뽁 뽁 이

BUBBLE WRAP 2007 SEOUL展   2007_0705 ▶ 2007_0719

뽁 뽁 이展_예화랑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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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705_목요일_05:00pm

첸주펜 Chen Ju Pan (타이완)_김두진 Dujin Kim(한국)_고자영 Jayong Koh(한국) 이재훈 Jaehoon Lee(뉴질랜드)_조이스 슈 Joyce Hsu(캐나다)_김정선 JungsunKim(한국) 아멘테로스 레이 Rey Armenteros(미국)_중생 JS.Factory(한국)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화랑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2-9번지 가로수길 Tel. 02_542_5543/3624 galleryyeh.com

뽁뽁이전-버블 속의 개인들 ● 발포비닐시트, 완충포장재를 흔히 '뽁뽁이'(Bubble-Wrap)라고 부른다. 손가락으로 눌러 터트릴 때 나는 소리에서 연유하는 것이리라. 수많은 기포들이 일정한 높이를 지닌 체 균등하게 배열되어 있는 뽁뽁이는 깨지기 쉬운 물건을 싸는 포장재를 가리킨다. 손상되기 쉬운 물건을 포장하고 보호하며 편리한 이동을 도와주는 이 비닐은 상품과 소비, 이동, 일회용품, 신상품, 몰개성 등을 은유한다. 그런가하면 '거품'이란 뜻도 포함한다. 버블의 텅 빈속과 이를 감싸고 있는 껍질은 공허한 우리 현대인의 삶과 무척 많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생산되는 상품들은 만족감을 추구하는 인간을 충족시키기 위해 보다 과장되어 포장되며, 때로 그것들은 '버블랩'의 질서정연하게 반복된, 텅 비어버린 기포처럼 소비되어지며 사라져버린다고 본다. 아울러 포장하고 감싸고 완충작용을 하는 뽁뽁이는 치유나 보호 등의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중의적인 의미로 읽을 수 있고 동시대 삶과 문화를 은유하는 뽁뽁이를 타이틀로 내건 이번 전시에는 다국적 작가들이 참여했다. 한국과 미국, 타이완, 캐나다, 뉴질랜드에서 온 작가8명이 그들인데 여기서 8라는 숫자는 불완전한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미술행위를 통해 동시대 삶과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한편 사회적, 문화적, 성적 정체성을 가진 자신들의 욕망과 그 단절에 주목한다. 이 모든 문제의식을 '뽁뽁이'라는 주제 안에 거느리고 있다. 오늘날 미술이 인테리어나 감각적인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공작'수준의 행위로 제한되고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여전히 미술을 사회적 언어와 자의식의 기호로 사용하는 한편 현재 미술의 위상과 쓰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소비가 조장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의 의미를 묻고자 하는 의식을 공유한다. 모든 것이 재빠르게 소비되고 순환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 역시 그러한 '트렌드'로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이들 작가의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 내지는 관류하는 의식들인 셈이다. 그래서 이들은 "상품미학과 욕망으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소비적 시스템에 대한 질문으로, 역사적으로 가벼움이라 치부되었던 소외된 가치들에 대한 재발견으로, 또한 현대인이 갖는 공허함의 치유에 대한 몸짓으로" 자신들이 작업세계를 가꾸고 일련의 기획전시를 일구어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들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함께 동시대 이미지의 생애와 그 의미를 부단히 물어보는 것이 화가의 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적 사유, 이미지에 부단히 개입하고 그 이미지에 기생하는 한편 이를 전복하고 그 배후에 자리한 의미를 읽어내는 이미지의 사회학적, 인문학적, 문헌학적 접근 등이 그것이다. ■ 박영택

아멘테로스 레이_Obscurity

아멘테로스 레이(Rey Armenteros) ● 실제 버블 랩에 물감을 바르고 이를 종이에 찍어내는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일정한 패턴에 의한 추상적인 원형이 점들의 집적과 그 사이로 문득 사람의 형상이 드러나는 그림을 보여준다. 잉크 속에서 순간을 갖는 이 이미지는 일종의 이벤트의 연속으로 변한다. 이는 어떤 현상이나 연결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일이자 새로운 기억과 가상의 역사를 조정하여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종의 주술적 행위, 종교적 의식을 연상시키는 이 방법론은 우연적인 잉크의 번짐과 집적 아래 드러나는 이미지, 자신도 모르는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행위의 은유다. 아울러 그것은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일련의 행동과 매우 유사하다. ■ 박영택 아멘테로스 레이(Rey Armenteros) ● Rey Armenteros의 그림에는 시대와 지역을 확정하기 어려운 어떤 공간이 어느 정도는 감상적이고 어느 정도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으로 묘사되어 있다. 요괴와 마녀가 인간과 공존했다던 동부 유럽의 어떤 지역 같기도 하고, 나그네를 냉담하게 경계하며 맞이하던 서부영화 속 멕시코의 촌락 같기도 하다. Armenteros의 필치는 이야기와 영화, 공상과 추억 사이를 오가며 부유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이런 화면 위에 물감을 바른 '버블랩'을 직접 찍은 것들이다. '버블랩'의 뭉글뭉글한 감촉이 물감 자국이라는 매개를 통해 화면 위에 옮겨지자, 그림 속 형상들은 아득하게 물러서면서 '버블랩'의 자국과 뒤섞여서는 더욱 신비하고 풍요로운 장면을 낳는다. ■ 이연식

고자영_창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0308e | 고자영展으로 갑니다.

고자영 ● 손으로 그린 페인팅과 와이드 칼라 인화된 사진을 통해 조합된 이상한 풍경화를 보여준다. 전시장에 가설된 이 가짜 풍경은 창문(프레임)과 조명으로 인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바깥 풍경을 창문을 통해 엿보는 듯한 기이한 실재감을 안긴다. 그러나 그것은 복제된 이미지다. 작가는 자신의 원본그림을 와이드 칼라 인화하고 이를 창문가 조명으로 연출한 후 설치한다. 그것은 마치 잘 만들어진 무대 세트와도 같다. 이 초현실적 효과는 익숙한 타성에 젖어있는 우리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한편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독창성에 대해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원본을 복제하는 과정을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의미와 그 가치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원본과 복제본의 관계가 더 이상 위계적 질서 속에서 논의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작가의 작업은 그 두 가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며 복제의 과정 중에 생성되는 의미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 박영택 고자영 ● 갖가지 식물(주로 아열대, 열대 식물)로 가득 차 있는 고자영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왠지 이들 나무 둥치 사이나 커다란 잎 아래쪽에서 사람이나 짐승이 불쑥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느낌이다. 고자영의 그림이 천진한 화풍으로 이국의 풍경을 만들어 냈던 앙리 루소(Henri Rousseau)의 그림과 통하기 때문에, 루소가 그린 이국의 식물들 사이에 피리를 불어 뱀을 조종하는 사람이나 소파에 길게 누운 나녀(裸女)가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고자영의 그림에서도 뭔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고자영은 손쉬운 답을 제시하는 대신 긴장감을 유지한다. 화면에는 사람이나 짐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 때문에 뭔가가 당장이라도 나타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의 분위기를 바꿔 놓을 것 같은 기대감이 화면 위를 떠돈다. 고자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게 다 무대 장치에 삽입된 무늬일 뿐이라며 짐짓 위악적인 장치까지 집어넣는다. 과연 저 잎 뒤에는, 나무 둥치 뒤에는 뭐가 있을까? 이 질문을 뭉개듯 다가서는 저 인화지의 얇은 두께에는 뭐가 스며 있을까? 관객의 입장에서는 불온한 기운과 미묘한 정념을 붙들고 싶어지지만 고자영은 관객이 내민 손을 뿌리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관객은 그녀가 엮어낸 화면에서 눈을 떼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 이연식

첸쥬펜_Incubator

첸주팬(Chen Ju Pan) ● 매달려있거나 부유하는 듯한 인형형상들을 설치했다. 마치 마네킹과도 같은 일률적으로 복제된 인간이 형상을 한 이 존재는 표류 또는 부표하는 개인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거나 사회적 일원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이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함을 말한다. 개인적 자율성이란 가벼움과 사회적 책임의 무게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에 있어서의 충돌, 독립성과 책임 사이의 행복한 균형을 추구하는 유동적이고 독특한 지각을 보여준다. 여기서 부표 또는 곡류하는 것은 부정적이라기 보다는 의미 있는 탐사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부표는 맹목적인 고립과 소외감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무한한 자유로움과 관련되어있는 것이다. ■ 박영택 첸주팬(Chen Ju Pan) ● Chen Ju Pan이 빚어 만든 여성들은 하나같이 고요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꿈꾸고 있다. 팔다리도 없고 그저 얼굴과 몸통으로만 - 여성임을 드러내는 볼록한 가슴과 풍만한 둔부로만 - 존재한다. 그녀들은 살과 뼈를 지닌 존재라기보다는 어떤 액체나 기체가 빚어낸 존재들처럼 보인다. 좀 더 노골적인 비유를 찾아보자면, 그녀들은 마치 튀어 올라온 우유방울이 빚어낸 존재들처럼 보인다(한국에서는 1980년대 초반에 우유방울이 왕관 모양으로 튀어 오르는 모습을 정지 화면으로 잡은 TV광고가 크게 인기를 끈 뒤로, 튀어 오르는 우유방울의 형상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런 때문에 그녀들의 형상은 다음 순간 형상 자체가 사라져 버릴 듯한 불안감과, 짧고 우연적인 순간을 어떤 계기를 통해 영속적으로 이어 가는 듯한 긴장감을 준다. 그런 그녀들이 때로는 카누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수동적으로 보이던 그녀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는 건 일견 모순처럼 여겨진다. 그녀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녀들은 고요하고 엄숙하게 공간을 장악하면서 불가사의한 공감을 자아낸다. 그녀들을 뒤따라 나서도 좋을 듯한 느낌이다. ■ 이연식

이재훈_space tree

이재훈 ● 뉴질랜드의 오크랜드라는 도시에 위치한 건설 폐기물장에서 수집한 이미지들을 디지털상에서 콜라주했다. 도시에서 버려진 폐기물, 고철더미들이 탑처럼 수직으로 세워진 장면은 가상의 것으로 현실풍경에서 출발하지만 조금 과장된 것이다. 그러나 이 풍경은 컴퓨터상에서 허구로 생성된 문명의 얼굴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음식 모델들을 다룬 작업은 그 플라스틱 모형물들이 고도로 상업화 된 우리의 음식문화에서 경쟁적으로 유혹의 대상을 찾는 포장된 상품의 미끼라고 본다. 경쟁적으로 유혹의 대상을 찾는 포장된 상품의 미끼인 이 모형들을 무작위로 섞어서 설치한다. 여러 나라의 음식들이 섞여있고 더구나 다양한 나라의 향수와 유기적으로 섞여 화려하고 달콤하고 유혹적인 냄새까지 곁들여놓는다. 냄새가 없는 플라스틱에 냄새를 부여하고 시각에 후각을 덧붙이는 작업이다. 또한 그는 여행 중에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채집된 텍스트와 상황들을 디지털 상에서 재구성하여 끊임없이 나열시키고 이를 극사실화된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디지털 콜라주사진작업이며 일종의 피부로 채집하고 기억한 다큐멘터리작업이기도 하다. 자신의 몸 주변을 이루는 구성물들을 포함하는 이 작업은 자기 자신의 유목주의적 정체성에 바탕하여 이루어진다.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존재자, 시간성, 공간성의 테두리는 순간 무효화 되면서 그것들은 미디아의 유기체적 구조망을 통해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박영택 이재훈 ● 건설 폐기물을 재구성한 사진을 선보인다. 하나는 시멘트 폐기물을, 다른 하나는 고철 폐기물을 쌓아 올린 것인데, 마치 사람의 옆얼굴처럼 보인다. 일찍이 아르킴볼도(Archimboldo)가 과일과 채소, 수목과 불꽃, 수중 생물 등 갖가지 자연물을 모아 만들어 냈던 환상적인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아르킴볼도의 초상화가 생멸을 거듭하며 순환하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드러낸 작품이었던 반면, 현대문명이 무분별하게 쏟아내는 폐기물을 쌓아올린 이재훈의 초상화는 자못 비관적인 전망이 담긴 기념비이다. 순환의 통로를 틀어막아서 자연의 조건을 위협하고 결국 인간의 생존 조건을 위협할 것이 분명한 거대하고 불길한 기념비이다. 「Space Tree」나「Sunset」같은 사진 작품은 '순환'과 '증식'을 둘러싼 이재훈의 사유를 모형처럼 드러낸다. 「Virtual Station」은 마치 혈관처럼 도시를 순환하는 지하철의 모습을 담았다. 지하철이라는 순환계가 없는 대도시를 이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터. 게다가 지하철은 계속해서 새로이 건설되어 더욱 복잡한 망을 이루는 한편 도시 외곽으로 뻗어나간다. 멈출 줄 모르는 이 움직임이 인간의 미래에 대해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정작 지하철에 몸을 맡긴 시민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혈관 속을 흘러 다니는 혈액처럼, 도시를 구성하면서도 정작 유기체가 된 도시에 대해 뭔가를 생각하고 결정할 수는 없다. 모조 음식물을 이용한 「Festival」은 폐기물로 쌓은 기념물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뚫려 있어야 할 순환의 통로가 틀어 막힌 양상을 드러낸다. 합성수지로 만든 모조 음식물은 실제 음식물을 섭취하라고, 음식점에서 돈을 쓰라고 유혹한다. 음식물은 누군가가 먹어 치워 소화시키거나 아니면 그대로 썩어 분해될 테지만, 음식물을 먹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모조 음식물은 정작 이런 순환의 고리를 틀어막고 버티고 있다. 모조 음식물은 썩지 않는다. 썩지 않기 때문에 기괴하다. ■ 이연식

김정선_보영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1221e | 김정선展으로 갑니다.

김정선 ● 얼굴이 부재한 사람들이 입고 있는 구체적인 티셔츠에 새겨진 '얼굴'을 그렸다. 이 이미지는 사진을 통해 차용한 것이다. 그 얼굴은 체게바라, 오드리 헵번, 미키마우스, 비틀즈 등이다. 유혹적이고 매혹적인 대중적 아이콘이자 우상인 이들의 초상이 젊은이들이 피부, 옷에 부착되어 함께 한다. 그 도상들은 마치 문신 같다. 옷, 악세사리, 기호품 등도 동일한 기능을 한다. 그것은 또 다른 존재의 표상이자 부재하는 정체성을 대신하는 기호로 부유한다. 정작 사람은 없고 티셔츠에 자리한 이미지, 도상들만이 실제 힘을 발휘하고 존재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고 이를 넘어선다. 이미지를 소비하면서 개성을 실현한 듯 자연스러운 그 모습들이 쓸쓸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 박영택 김정선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관계를 신중하게 살펴 왔다. 김정선이 자신과 가족들의 옛 사진을 화포 위에 옮겼을 때 그녀는 사진들 속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는 대신 흐릿한 붓질 속에 감추었다. 이로써 그녀의 개인적인 추억은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추억을 암시하게 되었다. 김정선이 사진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이미지는 불투명하고 모호한 영역으로 후퇴하는 듯했지만, 레이스와 벽지 무늬를 소재로 한 그녀의 최근 작업에서 이미지는 급작스레 관객의 눈앞으로 다가들다 못해 관객의 멱살을 쥐는 듯하다. 그저 눈을 편안하게 하는 듯싶었던 장식적인 패턴들 속에서 베트남 전쟁과 광주학살을 비롯한 역사 속 비극의 장면들이 튀어나와서는 숨어 있던 기억을 파고들며 물음을 던진다. 그때 보았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그때 보았던 것들을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김정선의 최근 작업에는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셔츠에는 영화와 만화 속 주인공들이나 팝 스타 등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정작 셔츠를 입은 사람들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 작업은 그녀가 과거의 작업에서 옛 사진들을 끌어들여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던 것과 연결된다. 김정선의 발걸음은 아무래도 익명성의 영역으로 이끌리곤 한다. 그녀는 정체성을 쉽사리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에 정체성을 둘러싼 문제가 대단히 모호한 것임을, 그리고 정체성은 종종 외부의 임의적인 장치들에 의해 규정됨을 거듭 상기시킨다. ■ 이연식

조이스 슈_Bobby

조이스 슈(Joyce Hsu) ● 장난감이나 만화캐릭터들의 성격을 반영해서 우리의 삶에서 상상이나 공상 등 정신적 영역까지도 기계화되고 상품처럼 포장되었는가를 언급하고 있다. 작가가 직접 제작한 날개가 달린 이 장난감 인형들은 자가만의 세계, 왕국의 등장인물들이다. 동심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 하지만 이 역시 축소된 사회망과 유사하며 엄격한 현실에서의 계급적 계층적 지배논리를 반영한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여왕벌의 존재로 자리잡는다. 키덜트적인 이 작업의 배후에는 기묘한 욕망과 계급, 어른의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시선이 놓여있다. ■ 박영택 조이스 슈(Joyce Hsu) ● 날개가 달린 장난감을 손수 만들어 왔다. 단지 장난감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 장난감에 이름과 계급을 부여해서는 자신의 왕국을 구축했다. 우리 주변에서 아이들이 행동하는 걸 관찰하거나 자신이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평등과 연대(solidarity)는 어리고 '순수한' 영혼의 발명품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랜 투쟁과 반목 끝에 도출해 낸 타협의 산물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떠올린 공상의 나라 중에 시민이 평등한 나라는 없다.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는 국가보다 더욱 권위적인 나라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슈렉』이 옛 동화를 뒤틀면서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지만 공화국을 무대로 한 『슈렉』은 앞으로도 결코 나오지 않을 것이다. Joyce Hsu의 장난감 군단은 유희적인 몽상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아가는 한편, 몽상에까지 투영된 위계와 집단의식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 이연식

김두진_blur blur blur_캔버스에 유채_160×160cm_2004

김두진 ● 이성애 문화에 숨어있는 동성애적 코드의 시각적 재현에 관해 말한다. 이성애 중심사회가 생산하는 시각문화의 경험과 그 체험을 주관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어떠한 결과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 그의 작업인 셈이다. 그가 다루는 이미지는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시각체험에서 온 것이며 그것들은 대부분 영상매체와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습득된 이미지들이다. 사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사람들에게 일정한 관념, 가치관을 주입하는, 훈육적 기능을 담당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한 매체 속에 잠재적으로 지배하는 이성애적 문화 내부에 숨어있는 동성애적 코드를 발견하거나 이미 고착된 이성애적 아이콘을 차용하여 전이함으로 그 정형화된 의미를 제거하는, 일종의 정치적 전략에 대한 탐구가 그의 그림이다. 그것은 뽁뽁이처럼 증폭되고 소멸되는 동성애의 욕망에 대한 개인적인 진술이자 생의 모색이기도 하다. ■ 박영택 김두진 ● 16세기 초에 영국 궁정에서 활동했던 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은 당시 영국에 사신으로 와 있던 프랑스인 관료들을 모델로「대사들(The Ambassadors)」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수수께끼 같은 형상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 형상은 관객이 그림의 아래쪽에 바짝 붙어서 위쪽을 비스듬히 바라보면 해골의 모습이 된다. 이렇게 숨겨진 해골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유명해서, 이제 「대사들」을 보는 관객은 이 그림을 제대로 보려면 두 개의 시점이 필요하다는 점을 안다. 정면에서 보는 일반적인 시점과, 해골이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시점. 해골을 제대로 보는 순간 당연히 그림의 다른 부분은 어그러진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대사들」에는 해골이 삽입되어 있다면, 김두진의「Hey! Honey, Look at me tender」에는 영화와 만화 영화에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들의 얼굴이 길쭉하게 삽입되어 있다. 해골이 삶과 세계의 덧없음을 암시했다면 슈퍼 히어로들은 영원히 쇠하지 않는 생명력을 대표한다. 게다가 김두진의 그림에는「대사들」과 달리, 비스듬하게 봐야 할 형체가 세 개나 들어 있다. 그래서 베트맨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데어데블과 스파이더맨의 얼굴은 안 보이고, 스파이더맨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에는 베트맨과 데어데블의 얼굴이 밀려나는 것이다. 물론 김두진이 배경에 그려 넣은 동성애 장면도 모두 어그러져서 기괴한 문양처럼 보인다. 홀바인의 「대사들」은 신기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당시에 유행했던 아나모르포시스(왜상 : anamorphosis)의 관례에 맞춰 질서 정연하게 그려진 그림인 데 반해, 김두진의 그림은 다양한 시점을 혼란스럽게 중첩시킨다. 세상이 왜곡되어 보이는 건 하나의 시점에 의존해서 보기 때문이라고 김두진은 말하는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데 하나의 시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설령 여러 시점을 오간대도 세상을 보는 완전한 시각을 획득할 수는 없다. 시각의 불완전함을 깊이 의식하는 수밖에 없다. ■ 이연식

박성호_중생-신계동1-340

박성호(JS. Factory) ● 일상공간을 스캔하듯 촬영한다. 그는 도시의 바닥과 특정한 공간을 연속적으로 채집한다. 그 이미지들이 집적되고 모자이크되면서 무한히 복제되고 증식되는 일상의 이미지가 초상화된다. 작가는 화장실을 촬영했다.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대수의 대중들과 공유하는 공중화장실의 내부를 촬영했다. 화장실이란 공간은 인간의 본능과 직결되는 곳으로 사회화되지 않은 어두운 욕망이 충족되기도 하고 여러 만남과 정보가 공존하는 곳이자 가장 내밀한 곳이기도 하며 현재 한국 사회의 생활상과 문화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소다. 이 화장실 작업 또한 이전작업과 연장선상에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메트로폴리탄의 자화상"이다. ■ 박영택 박성호(JS. Factory) ● 화장실을 찍은 작품들을 선보인다. 요즘은 깔끔한 주변 환경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때문에 예를 들어 카페나 술집이 화장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손님이 끊어진다. 그런데 깔끔함에 대한 요구는 환경에는 의외의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배설물을 농토에 뿌렸던 농경 사회와 비교하면 현대 사회는 배설물을 활용이 불가능한 상태로 처리한다. 게다가 배설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물을 함께 소비한다. 그저 지저분한 것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기 위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다. 박성호가 냉담하게 포착한 배설의 공간은 이처럼 불모와 은폐, 기만의 공간이기도 하다. 화장실은 깨끗해졌지만 배설 행위에 담긴 석연치 않은 감정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다. 어차피 배설물은 몸에 있는 구멍에서 나와서 몸 밖의 다른 구멍으로 들어간다. 구멍과 구멍 사이의 공간에서는 무슨 일인가가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늘 붙어 다닌다. 괴담이나 공포 영화에서는 재래식 변소 뿐 아니라 수세식 변소의 변기 속에서도 끔찍한 것들이 튀어 나온다. 뱀이나 여타 괴물, 심지어는 살아 있는 사람까지. 영화『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에서 약에 취한 주인공은 변기 속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고, 일본 영화『하나코(Shinsei toire no Hanako-san)』에서는 아예 화장실의 변기 구멍이 저승으로 이어진다는 관념까지 등장했다. 일본에서 연원한 건지 애초부터 한국에서 전해져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화장실에서 미래의 배우자를 본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밤중(자정)에 재래식 변소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면 미래의 배우자가 보인다"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뜯어보면 공포를 유발하는 장치를 있는 대로 겹쳐 놓고는 그것을 견뎌 내라고 주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입에 칼을 물고 거울을 봐야 한다는 내용도 곁들여진다. 거울을 보는 순간 칼이나 거울을 떨어뜨리면 미래의 배우자에게 불행이 닥칠 거라고도 한다. 박성호가 재래식 변소를 찍은 사진들은 변소에 대한 색다른 관념을 산뜻하게 드러내고 있다. 배설물을 비료로 활용하던 자연친화적 변소 한복판에 현대적인 변소의 부속물인 양변기가 들어와 있다. 주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 공간에서 양변기는 때로 희생제의의 공물 같기도 하고 때로 주술사 같기도 하다. 불이 환하게 켜진 현대식 화장실은 불모를 암시하지만, 색등과 촛불이 은은히 빛나는 이 재래식 변소는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 통할 것만 같다. ■ 이연식

Vol.20070708d | 뽁 뽁 이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