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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615_금요일_06:00pm
책임기획_이정훈
갤러리 터치아트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235번지 예술마을 헤이리 ㈜터치아트 Tel. 031_949_9437 www.gallerytouchart.com
四眞, 그 야누스의 얼굴 寫 眞 vs 詐 眞 ● 전시장에 걸린 사각의 프레임에 갇힌 눈 부시게 반짝이는 사진들이 관람객에게 묻는다. 당신이 바라보는 것이 사진(寫眞)인가, 사진(詐眞)인가. 현실, 사물, 시간의 기록이라는 사진에 대한 인식의 경계를 흔드는 사진들을 전시장에서 만난다. 신화에 등장하는, 문으로 된 경계선을 지키는 야누스(Janus)처럼 우리 앞에 놓인 사진들은 사진(寫眞)과 사진(詐眞)의 두 얼굴을 지닌다. 그리고 사진(寫眞)의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며 예리하게 맞닿는 경계로 우리를 유혹하고 그 경계 너머 사진(詐眞)의 얼굴을 드러낸다. 본 전시는 사진(photography, 寫眞)이라는 단어를 4명의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의미하는 사진(四眞), 진실을 베끼듯 기록한다는 의미의 사진(寫眞)과 진실을 속인다는 의미의 사진(詐眞)으로 변용하여 사진이라는 단어의 언어적 유희를 의미의 확대로까지 연장 가능성을 전시를 통해 모색해 보고자 한다. 본 전시에 참여하는 고상우, 박현두, 박형근, 한성필의 작품은 '사진'에 대한 기존의 개념을 너머 작가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법을 이용하되 사진이 가진 사실의 기록이라는 측면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사진(寫眞)너머 사진(詐眞)을 보여준다. 따라서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은 작품들이 그리는 그 경계에서의 이면과 저면을 만나는 유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의 기록과 재현 - 사진(寫:베낄 사 眞:참 진) ● 여기 이 사진을 보자. 푸른 녹음이 우거진 나무 사이로 풀장이 보인다. 평화로워 보인다. 가만,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자세히 보니 풀장에 사람이 떠있다. 옷을 입은 채 떠있는걸 보니 뭔가 심상치 않다. 왠지 사고나 사건에 의해 사망한 남자가 풀장에 방치된 것처럼 보인다. 섬뜩하다. 만약 이 사진이 배관공 풀장에서 의문의 익사사고라는 타이틀과 함께 뉴욕 타임스 2007. 6. 15일자에 보도된다면 일대 파장이 일 것이다. 'OO백화점 에스컬레이터에서 의문의 시체 발견'으로 에스컬레이터에 한 남자가 널 부러져 있는 사진을 우리가 유력 일간지를 통해 접하게 된다면 우리는 심각히 그 기사를 읽고 사진이 제공하는 정보를 불안함과 더불어 의구심으로 가능한 모든 사망원인의 가능성을 추론하고자 머리 속은 복잡해질 것이다. 자 약간 섬뜩했다면 이쪽 사진을 보자. 저명한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 '혈액처럼 붉은 토양의 열대식물 군락지 발견'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붉은 토양 위에 꽃이 만발한 사진을 만나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흥분하고 신기해 할 것이다. 더욱이 사진을 보면서 어떠한 의심도 없이 사실이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사진(寫眞)은 실물과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사(寫)와 내면의 정신까지 표현해야 한다는 '진(眞)'을 강조한 두 글자가 결합된 단어로 '있는 그대로'를 옮긴다는 뜻이 담겨있다. 빛(photo-) 으로 기록한(-graphy)것이라는 뜻이 담긴 영어 photography에 비해 '사진'이 대상의 특징, 본질을 옮기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이처럼 사진은 사실적 재현이자 기록적 측면에 있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으로 가장 강력한 시각적 표현도구이다.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연출된 진실의 기록 - 사진(詐:속일 사 眞:참 진) ● 여기 또 다른 사진이 있다. 공교롭게도 사진이라는 음성표기로서 동음이되 뜻이 틀린 말 사진(詐:속일 사 眞:참 진)은 말 그대로 사실을 기록한다는 기존의 사진이 가진 정의에 정면으로 대응하여 연출된 사실의 기록을 제시함으로써 고전적 사진의 정의를 전면 반박하여 사진이 가진 사실의 기록적 부분을 전면 부인하게 만든다.
여기 4명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사진들은 사진 자체가 가진 이미지의 조작과 연출이 좀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사진(寫眞)인 동시에 사진(詐眞)이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사진이 사진 일 수 있었던 객관성, 다큐멘터리적 사실성, 기록성 보다는 사진에서도 편차와 과장에 의한 공간의 확대, 분위기, 빛과 색의 조절, 네가티브나 포지티브의 적극적인 수정과 같은 기술적인 방법을 통해 대상의 자연스러움을 파괴하지 않고 상상의 폭을 넓히는 것이 가능하다. 마치 사진은 과학이 아니라 자연의 대상을 재현하는 예술 이라고 강연(1853年)한 월리엄 뉴튼의 주장을 옹호라도 하듯 이들은 기존의 사진에 대한 개념을 너머 작가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법을 이용하되 사진이 가진 사실의 기록이라는 측면을 자연스럽게 연출해냄으로써 사진(寫眞) 너머 사진(詐眞)을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사진(寫眞)이면서 사진(詐眞)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를 던지며 사진의 정의의 확대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이들의 교란작전은 엄밀히 말하면, 이는 재현된 사진을 인식하는 인식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들이 진행하는 일련의 결과물들은 사실적 재현에 근거를 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면서 사실적으로 연출, 조작하고 변형을 가한 기록의 결과인 '사진(詐眞)'을 제시하고 사진(詐眞)을 사진(寫眞)으로 인식하게 하는 교란작전을 통해 기존 사진이 가진 정의의 확대가능성과 시각적 사고에 대해 반문한다. 환상이 만들어낸 실재하는 것 같은 이미지를 접하게 하는 그 시각적 즐거움을 사진이 가진 그 확고한 믿음에 근거한 속성을 통해 전달하게 되는 이 점이 이들 사진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 이정훈
Vol.20070616g | 四眞, 그 야누스의 얼굴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