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7_0711_수요일_05:00pm
갤러리 상 157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9번지 Tel. 02_737_5025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프로덕트를 찾아서 - "the bus" ● 미술=돈 ● 얼마전 인터넷 기사에서 영국의 아이돌 스타(?) 데미안 허스트의 다이아몬드로 치장된 해골 작품이 한화로 약 400억 원에 거래가 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때의 당혹감이란... 희귀한 국보급 문화재도 그렇게 비싸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한 작가의 작품이 400억 원의 돈이 된다는 말인가? (일설에는 경매가는 920억 원 이상일거라 추정한다.) 이것은 당연히 그 작가의 작품이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들만큼의 불후의 명작이거나 우리의 생각을 일대 전환시키는 작품성 때문이 아니라 미술의 자기 아우라와 더불어 현대 미술이 가진 상업적, 자본적 성격의 제도들이 만들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이 불가사의한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현상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가질수록 그 제도나 환경이 부정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 400억 원이 넘는 돈이 한 작가에게 투자가 되었을까?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이루고 있는 사회적 구성체에서 그렇게 투자된 돈(자본)의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의 이름이나 혹은 창조성에 대한 가격인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앞서 우리가 겪는 현실은 미술품에 그만큼의 돈이 투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예이며 보편타당한 현실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를 둘러싼 미술에 대한 상념들은 허스트가 보여주고 있는 상징적인 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프로덕트와 뉴 프로덕트 ● 미술작품을 작가가 생산한 프로덕트라고 받아드린다면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무수한 생산물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소위 우리가 상품이라 지칭하는 프로덕트의 세계는 분명한 목적이 존재한다. 그것은 쓸모 있는 유용성의 가치와 더불어 이윤을 남기고 그것에 종사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배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이 시스템을 우리는 생산-유통-소비의 자본주의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이 시스템에는 사회적으로 함의된 정당한 룰이 필요하며 그 룰이 흔들리면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함의된 룰을 피해가는 부정당한 방법들도 무수히 존재하지만 강제된 법률로 일정부분 제어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의 의식에서는 정당한 룰이 존재하고 있음을 신뢰하고 있으며 이는 위와 같은 시스템이 건강하게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자 이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대단히 긍정적인 힘이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불편함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갈등을 발생 시킨다. 소비의 시대라는 말은 소비가 형성되지 않고서는 시스템을 지탱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고안된 미디어, 광고, 고갈될 때 까지 멈출 수 없는 자원의 소모, 잉여 생산물과 생산시설, 빈부 갈등의 지구적인 광역화, 환경오염, 자원 확보를 위한 전쟁, 멈출 수 없는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 등 그 부정적인 양상들 이 우리 일상의 한편이 되었다. 그렇다면 미술가들이 생산하고 있는 생산물들은 위와 같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지닌 이 시스템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가? 또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항상 어려운 것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그대로 수용하려 할 때 발생한다. 어쩌면 모순일 수밖에 없는 이 태도를 가지고 뉴 프로덕트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미술이거나 미술이 아닐 수도 있으며 무형의 아이디어 일 수도 있고, 공공 영역에 대한 제안, 건축적인 상상, 디자인,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창조, 또는 대중적으로 성공한 생산품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더 버스'에서는 무형의 아이디어에서 물리적인 생산물까지 모든 것이 상품으로 번안되어 소비자와 직접 만나게 되며 이 번안 과정이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시스템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지닌 비평적 관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창조적 긴장의 공간이 탄생한다. 어떤 상품들은 소비자의 구매의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도 있을 것이며 어떤 것은 지지를 받는 것도 있을 것이다. 뉴 프로덕트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다가올 미래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무엇이어야 한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암묵적으로든 어렴풋하게 든 지지하거나 알고 있는 미술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고 나아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면 성공적이라 하겠다.
the bus ● '더 버스'는 이번에 새롭게 리노베이션을 한 인사동 갤러리 상 157 건물의 2층에 위치한다. 이 건물의 1, 2층은 한국의 전통 공예품과 관광 상품을 파는 전형적인 인사동의 백화점식 상점들이 입점해 있으며 다양한 소비자 계층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 고객이다. '더 버스'에 오는 소비자는 갤러리나 미술관에 맘먹고 오는 관람객과는 다른 일반 소비자들이며 이는 '더 버스'에서 취급하는 생산품들은 미술제도의 아우라(갤러리, 뮤지엄)로 부터 보호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더 버스'의 생산품들은 우리가 어디서나 보는 상품들과 공정하게 경쟁해야만 한다. 일단의 미술적 기득권(?)을 포기했을 때 이 생산품들을 우리는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일반 소비자는 어떻게 이 생산물들을 받아드릴까? 혹은 이 생산품들은 다른 생산품과 비교해서 차별적이고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자기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 생산품은 결국 미술인가 아닌가? 이것은 우리가 현재의 미술제도와 미술 생산품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며 '더 버스'가 고민하고자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버스'는 상업적 공간이 빽빽이 존재하는 도시 환경에 대해 일정한 콘트라스트를 갖는 쉼표가 되고자 한다. 일반 소비자가 맞닥뜨리게 될 뉴 프로덕트를 통해서 자그마한 인식의 변화라도 가능하다면 또 다른 의미의 쉴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매장의 구성 ● '더 버스'는 우선 3명의 작가가 꾸미는 매장으로 출발한다. 첫 번째 매장은 작가 홍장오가꾸미는 n/a이다. n/a는 not applicable이나 not available의 약자이다. 혹은 은행 업무에서 n/a는 거래 없음 no account를 뜻한다. 보석이나 장신구에 깨진 병이나 유리 파편들을 열로 녹이고 다시 정성스럽게 다듬고 이를 결합하여 보석보다 더 보석다운 장신구로 재탄생시킨다. 하지만 홍장오의 장신구들은 깨진 파편의 날카로움이나 털실 보다 가늘게 변형된 유리들로 인해 일반 보석이나 장신구들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착용 불가능한 무엇이 된다. 효용성을 상실한 보석과 장신구는 오히려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하는 관상용 장식물이 되고 역설적이게도 소유와 과시욕망을 상징하는 보석의 의미를 더 강하게 차용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두 번째 매장은 작가 윤정원의 아티스트 selection(작가의 선택)으로 꾸며진다. 작가의 직접적인 창조물이 아닌 기성의 모든 생산물들(추상적인 아이디어에서 버려진 쓰레기 까지)중에서 작가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 것들을 선택해서 일반인들에게 상품으로 제시한다. 여기서는 미술이나 미술품 보다는 작가에게 초점이 맞춰지며 작가가 의미 있게 선택한 물건들이 소비자에겐 어떤 의미의 물건으로 변화되어 받아드려지게 될 것인가에 대한 실험이다. 미술작품 또한 작가의 많은 선택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면 이에 따른 작가의 선택 행위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비평적 질문을 함의하고 있다. 세 번째 매장은 본인이 전시형태로 발표했던 '프라이스 숍-서울'이 들어선다. '더 버스'안에서는 소비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이 가능한 매장이기 때문에 미술적 문맥을 상실한 '프라이스 숍-서울'이 일반 소비자와 직접 만나게 된다. 매장에서는 70,000원부터 4백억 원의 다양한 프라이스가 제시되고 판매 된다. 4백억 원 이라는 허망하고 공허한 숫자로 구성 된 프라이스택은 데미안 허스트의 예에서 보여 지는 미술시장에 유입되는 자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물질로 구성된 상품이라고는 황동으로 만들어진 프라이스택이 전부인 이 매장에서 소비자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더 버스'의 미래 ● 적어도 프라이스 숍에서 얻어지는 작가 몫의 이윤은 작가 개인을 위해 쓰이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 방식의 작가=생산자, 갤러리=유통, 수집가=구매자의 등식에서 벗어나 작가=생산자=유통=이윤의 분배자라는 등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며 발생한 이윤은 또 다른 의미의 생산적인 장에 쓰이게 것이다. 아티스트가 생각하는 이윤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쉽지 않은 과제를 담론화 하고 실천해 보고자한다. 또 한 가지의 중요한 '더 버스'의 지향점은 예술가에 의해 혹은 예술종사자가 아니지만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는 모든 사람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과 제안, 그리고 실천에 있다. 다가올 미래는 바로 이 창조적 역량과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하며 생산화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이 문제에 대해 그 숫자만큼이나 많은 생각과 실천방식들을 쏟아 내놓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대단히 의미 있는 방식들도 존재한다. '더 버스'는 이러한 사람들과 합승하여 달려가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들이 만들어 가는 기업의 형태에 대한 발전적인 고민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국면을 전개 시킬 수 있는 에너지로 재생산되기를 바라며 '더 버스'는 출발 시동을 건다. '더 버스'는 여러분의 관심어린 애정과 제안, 그리고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유영호
Vol.20070712f | The bus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