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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711_수요일_05:00pm
모란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02_737_0057 www.moranmuseum.org
이윤석의 최근 작품에는 금속판으로 조밀하게 구성된 기하학적 형태와 거대한 기둥들이 등장한다. 응집과 확산을 동시에 내포하는 대칭적인 구성물은 차가운 금속성 표피와 단면을 가지며, 수직으로 뻗은 거대한 녹슨 기둥과 대비를 이룬다. 본래 기둥은 공간을 받치는 기능을 가지지만, 전시공간에 설치되는 기둥은 무대 장치 같은 효과가 있다. 그의 기둥(pillar)들은 무리를 지어 배열되면서 신전의 기둥처럼 주위를 압도한다. 작가는 이 기둥들에 '주(宙)'라는 명칭을 붙이는데, 그것은 단순한 건축적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신성한 공간을 축조하는 구성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둥들은 오각형 단면을 가지며 위가 볼록한 형태, 아래가 볼록한 형태, 긴 기둥 작은 기둥 등, 일자형의 단조로움과 둔탁함을 벗어나 율동감을 부여한다. 금속판의 단면은 2mm에 불과하지만, 2.7m 높이로 용접된 기둥들은 무게감이 있으며, 기둥 50여 개가 호와 선으로 배열된 공간은 인공 숲이나 사원 같은 장관을 이룬다.
가장 큰 전시 공간 한가운데는 길이 11미터의 배 형태의 구조물이 배치된다. 관객은 맞은 편에 놓여진 작품 [宙-space](2006)와 배의 관련을 묻지 않을 수 없기에, 양자는 흥미로운 스펙타클을 넘어 일련의 서사를 창조한다. 작가는 기둥 가운데에 위치한 알, 또는 누에고치 같은 형상을 자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는 기둥은 환경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2004년의 개인전에서는 자아에 해당하는 부분이 다양하게 소용돌이치는 흐름이었는데, 이번에는 보다 정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무한한 겹을 가지면서 조밀하게 짜맞추어진 형식은 동일하며, 기둥과 세트로 설치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되는 거대한 배는 알이 쪼개지고 변신하는 듯한 형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기둥에 고정되어 있는 알형태의 작품 [宙-space]에 비한다면, 기둥들을 먼 곳에 남겨둔 채 정처 없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방주의 이미지를 가진다. 환경으로 상징되는 기둥들은 자아를 압박하기도하고 보호하기도하는 이중성이 있다.
기둥이든 알이든 배이든, 이윤석의 모든 작업은 컴퓨터로 정교하게 설계되어 절단도에 의해 레이저 커팅된 금속판의 조립과 용접으로 이루어진다. 기계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기계적인 프로세스를 거치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하는 노동에 조립과 용접까지, 작업과정은 신전이나 배를 건조하는 것 못지않은 정신적 육체적 노동량이 투여된다. 배의 경우 양 날개에 각각 500개씩의 판이 조립된다. 아치형의 고정대가 받혀진 채 바닥에서 약간 뜨는 배의 유선형 실루엣과 그 안쪽을 빼곡히 채우는 금속판들은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설계도면이 3차원 상에 그대로 구현된 듯한 느낌을 준다. 구성단위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조밀한 텍스추어는 단단한 물질적 덩어리나 대상물 보다는, 정교한 모형 같은 양상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배를 구성하는 원리가 구현된 작은 모형 같은 작품이 전시장 입구에 놓여있다.
군집을 이루는 열주들은 중성적인 공간에 비균질적인 밀도를 만든다. 공중에 뜨는 작은 기둥들은 밀도의 차이를 더욱 세분화한다. 열주는 신성한 공간의 축조와 연관된다. 종교학자 M.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신성한 공간이라는 개념은 공간을 변화시키고 특수화함으로서, 요컨대 주변의 세속적 공간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서 원초적 성현(聖賢)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카오스적 공간의 한가운데에 조직화되고 '우주(宇宙)화 된', 즉 중심을 갖춘 공간이나 영역을 확보한다. 이윤석의 열주들은 이질적인 두 공간 사이에 만들어진 칸막이이자 주술적인 방어물이며, '비롯된 때'의 원형에 근거한 건조(建造)물이다. 작품 [宙-space]에서 가운데의 구조물을 견고하게 에워싸는 것도 기둥이다. 기둥 내부의 핵은 마치 만다라처럼 중심을 에워싸는 여러 겹의 구로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우주의 중심이 투영되어 있다. ● 엘리아데는 모든 종류의 신성한 기념물이, 광대한 우주론적 의미, 즉 각각의 건조물을 중심으로 만드는 여러 차원의 교차점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자아 역시 사원이나 집짓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우주의 복제이며 세계 창조의 반복인 것이다. 하나의 동심원적 소우주를 이루는 겹겹의 구조물은 중심에 대한 향수를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의 원형적 상상력으로, 자아를 세계와 실재와 신성성의 중심에 위치하고 싶어하는 바람, 즉 인간적 조건을 초월하려는 욕망이 투사된 것이다. 기둥에 둘러싸여 있으며, 중심에 자리 잡은 성화된 공간은 무질서한 속세의 공간과는 구별된다. 구별을 통해 공간의 균질성을 파괴하는 기둥들은 성스러운 공간을 축조하면서, 저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열려짐을 표상한다. 성스러운 장소란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교통이 가능한 공간,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르는 통로를 가능하게 해주는 곳'(엘리아데)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점유된 지역은 혼란의 상태에서 질서의 상태로 전이된다. 즉 우주(宇宙)화 된다.
이윤석의 작품에서 소우주는 겹겹의 구조로 확장되면서 대우주와 반향 한다. 이를 통해 소멸과 혼돈에 대항하는 질서를 형성한다. 이렇게 특화된 공간은 중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주체의 욕망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실재의 한가운데에 즉 세계의 중심에 있으려는 것은 인간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에서 신화와 종교, 그리고 예술이 탄생한다. 이윤철의 작품에 중심에의 욕망을 반향 하는 또 다른 요소는 기둥이다. 그것은 세계의 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신화적 상상력에서 세계의 축은 하늘을 받혀주는 기둥의 형태로 생각된다. 이러한 우주적 기둥은 상승과 비상, 그리고 이를 매개로 한 초월의 상징을 구성한다. 엘리아데는 종교와 예술의 상상력이 접목된 예를 살펴본 책 [이미지와 상징]에서 가장 널리 퍼진 중심의 상징은, 우주의 중심에 서서 축으로서 삼계(三界)를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주제의 변주로 가장 유명한 브랑쿠시의 무한주의 예를 든다. ● 이러한 기둥의 중개에 의해서 천지간의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일종의 우주주(宇宙柱)가 되는 것이다. 이윤석은 구, 또는 기둥을 통해 질서화 된 영역은 완벽하게 체계화된 세계를 통해 창조의 범례적 모델을 모방한다. 알이나 누에고치 형상은 우추창조의 축약이다. 그것은 신화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우주적 상황이나 원초적 사건의 출현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비롯된 때에 행해졌던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경험적이거나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구조를 계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세계상은 최근의 작품에서 알의 조건을 극복하고 거대한 배로 변형된다. 알로서 상징되는 소우주는 부풀려지면서 두 쪽으로 갈라지고, 안전한 정착은 절대적 자유를 위해 출항하는 배의 이미지로 변화한다. 배 역시 자아를 상징한다. 또한 배는 '운송의 방편이기 이전에 주거 형태의 하나'(R. 바르트)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다른 세계를 향해 혼돈과 죽음이 횡행하는 바다로 떠나는 배에서 교회의 이미지를 보기도 하였다.
이윤석의 거대한 배는 지상적 삶과 초월적 삶 사이에 끼어 방황하는 인간들의 욕망이 집적된 또 다른 사원인 것이다. 배의 거대한 수평적 형태는 수직적인 기둥과 비교해서 죽음을 떠오르게 한다. 죽음까지도 껴안는 자유로의 항해, 그것은 물리적인 이동만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기를 떠나 저곳으로 가고자 하지만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이다. 앙리 미쇼가 말하듯이,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의 감금된 자로서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모호한 이동'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단 하나의 모험은 내적인 것이며, '내부의 공간'만이 탐험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세계이다.
이윤석의 작품 모티브는 고풍스런 신화적 상상력과 연관되지만, 형식적으로 현대의 기술과학의 방법론이 관철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적, 심리적 뿌리를 넘어서, 미리 규정된 목적을 가지는 명료한 구조, 즉 하나의 인공적 조립품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작품은 웹에서 설계되고 그 도면에 따라 구성요소들이 기계로 절단되며, 정해진 방법론에 의해 다시 연결된다. 이 부분에서는 전통적인 조각가의 작업보다는, 엔지니어의 방식에 더욱 가깝다. 그것은 구성주의constructivism처럼, 구조와 제작방식의 종합으로 구체화된다. 양자의 종합에서 구조적 실재가 생겨난다. 도면을 바탕으로 구축된 3차원 모형은 현대의 기술공학적 수단과 부합되면서, 우주나 세계에 대한 조직적 모델로 제시된다. 이러한 방식은 자칫 초월성이나 관념성으로 편향될 가능성을 견제한다. 그의 작품은 구성요소와 조립방식이 제시되면, 굳이 작가가 직접 만들지 않아도 같은 생산물이 나올 수 있을 만큼 투명한 프로세스를 내포한다. ● 여기에서 구조는 물질이나 사물보다는, 모델이나 기호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구조란 하나의 집합 안에 있는 원소들 간의 관계를 말한다. 구조는 '대상의 물질적 형식이 아니라, 어떤 변형 규칙이나 함수'(가라타니 고진)이다. 구조적 방식은 실체보다 관계를 중시한다. 그것은 건축이나 기계 기술자의 방식과 유사하다. 가라타니 고진은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플라톤이래 서구 철학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은 '건축에의 의지'라고 본다. 이러한 의지는 혼돈스럽고 다양한 생성 속에서 구조와 질서를 구축하려는 하나의 비합리적 선택이다. 건축에의 의지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대 서사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견고한 건축물을 구축하려는 의지'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토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의 토대가 부재함을 드러낸다는 역설을 강조한다. 그는 하이데거를 인용하면서 '존재는 우리가 의지할 수 있고 지어 올릴 수 있고, 또 달라붙을 수 있는 어떤 근거와 토대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존재는 그와 같은 바닥 되기 역할에 대한 거절이다. 그것은 바닥 되기를 뿌리친다. 그것은 이윤석의 배처럼 바닥이 없다. 그래서 구조로의 환원은 곧바로 해체와 연관된다. 엄격한 구성원리에 의해 결합된, 자못 견고한 듯한 구조물은 복합적인 차이 작용에 의한 텍스트성을 가지고 있다. 차이적 관계들은 항상 단일하고 고유한 동일성의 범주에 저항한다. 그것은 일견 이윤석의 작품 내용이 가지는 중심에의 향수와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엘리아데 등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중심'은 기하학적 중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나 신화적 사유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근대의 동일성의 사유에 의해 억압된 타자에 속한다. 따라서 '바닥 없음'에 대한 강조는 동일성이 아닌 타자로, 내부가 아닌 바깥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이윤석의 작품에서 배나 구, 그리고 다양하게 배열된 기둥 역시 하나의 실체나 사실이 아니라, 미세한 차이적 관계의 결과물이다. 여기에서 존재는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그의 작품은 동일성의 구성성분이 되는 분열과 차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여러 무늬로 구멍이 뚫린 판들의 수많은 집적은 '유한의 무한한 운동'(데리다)과 관련된다. 이러한 과정은 이질적인 형태를 낳는다. 현대의 해체주의적 사고는 구성요소들의 동일성은 타자성otherness, 혹은 이타성alterity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단일한 사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이타성이 동일성에 선행하며, 동일성을 생산한다'(데리다)고 말하는 것이다. 타자는 보이지 않고 의식되지 않으며 언급되지 않지만, '우리의 존재 양식을 안으로부터 묶는다'(가라타니 고진). 알에서 거대한 배의 구조로 확장, 변형되는 이윤석의 자아는 유아론이라는 동질적인 체계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바깥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 이선영
Vol.20070711c | 이윤석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