡히는 풍경과 아주 유사하다. 둔하게 생긴 백조보트보다 물 위로 반사된 잔영이 더 섬세해 보이는 사진은 우리가 강물 옆 스탠드에서 보는 바로 그 장면(scene)이다. 그리고 물도 빠지고 사람도 빠진 수영장이, 옆으로 누운 하늘색 종이상자처럼 보이는 사진은 우리가 여름의 끝자락에 맞닥뜨리게 되는 바로 그 공영수영장의 가감 없는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박홍순의 사진에 '우리'는 없다. 나는 '우리' 인간은커녕 개미조차 얼씬 하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이 적막한 사진이 "한강을 파라다이스"로 보는, 현실에 대한 반성적 사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정작 인간은 없고, 대도시 인간의 문화적 욕망, 그 욕망이 환상의 형식으로 새겨놓은 각종 장치들이, 각종 시스템들이 번식하고 있는 곳으로서의 한강! 너무 푸르러 징그러울 정도로 짙은 녹색을 띠고 있는 인공 조성 수목과 풀들, 숨 쉴 틈도 없이 빽빽하게 심겨 만개해 있는 코스모스와 이름도 모르겠는 수입산 일년생 꽃들, 테니스코트 ? 주상복합아파트 ? 수영장 ? 성산, 원효, 마포, 올림픽대교 등등이 멀쩡하게 푸른 하늘 아래 뒤섞여 있는 곳으로서의 한강! 인간이 고도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만들었지만, 정작 그 첨단 기능의 자연과 문화 환경을 누리는 인간은 부재하고, 그 기술과 체계에 종속된 인간만이 살아 남아있는 곳. 아니 이 말에 과장이 섞여있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인공 자연과 문화와 기술력에 휘둘려 단지 그 기능을 작동시키느라 밀폐된 공간 어딘가에 처박혀 숨 막혀 하는 우리들이 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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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는 존재들이다. 당장은 실현되기 힘든 꿈도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갖고 있고, 일시적으로 스치고 지나갈 백일몽 같은 환상도 즐기며, 있지도 않은 유토피아를 그리는 사람들이다. 예술작품은 그 비전의 형성에, 환상의 오아시스 화(化)에, 유토피아의 현재화에 기여한다. 박홍순의 한강사진들도 여기에 속한다. 그의 사진들은 '주변부 한강'이 잘하면 "파라다이스"일 수도 있다고 밝힘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것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옆에 있지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파라다이스이며, 있어도 누리기가 힘들기 때문에 파라다이스이다. 때문에 박홍순의 사진이 우리에게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유토피아적 한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상 위에 낮게 깔려 있는 소소하고 자질구레한 것으로서의 한강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사진을 보면서 어떤 대리 체험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어떻게든 '찾고 싶고', '누리고 싶다'는 마음에 젖는다. 나는 박홍순의 사진이 개진하고 있는 의미는, 서두에 소개한 IT 커플이 착취적 노동환경에서 벗어나 노을 지는 한강 앞에 섰을 때, 그 풍경을 배경으로 촌스러운 사진을 찍을 때 완성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작가의 렌즈에 그들의 소박한 연애질이 '인간의 모습'으로 포착될 때, 그의 사진에 한강이 인공과 허위만 가득 찬 '그림자 진 죽은 공간'이 아니라 생명과 진짜 사건으로 넘실거리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으로 현상될 때,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작업이 완결될 것이라는 얘기다. ■ 강수미

Vol.20070727d | 박홍순 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