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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쿤스트라움 기획展
갤러리 쿤스트라움 서울 종로구 팔판동 61-1번지 Tel. 02_730_2884 kunstraum.co.kr
어느 몽상에 관한 ● 양재혁의 세 가지 서로 다른 방법으로 표현된 몽상들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몽상가' (2003년 작)에서 보여 지는 현실, 허구, 가치로 오버렙 된 한 장의 포스터를 연상시킨다. 현실에 존재하지만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지 못하는, 아니면 하고 싶지 않은 쌍둥이 남매 이자벨과 테오 그리고 메튜의 이야기가 양재혁의 작업에선 여과 없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몽상가들만이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쌍둥이 남매인 이자벨과 테오의 역할 모델을 페인팅과 포토/꼴라지에서 읽는다. 그리고 그들과는 조금 다른 몽상가 메튜를 만난다. 메튜의 연기는 전통적 방법의 확장된 범위 안에서의 회화/설치 이기도하다. 몽상은 이렇다. 현실적 관념에서는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가 필요 없는 이성을 말한다. 바로 여기에 정의 할 수 있는 세 가지 가치가 존재한다. 몽상 자체에 있거나, 그 사이에서 갈등하거나, 아니면 현실의 세계를 선택해야 하는 것. 극히, 단순 명료해 보이는 가치들을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몽.상.해. 나간다. 그럼, 그 만의 몽상은 무엇인가? 좀 엿보기로 하자. 그의 페인팅은 아주 단순하다. 형태, 색, 구성,,,,나열하기 조심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게 그려져 있어 심오한 어떤 깊이보다는 그려진 무엇인가를 보며 '아! 이건'이라는 건방진 생각을 같게 만든다. 헌데, 제목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복잡한 건 아니다. 무엇 무엇 하니 무엇 무엇이다. 원인과 결말이 분명한 문장구조이다. 단지 내용을 이해 할 수가 없는 게 문제일 뿐이다. 고민을 하게 만드는 암시는 어디는 있는 것일까? 있다면 '왜'라는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 명료한 그림과 비. 단. 순. 한 제목을 우린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가? 아니면, 구별하지 말을 까? 고민이 된다. 그래서 다시 그림을 본다. 방금 전 까지 느끼지 못한 어떤 변화가 보인다. 조금 의아하긴 해 도, 그림들의 눈은 분명히 어떤 암시가 보인다. 몽상가들은 각기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접한다는 사실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의 수가 다르다는 것. 사고가 보는 것으로 하여금 분해되어지는 자유가 몽상하는 쪽에 있는 것이다. 그림은 비로소 허구의 세계를 관여하는 자에게 허락한다. 나머지 생각은 각자의 세계에서 그림을 읽어나가면 되는 것, 바로 작가의 의도를 엿보는 재미가 여기에 있다. 현실에선 성별이 구분되어 있지만 상대방이 또 하나의 자신이라는 믿는 쌍둥이 남매의 허구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영화가 재미있어지기 때문이다. 테오의 의미는 갈등하는 구심점으로 출발한다. 누나인 이사벨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 포토/꼴라지가 그렇게 표현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테오가 겪는 성정체성으로부터의 허구에서 서서히 현실의 세계로 눈이 떠진 다는 점이다. 이것은 세계(삼)일 수도 있고 네 개일 수도 있는 정서적인 눈 개수를 의미한다. 성장기가 훨씬 지난 성인들의 이야기이지만, 아직 어린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허구라는 시각에서 보여 지는 양재혁의 평면 작업은 이제 서서히 테오의 그것처럼 갈등을 전재로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회화는 현실을 읽어내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양재혁의 허구는 그래서 성장통을 겪는 아픔이 뒤따른다는 점이다. 이점은 분명하다.
그러면, 나머지 인물 메튜의 연관성을 보기로 하자. 매체를 이용한다는 것은 그 속성상 회화가 표현되어지는 과정의 결과물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평면은 과정 그 자체의 속성들이 이루어 낸 결과이지만, 매체는 이미 결과물을 연상하고 만들어 가는 역과정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선행되는 과정은 그래서 스케치로 남아 있게 된다. 일종의 기록이 선행된다는 것, 경험인 것이다. 그럼, 여기서 메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작가 양재혁은 메튜를 어떻게 보게 되는가? 영화처럼 부연 설명을 하자면 메튜는 미국출신으로 실용주의자이다. 현실을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모더니스트인 셈이다. 그가 몽상가들과 함유하게 된 이유는 단지 이사벨의 아름다움만은 아니겠지만, 자유 분망한 몽상가들의 상상에 자신 역시 허구의 세계를 탐닉하고 싶어서는 아닌지. 더욱이 그것은 본능으로 다가가려는 에너지를 발산시킨다. '슈퍼맨이 돌아·~~~~~~치마를 내리고 있었다.' 작가의 본능은 여기서 찾아진다. 우리들의 히어로들 앞에서 말이다. 슈퍼맨과 건담이 있어야 그녀는 치마를 벗는다. 메튜는 이자벨의 처녀성을 탐닉하면서 테오의 성체를 분열시키고, 테오는 분열을 통해서 성장을 한다. 메튜는 사랑을 원하지만 이자벨은 테오의 그것과 같은 사랑을 메튜가 느끼길 원한다. 세 가지 모두가 이야기 거리이다. 헌데 그녀는 세 가지가 있어야 완성되는 삼위일체의 신성을 요구하는 몽상에 젖어있다. 아이러니인 것이다. 몽상은 그렇다. 작가는 건담을 이야기하고, 슈퍼맨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선행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숨기고 있다. 어디에도 원하는 에너지를 순수하게 보여 주려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작가 자신의 경험이 아직도 허구의 세계에 만족한다는 점일지 모른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그러하듯, 우리도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밖에 없다. 허구의 세계에 몸을 맡기던지, 갈등을 하던지, 현실의 세계로 나오던지, 각자가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는 현실의 가치를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읽어내려는 우리의 몽상일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보고 싶다. 그들의 순결한 상상들을! 우리는 그렇게 양재혁의 작업을 몽상한다. ■ Kunst Youn
Vol.20070708c | 양재혁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