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range City

김홍식 판화·설치展   2007_0702 ▶ 2007_0831

김홍식_In the street 2_스테인리스 스틸에 음각_80×80×5cm_2006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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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706_금요일_05:00pm

센티르 갤러리 경기도 파주시 맥금동 599-1번지 Tel. 031_957_3215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다 ● 김홍식은 도심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In the street, Inter Spaces) 카메라나 휴대용 영상장비로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을 헌팅한다. 그 속에서 소요하는 작가는 자신을 낯선 이방인처럼 느끼며(Alien in), 이러한 이방인의 눈에 비친 도시는 온통 낯설기만 하다(A Strange City). 그러나 이 낯설음은 새로운 것이 주는 충격에서 연유한 것이기보다는, 지나칠 만큼 친숙한 도시의, 급속하게 쇠락해가는 퇴폐와 퇴행의 징후를 재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온다(The city is now in ruins). ● 작가의 이러한 감정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대대적인 도시정비계획에 맞닥트려 급속하게 사라져가는 파리의 구 시가지를 사진으로 기록한 외젠 앗제의 그것과 통한다(Homage to Eugene Atget). 끝도 없이 이어진 유리터널을 불 밝히고 있는 아케이드나, 그 이면에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개화를 예비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파사드 등 모더니즘의 기획에 맞춰 재편되기 직전의 파리의 구 시가지가 그대로 뉴욕과 서울의 현재로 옮겨진 것이다. 아케이드가 백화점으로, 가스등이 휘황찬란한 네온 불빛으로, 그리고 파사드가 온갖 현란한 입간판이나 시도 때도 없이 빛을 뿜어내는 전광판으로 전이된 것이다. ● 이런 외관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역사는 결코 진화하는 것이 아니며, 낡은 것이 새로운 것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다만 동일한 계기들의 반복과 변주를 되풀이할 뿐이다. 자본주의는 전 지구의 민주화(그 이면에는 모두가 똑같은 콜라를 마신다는 사실의 허구가 들어있다)와 현대화(생활의 현대화는 생활의 코드화와 통하며, 이는 개별주체에 대한 제도의 감시와 통제를 더 효율적이게 해준다), 그리고 시장화와 상품화(사용가치의 폐기와 교환가치의 극대화로 현상하는)를 지향하며, 이를 위해 전 세계의 도시를 똑같은 풍경으로 바꿔놓는다.

김홍식_In the street 2_스테인리스 스틸에 음각_80×80×5cm_2006

도시는 말하자면 자본주의 욕망의 기획인 것이다. 그 문명의 바벨탑은 급속하게 쇠락해 가는데, 이를테면 새롭고 충격적인 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인 상품과 동격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이는 새로운 상품으로 등재되는 순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골동품으로 변질되고 만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쓰레기들, 특정의 정서를 자아내는 쓰레기들, 감상적이고 의미 있는 쓰레기들로써 전 지구를 뒤덮는 것이다. 이로써 자본주의의 작품인 도시는 그대로 거대한 무덤, 묘지가 되어간다.

김홍식_In the street 2_스테인리스 스틸에 음각_80×80×5cm_2006

김홍식의 작업에는 이러한 도시의 현재성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비록 그 도시는 뉴욕이나 서울, 청계천이나 청량리 등의 장소 특정성을 갖고는 있지만, 자본주의의 욕망이 전 세계를 도시화한 탓에 특정성을 잃고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서울은 뉴욕과 같고, 청계천은 청량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도시가 똑같은 것처럼 현대인 역시 똑같다. 흔히 현대인의 정체성을 익명성에서 찾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인은 도시적 삶 속에서 개별적이고 본원적인 주체를 잃고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주체를 덧입게 된다.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가 요구하는 기계적인 인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 인간기계는 철저하게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에 의해서만 평가되며, 이를 의심받거나 상실할 때는 즉각 폐기처분된다. 실업자, 퇴직자, 노숙자, 일용직 노무자, 신용불량자 등 제도가 개인에게 요구해오는 비인간화의 도덕률로부터 도태된 인간쓰레기들이 그림자를 드리우며(And Shadow) 도시를 거대한 현대판 게토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김홍식_In the street 2_스테인리스 스틸에 음각_80×80×5cm_2007

작가는 그 도시들에 낯설음을 느끼고, 이질감을 느끼고, 생경함을 느끼고,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새로운 것이 아닌 익히 알려진 것을 재확인하는 데서 온다. 친숙함과 낯설음이 서로 들러붙어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유래한 이러한 감정은 프로이드의 캐니와 언캐니를 불러일으킨다. 낯선 것은 진즉에 그 속에 친숙한 것을 숨기고 있으며, 친숙한 것은 그 이면에 낯선 것을 숨기고 있다는. ● 그러므로 낯설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만화경처럼 현란한 도시의 얼굴은 다만 자본주의의 욕망이 전이되고 반복되는 파사드의 다변화된 지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는 말하자면 철저하게 표면으로만 축조된 것이다. 그 이면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즉각 죽음충동이 발목을 붙잡는다. 도시의 변화무쌍하고 현란한 표면들, 때로는 유혹적이기 조차한 표면들은 이처럼 주체가 죽음충동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막는다. 도시는 포르노그래피가 그런 것처럼 그 이면이 없으며, 그곳에는 다만 심연과 침묵만이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김홍식_In the street_스테인리스 스틸에 음각_36×104×5cm_2006

도태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철저하게 삶의 충동에, 도시의 유혹적인 표면에 붙들어 맬 수밖에 없다. 그 표면들로 축조된 길 위에서 그 이면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작가는 길을 잃고 자신을 잃어버린다. 낯설음은 이러한 이면의 인식으로부터 오며, 이는 자동적으로 소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외는, 특히 자기소외는 이처럼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볼 때 피할 수 없는 현상이며, 카뮈의 이방인은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부조리한 삶의 인식이 자신마저도 낯설게 하는 것이다. ● 그런가하면 작가는 자신이 도시 한가운데 서서 누군가를(혹은 무언가를) 쳐다 볼 때, 동시에 자신 역시 누군가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를 라캉은 시선과 응시의 교차로 부르고, 사르트르는 시선의 헤게모니라고 부른다. 즉 주체의 시각을 시선으로 부를 수 있다면, 응시는 그 주체에 의해 보여 지는(마치 사물처럼 객체화되는) 대상의 시각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시각은 시선으로서,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 주체로서 군림하려는 투쟁의 관계에 다름없다. 작가는 소통불능(Non-communication)을 주제화하고 있는데, 이는 그대로 주체와 타자간의 서로 맞잡을 수 없는 배타적인 관계에 대한 사르트르의 인식과도 통한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타자의 부정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 김홍식의 그림은 이처럼 낯설고 이질적이고 생경한, 삭막하고 무정한 현대도시의 생태학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는 각각 In the street, Inter Spaces, Alien in, A Strange City, The city is now in ruins, Homage to Eugene Atget, And Shadow, Non-communication의 소주제들에 의해 지지된다. 이는 말하자면 도시에서 느낀 작가의 감정이 정박해 있는 개념의 지점들인 것이다.

김홍식_A Strange City1-2006 Seoul_디지털 프린트, 혼합재료, 종이에 실크스크린_각 110×28cm_2006
김홍식_A Strange City 2 色 다른 도시_렌티큘러 스크린, 빛_각 36×36cm_가변설치_2006

작가는 범상치 않은 기법으로써 이와 같은 도시의 생리를 그려낸다. 그의 작업은 사진과 판화와 조각 등 다양한 장르에 맞물려 있다. 장르와 장르가 서로 맞물리는 경계 위에서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카메라로 도시의 이미지를 캡처한 후, 그 이미지를 스테인리스스틸 판에다가 전사하고, 재차 이를 부식시킨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제안된 부식판은 판화로 치자면 프린트로 출력되기 이전 단계에 해당한다. 또한 그 자체 비록 미세하긴 하지만 저부조의 형식을 띤다는 점에선 조각의 장르적 특수성마저 획득하고 있다. 특히 표면의 섬세한 요철효과나 그 질감은 작가의 작업을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 촉각적인 장으로까지 확장케 한다. ● 작가는 이런 부식판 자체를 제안하기도 하고, 더러는 이를 실제로 찍어낸 이미지와 대비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각각 네거티브 이미지와 포지티브 이미지, 회색의 무표정한 이미지와 원색의 현란한 이미지와의 대비로서 현상하며, 이는 그대로 도시의 이중성 혹은 양면성과도 통한다. 그런가하면 화면(부식판)의 이미지가 외부로부터 주어진 조명이나 빛 그리고 관객의 시선 여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 이는 그대로 마치 만화경과도 같은 도시의 다면성을 드러내며, 그 자체가 랜티큘러를 소재로 한 다른 작업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 이 일련의 과정과 방법으로써 김홍식은 익명적이고 차가운, 중성적이고 무표정한 느낌의 도시 이미지를 그려낸다. 시선과 응시가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 투쟁하는 곳, 이 낯설고 이질적이고 생경한 곳에서 작가는 도시를 소요(逍遙)하고 사유(思惟)한다. 이로부터 현란한 불빛에 가려진 도시의 그림자가, 도시의 무의식이 드러난다. ■ 고충환

Vol.20070709c | 김홍식 판화·설치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