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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707_토요일_06:00pm
오프닝행사_오리엔탈 루시(축하공연)
예술공간 헛_HUT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8-13번지 Tel. 02_6401_3613 club.cyworld.com/hut368
"유작전"이다. 이미 죽은 자가 남긴 작품을 전시(遺作展)하는 관습을 이용해 일정한 포지션을 만들어내겠다는 계산된 작전(有作戰)이 전시를 주재한다. 그러니까 그는 버젓이 살아있으며 작은 전시를 한번 연 전력의 젊은 작가이다. 전시 팜플릿(초대장)의 한 면은 좌대 위 조각품을 연기하는 작가의 측면 사진이다. 말하자면 '김도마'가 '김도마'를 전시한다는 컨셉의 형상이며 작가로서 살았던 자의 유물은 좌대 위에 올려짐으로써 종교적 성물(聖物)이 되거나 신화적 상품이 되는 심지어 그 둘의 구분이 불가능해지는 예술의 운명을 규정하려는 제스쳐일게다. 그의 제스쳐는 물로 뛰어들기 직전 호흡을 멈춘 수영선수의 그것이다.
작업에 고용된 모델로 분한 그의 몸은 젊은 남자의 몸이다. 상투적으로 읽히는 것은 유작전이라는 전시명과 충돌하는 젊음, 그러니까 열정/분노/격정이다. 죽은 작가를 추억하는 지인들에 의해서, 아니면 죽은 뒤 비로소 이름을 부여받은 작가(살아서는 죽은 듯 존재해야 했고 비로소 죽은 뒤 '존재'를 부여받은)를 둘러싼 장(field)을 연기하고 흉내냄으로써 그가 성취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젠 한풀 꺾인 '예술의 종말'이란 담론의 전유? 죽음과 탄생의 제의를 통해 다시 삶을 소생시키려는 원시적 열망의 환기? 현재 제작, 유통되는 예술 맥락 자체에 대한 조롱과 냉소? 버려지는 것들에 감정이입하는 감수성의 시학? ● 그는 한 동안 국외에 있었다. 그는 밖에서 서른 해 남짓을 살았던 이곳에서 생산해서 버리는 것, 퍼뜨리고 주워 담는 것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외'국에서 '내'국에서 살아내고 판단했던 것들에 대한 지도제작을 결심했을 것이고 이번 전시는 한동안 국외자로 떠돌던 경험이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집같은 외부와 폐허같은 내부로 이루어진 전시공간 '헛'과 이번 전시작들은 아주 잘 어울린다. 돌아가야 할 집이 있으면서도 아무도 돌아가려하지 않는 떠돌이 아이들이 본드나 부탄가스를 흡입하고 있어도 좋을 내부에, 버젓한 집에서 버려진 쓰레기들을 갖고 들어온 김도마의 몸짓들이 하나 가득이다.
그는 쓰다가 버린 물건들 위에 쓰고, 그리고, 칠했다. 나는 그 제스쳐를 사유한다.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남들이 버린 물건에 '거처'을 마련해주느라 자기 집을 쓰레기장으로 만들어버린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생산하기 위해서 버리고 버리기 위해 생산해야 하는 우리의 만연한 일상의 경계를 구성한다. 희망없는 삶을 목격할 용기가 없는 이들은 삶을 연기한다. 무대(연극무대/화폭/좌대) 위가 아니라 삶에서 삶을 연기하는 것만큼 지루하고 비참한 삶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행이다. 살아서 이미 죽었던 것들에게는 메타포로서건 실제로서건 유작전은 불가능하다. 죽음을 연기하는 김도마의 메시지를 그래서 나는 자신은 인간으로서 살아있겠다는 오만한 욕망으로 읽는다. 낡고 어둡고 더러운 것들에 방점을 찍고 그것들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이되, 미화시키지 않는 것. 쓰레기에 접근하는 김도마에게는 생태학적인 명상법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는 의미와 긍정으로 가는 평이한 공식을 경계한다. 나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윤리적인 질문을 감지하지만, 그는 문제를 던졌을 뿐 아직 그것에 대해 해답을 찾은 듯 허세를 부리지는 않는다. 단지 그는 제대로 죽기 위해서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반문할 뿐이다. ● 밖에 나갔다 온 자가 이방인처럼 바라본 이곳의 풍경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것들이고, 김도마는 관음증과 노출증이 뒤얽혀 도대체 사그라들 줄 모르는 욕망의 천국에 대해 또 이야기한다. 그는 조롱하고 비아냥댄다. 사람은 없고 구멍들, 입과 항문만 있는 욕망의 왕국에는 삶이 없으므로 죽음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살아서 비존재였던 작가의 유작전에 몰려든 사람들은 죽은 뒤에 그에게 부여된 이름을 명성을 소비하러 미술관에 간다. 미술도 상품이라는 모두가 아는 사실을 모두가 일순간 잊어버릴 때 미술은 예술이 될 수 있다. 살아서 이미 유명했으므로 허깨비같은 표정을 짓게 된 와홀의 분열은 한국에 오면 말끔히 세탁된다. 자본주의적 권태와 우울을 자본주의적 쾌락과 행복의 이미지와 뒤섞었던 와홀 앞에서 사람들은 이미 알려지고 소유된 와홀을 보고 간다. 소통없는 만남은 평화롭다. 소통하려는 욕망을 가진 자 만이 소통의 실패와 공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와홀이 울고 있다고 생각한 김도마의 애틋한 마음은 누구건 감히 '예술가' 행세를 해도 너그러운 한국 사회에 대한 비아냥과 분노와 함께 한다. 이번 전시에 그는 사랑과 혐오를 함께 진열하고 있다. ● 삶을 연기하는 이유나 죽음을 연기하는 이유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이다. 자의식이 없는 자의 연기는 폭력이며 공허함이다. 그는 다른 사람과 심지어 자신을 병들게 한다. 김도마는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 너무 많다고 불평한다. 자의식이 있는 자의 연기는 비극이며 공허함이다. 그는 이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망각할 수 없는 자신을 걸머지고 계속 가거나 과도한 연기의 피로로 결국 소진되고 말 것이다. 죽음을 연기하는 자는 삶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다. 무의미한 삶들을 무대 위에서 살해하면서 파국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을 것 같은 삶에 겨우 매달린 의미의 잔해를 붙들고 그는 삶을 봐달라고 요구한다. 김도마는 고전적인 의미의 작가, 총체성에 대한 사유를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더니스트이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을 호출해내고, 그것들에 자신의 존재를 덧붙이고, 이곳의 비극적 타락을 목격하는 자신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작가로서의 자신의 존재감을 강화하려는 '거만한' 태도는 물론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작전의 '형식'을 빌어, 영혼이 깃든 상품 다시 말해서 물화된 삶과 물화된 전시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발화하는 태도는 자못 신선하다.
전시 팜플릿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면 의도적으로 한 부분만이 컬러이다. 물감을 닦는데 사용한 것 같은 헝겊이 슬쩍 좌대 아래 걸려 있다. 유작전을 경유해 다시 살아있으려는 강렬한 욕망이 읽힌다. 소비되어져야 하는 상품으로서의 작품과 전시되어져야 하는 소통에의 의지로서의 작품 사이에서 김도마는 명민하게 고민의 방식을 선택한다. 나는 그가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삶과 믿음과 의미의 대행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읽는다. 그는 다행히 안과 밖을 넘나드는 신분이다. 그는 떠돌이의 신화로 자신의 거처를 보호하는 평범한 행운은 타고 나지 않았다. 작살로 고기를 잡을 줄 아는 사람들이나 세계를 유랑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두었기에 그는 무책임하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의 위험을 이야기할 수 있다. ● 광목 천에 스탬프로 찍은 '퍼니퍼니' 게임 앞에서, 미국이 미국에게 저지른, 자본주의의 뫼비우스의 띄 앞에서 재밌는 일이라고 짐짓 가볍고 즐거운 듯 제스쳐를 취하는 김도마의 '유작전'을 잇는 전시의 이름이 '탄생전' - 조만간 열리게 될 전시 - 이 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소박하고 천진난만한 작가는 아니다. 대학시절 부터의 작업과 이번 전시를 위해 기획한 작업을 한데 망라한 이번 '김도마 유 작전'은 소비와 생산의 합류지점에 서버린 예술에 대한 비판적 대응방식으로서, 이제 바야흐로 살아볼 채비를 하는 젊은 작가의 오만한 고백으로서, 대면할 자격을 갖춘 듯하다. ■ 양효실
Vol.20070709f | 김도마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