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현展

갤러리스케이프 기획 초대展   2007_0614 ▶ 2007_0703

유정현_Transi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18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스케이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614_목요일_06:00pm

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종로구 가회동 72-1번지 Tel. 02_747_4675 www.skape.co.kr

상처로 얼룩진 피부"나는 백조의 저주를 적어두어야만 했다. 황금 마차는 가로수길 끝에서 분리되어 쓰러진다. 그리고 비에 젖은 거리에서 녹아버린다. 형형색색의 나비 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요란한 소란이 하늘을 채운다. 아, 붉은 고기 덩어리와 푸른 클로버들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간다." 메렛 오펜하임 ● 1957 한 쌍의 남녀의 피부위에 꽃들이 활짝 피어 있지만 꽃봉오리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터져 나오는듯한 꽃들이 그려진 피부를 마치 상처처럼 파열시키고 딱지지게 한다. 유정현은 피부의 표면들을 탐구한다. 그녀는 피부를 난도질하며 해부하지 않고, 그림도구들을 이용해 피부의 층 내면으로 더 깊게 들어간다. 그녀는 상처들을 딱지지고 흉터지게 놓아두고, 여러 층으로 그려졌던 피부의 모든 상태와 변형을 보여주며, 상처 입음의 모습을 마치 꽃의 만개함, 꽃이 떨어짐과 더불어 치유의 상태로 드러낸다. 색의 층들은 꽃의 개화, 만개, 건조와 응고의 과정을 딱지가 생기고 다시 새롭게 터져 나오는 순간까지 전달한다. 유정현은 치유와 같은 순간을 이러한 과정들 사이에서 유영하게 하는데, 그 순간은 가시적이지만, 동시에 비가시적이다. 유정현은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덧그리고, 다시 긁어낸다. 그리고 새로이 덮기 위해 파해 치기를 반복한다. 즉, 맨 위의 층이 바닥 층을 완전히 덮지는 않는, 층 위의 층, 구조인데, 왜냐하면 거친 캔버스가 주름이나 긁힘 없이 색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섬세한 기관인 피부는 숨쉬고, 한기를 느끼고, 쉽게 상처 나고, 색이 변하고, 태양에 그을리고, 착색되기도 하고 타기도 하며, 마침내 단지 한줌의 재로 남는다. 이 예민한 자아의 외피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물질의 형태를 쉽게 취할 수 있는데, 종교인 뿐 만 아니라 이교도의 모든 종류의 의식 속에서 최후에는 관에 담겨 매장되거나, 재가 먼지가 되어 공기 속으로 사라지거나, 또는 깊은 물속에 수장된다. 이 섬세한 외피는 우리의 사유이자 영혼이다. 마치 재처럼 잿빛을 띠고 흰색 위에서와 거친 표면의 직물 위에서 시각화 된다.(...)

유정현_Transi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180cm_2007

아름다움의 근원에 관하여 ● 내가 본 유정현의 첫 번째 그림은 수천 개의 그림이 걸려있는 어느 아트페어였는데, 그림 안에는 생소한 색감의 여러 가지 빛깔의 한 커플이 서 있었다. 이 커플은 낯선 몸짓 속에서 동시에 서로 외면하고, 절망하고, 괴롭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얼굴이 없는 마술적인 커플의 몸의 형상은 남자와 여자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피부의 꽃들은 아직 붉은 무늬들이다. 그 무늬들은 이어지는 그림들에서 점점 더 검어졌지만, '악의 꽃(Les Fleurs du mal, 보들리에)'은 아니다.

유정현_no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65cm_2007
유정현_nod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65cm_2007

자아의 외피를 벗다."그리고 밤에 오세요. 그들은 아침에는 오지 않아. 모든 나지막한 까마귀들 앞에서 그들의 얼굴을 깨트려라" 메렛 오펜하임 1934 3) 운반을 위해 캔버스에서 떼어진 그림들은 여러 층으로 그려진 피부 와 얼굴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이런 캔버스에 떼어진 상태의 유정현의 신작들은 마치 이미 사라졌고, 사라져가는 잿빛 얼굴의 흔적과 더불어 수의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내 캔버스 틀에 다시 팽팽하게 짜여진 그림들은 그 매혹을 발산 한다: 노파들과 어린아이들, 그리고 나이를 알 수 없는 이의 자화상들. 캔버스는 피부의 색조를 탐구하는데, 그것은 거칠고 매끄럽지도 않고 보호막을 입히지도 않았다. 결국 안료들은 초월적이고 전위적인 상태에서도 봉인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매 순간 그림 위의 한 공간뿐 아니라 그 어느 공간에서도 작은 흔적을 남긴다.

유정현_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50cm_2005
유정현_도강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65cm_2005

몸에서 예술이 떠난다는 것 ● (...) 몸에서 예술이 떠난다는 것과 자아의 외피를 떠났다가 (새벽이나 부활절 아침 여명에 환생하기 위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전 세계의 모든 종교들에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된다. 어둠의 예술인 헤브라이 신비주의의 카발라가 최고로 숙련된 것들 중에 하나에 속한다. 오늘날까지 카발라의 학교는 여성들을 거부한다. 여성들은 마돈나들로, 어머니들로, 여전사들로, 전설의 아마조네스와 여군들로서 잔인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꽃들이 그녀들을 찬미하며 받쳐지고 헌화된다. 꽃들은 색들의 농담들을 만드는데 무엇보다도 마른 피처럼 매우 어두운 붉은 색이 그렇다. 그리고 붉은 색은 사랑의 색으로서 하나의 도전이고 종종 에로틱한 도발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색은 무죄와 죽음의 색인 흰색이며, 불교에서는 열반과 더불어 전무와 전체의 색이다. 이 열반은 하나의 초월이며 더불어 아마 어떤 해법과 전환, 그리고 광채이다. 죽으며 발산하는 마지막 광채 혹은 최초의 불빛은 모든 어둠을 밝힌다. 어쩌면 재가 아니라 측정할 수 없이 거대한 공간들과 예측할 수 없는 시간들로 만들어진 영겁의 시간 동안 생긴 별들의 먼지일지도 모른다. 이 먼지는 때때로 캔버스 천위와 수의들 위에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채의 순수한 잿빛 색 층으로 등장한다. ■ 크리스티나 벤덴부르크

Vol.20070614g | 유정현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