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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627_수요일_05:00pm
큐브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37번지 수도약국 2층 Tel. 02_720_7910
실재와 비실재 혹은 존재와 비존재의 아이러니- 차두환이 던지는 첫 번째 화두 ● 실재하는 것 ● 차두환의 작품은 아주 명료하다. 그는 선으로 된 육면체를 만든다. 손 위에 올려놓고 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데, 한 뼘을 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크기의 문제는 일차적으론 전시공간의 제약에서 올 수 있고, 두 번째는 우리 시선이 그것을 포용 가능한 범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빛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육면체의 한 면은 반드시 그림자로 채워져야 하는 설치방식을 가진다. 그는 여덟 개의 선을 정교하게 이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벽에 부착한다. 대부분의 작품 설치는 여기서 끝난다. 그리고 그 위에서 불을 밝힌다. 육면체에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도 있다. 그는 화면의 크기 안에 지극히 평면적인 육면체를 만들어 고정시킨다. 그런 다음 별도로 제작된 동영상을 이 작품들 위에 비춘다. 영상은 육면체 내부에서 끊임없이 튕겨 다니는 작은 구슬이 전부다. 벽에 부착된 육면체, 이 육면체 내부를 채우는 구슬 이미지 하나.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전시장은 어떠한 사건 사고 없이 침묵이 흐를 뿐이다. 거기에 실재하는 것은 빛과 벽에 부착된 육면체뿐이다.
실재란 무엇일까, 물론 거기 있는 것이다. 차두환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실재'의 이미지는 육면체와 빛이 전부일 뿐이다. 하지만, 이곳이 전시공간일 뿐만 아니라 관객이 들고나는 유동적 공간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의 개념을 과학적 사유로 이해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오히려 선禪의 지시에서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운문雲門선사는 이런 말을 했다. "걸을 때는 걷기만 하고,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기만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절대로 동요하지 말라!" 우리는 차두환의 전시장에서 운문의 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육면체의 실재는 가만있지 않고, '걷기'의 동선에 따라 형상을 달리하며 허공을 돌기 때문이다. 이때 실재의 주체가 혼란에 빠진다. '나'와 '육면체' 둘 중 누가 움직이는 것이며, 동요하고 있는가! 멈춤과 움직임 사이에 발생하는 이 둘의 관계에서 '실재'의 존재론적 화두를 묻게 되는 것이다. 다른 선문의 기록을 보면, 나는 빈손으로 간다. 허나 나의 손에는 삽이 있노라. 나는 걸어서 간다. 허나 나는 소를 타고 가노라. 내가 다리를 건너갈 때 오호라!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흘러가느니라. ● 이는 참으로 역설이다. 그러나 이 긍정과 부정의 발언 속에는 현실을 뒤흔드는 '실재'의 핵심이 있다. 자, 말해보라! 물인가 다리인가! 이때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물인가 다리인가! 묻고 또 물어보자. 아마도 이 물음의 끝에 가면, 당신도 나도 어떤 합리와 이해와 삶의 철학 같은 무거움을 다 버리고 물이든 다리든, 아니면 꽃이든 칼이든 간에 참된 실재를 가리키게 될 것이다. 선의 핵심적인 방법은 세계를 개념화하려는 일상적인 태도가 특정 목적을 위해서는 유용하나 이러한 태도는 실체를 놓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념적인 세계를 깨뜨리고 나면 우리는 실재를 직접 체험할 수 있으며,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바 존재 그 자체인 경이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즉, '나'를 투사시키지 않을 때 현상계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셈이다. 그러므로 차두환의 작품을 볼 때는 차라리 아무런 편견과 이해의 형식을 내려놓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 안에서 육면체의 실재와 일치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어떤 '순수 의식'의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 ● 굳이 '가상'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은 그 언어가 지나치게 미디어적 속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에 대한 사유로 자신의 작품을 규정하려 한다.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이라 생각된다. 영상이미지를 사용한다 해서 그것을 가상공간과 등치시킨다면 이것은 큰 착오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그의 육면체가 분명히 '실재'할뿐더러 그 공간도 현실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시각 일루전'의 문제도 본질에서 벗어나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차두환이 우리에 제시하는 이 육면체의 핵심은 존재의 리얼리티에 있다. 이에 대한 비유도 선문에서 찾을 수 있다. ● 지혜의 나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밝은 거울의 받침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공일진대 어디에 먼지가 내려앉을 수 있겠는가? ● 선의 육조인 후에이 넝(혜능)의 시이다. 전시장에는 처음부터 육면체의 일부와 이를 비추는 빛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공간을 배회하며 숱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고민을 만드는 것은 그것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움직임은 나의 걸음이 원인인데, 나는 나를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자꾸만 고민에 빠져들게 된다. 잠깐일 뿐인 이 시간동안 존재의 착시가 발생하는데,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무시하거나 벗어나려 애쓴다. '나'는 '나'의 존재를 혼란에 빠뜨린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문제를 비켜나고, 그런 다음 망각해 버린다. 거기엔 비굴한 존재의 리얼리티가 자리 잡는다. 그러나 핵심을 바로 보려 한다면, 기실 거기엔 아무 문제도 없을 뿐만 아니라 흰 벽에 생긴 그림자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영상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벽에 부착된 육면체의 내부를 떠도는 실재하지 않는 구슬은 그림자로 완성된 육면체가 완전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다만, 그 뒤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잠시 동안 이미지의 착시현상에 빠질 것이다. 저 공간은 실재 하는가 아닌가. 저 구슬이 만들어 내는 공간은 저기인가 단지 이미지일 뿐인가. 그러므로 이것은 다른 육면체와 마찬 가지로 실재와 비실재의 물음을 던질 뿐이다. ● 차두환은 육면체의 공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질적 공간'이 아니면서 '시간적 공간'도 아니다. 일종의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공간인데, 이는 현실과 가상 사이의 '제3세계'이다." 여기서 '제3세계'는 '제3의 공간'를 의미하는 듯 하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제3의 공간, 이런 뜻일 터인데, 이는 수긍이 간다. 그러나 이를 쉽게 단정하는 것은 성급하단 생각이다. 영상 이미지이긴 하나 구슬을 넣어 공간을 확정하려는 시도는 다분히 '물질적'이며, 두 개의 전구를 매달아 두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시간적'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벽을 2차원으로 해석하고 벽에 부착된 육면체만을 3차원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림자로 인해 완성되는 육면체의 '실재'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또한 빛에 의해 벽이 사라지면서 공중에 떠 있는 육면체로 보여 지는 착시현상을 '제3공간'의 다른 차원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차두환의 작업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그는 시각예술의 환상성을 많은 부분 제거해 드러냄으로써 작품의 '아우라'를 처음부터 차단하고 있다. 그는 육면체의 선을 구성하는 가느다란 나무 외에 다른 어떤 물질도 사용하지 않는다. 중력과 무중력의 존재감을 실험했던 작품에서 조차 물질성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의 작품들은 개념의 과잉과 서사의 과도함에서 벗어난다. 미술의 외피를 과장해서 '눈속임'을 만들어내는 왜곡된 시각적 일루전이 우리 미술계에 얼마나 많은가. 차두환은 의미의 최소화를 통해 오히려 화두의 핵심이 강화되는 의외의 성과를 성취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그 자신이 개념의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위험도 산재한다. 이러한 부분만 조절한다면, 그의 화두는 미술계에 작은 파장을 형성할 수 있을 터이다. 자, 다시 물어보자. 당신(존재)의 먼지는 흰 그림자를 남길 수 있나요? ■ 김종길
Vol.20070627e | 차두환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