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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613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스산한 지평을 가르며 빗자루로 마당을 쓴다는 것은 깨끗해진 다른 세상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는 현상 일수도 있고 정화의 카타르시스 일수도 있다. 그러나 쓸고 있는 행위자체를 즐긴다면 이야기는 다르게 다가온다. ● 김철우. 그는 텁텁하고 푸근한 수채화지 위에 십 수 년 낯익은 산야를 그려 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화구를 챙겨 이른 새벽에 떠나는 그를 상상해 본다. 해가 짧은 겨울에는 먼동이 트기 전에 집을 나설 것이다. 마치 노동자가 일터로 나가듯, 일상이 되어버린 떠남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그가 만나고자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 암울했던 80년대 초 서울의 봄은 물 건너갔고, 모든 것이 침묵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온 나라가 정신적 공황 상태로 숨죽이고 있을 때 그의 시선은 밖으로 향해 있었다. 바깥이라는 출구가 필요했던 게다. 바깥은 모든 것을 포용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들판에서서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해 본다.
일찍이 니체는 가장 작은 것에 함몰 할 수 있는 용기야 말로 진정한 용기라고 했다. 적막한 산사의 뒤뜰에 작은 돌배나무, 볼품없고 쓸모없는 나무에서 하얀 꽃이 피어나고, 한겨울 폭설에 꺾이고, 비바람에 찢겨진 산 자두도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다. 호흡을 멈추고 대상을 들여 마신다. 시간이 정지 되고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유구한 공간에서 떠도는 의식의 편린은 한낱 허무한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산모퉁이 돌아 우연히 마주친 풍경은 지친 그에게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사유의 단서를 던져 주며 말을 걸고 있다. 김철우의 여정은 끝없는 만남의 연속이고 그 기록이었다. ● 천 리를 불어온 저 바람도 저 산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만 리를 흘러온 저 강물도 저 바다를 채우지 못 하누나 ● 옛 선조의 자연관은 합리적인 해석 이라기보다는 경외감에서 오는 체념의 개념이 담겨있다. 사물에 대한 명상적 관조의 세계는 동서양 크게 다를 게 없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다를 수 있다. 명상적 세계로 접근하는 작가 Richard long은 1968년 England라는 작업에서 초원에 피어 있는 데이지 꽃들의 머리를 잘라 십자 모양의 흔적을 만든 매우 공격적인 작업을 시도 했다. 그는 자의적 행위의 결과로 변형된 자연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자연과 조우하면서 소통하고자 하는 접근 방법은 김철우와 유사하지만 김철우와 Long은 통시적 사색 과정을 거치면서 확연히 구분 된다. Long이 결과를 중시 했다면 김철우는 행위 자체에 머무를 뿐이다. 생명의 신비함이나 대자연의 근원적 성찰의 접근 방법이 살아온 환경과 학습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 김철우는 원색의 데이지 꽃이 아니라 비온 후 은은하게 풍겨오는 깻단 냄새가 나는 작가다. 적당히 풍상을 비켜 세월의 리얼리티를 즐길 줄 아는 허허로운 친구다. 그가 찾는 대상이 무어냐고 묻는 것은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왜 산에 힘들게 오르려고 하느냐고 묻는 우문과 같다. 그의 일상이 되어 버린 실경사생은 보여 지는 희열 보다는 대자연 스산한 지평을 가르며 느끼는 자아의 확인일 게다. 그의 찬바람 머금은 풍경 앞에 서면 불현듯 가슴 한쪽 깊은 곳에서 스물 스물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연민이 느껴진다. 그의 작업은 시각적 환영이 아니라 진솔한 체취에서 우러나오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산야를 가로 지르고 있을 그를 상상해 본다. ■ 김관수
작은 황소 - 작가 김 철우 ● 나는 그를 작은 황소라고 부르고 싶다. 항상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한결같이 깊은 자기 성찰로 세상을 바라보며 山을 사랑하고 山을 즐겨 찾으며 山에서 배우며 山을 즐겨 그리는 작가 김 철우, 그는 젊은 날 현대미술이라는 흐름 속에 있었지만 과감히 그 추상적 모호함을 버리고 사실주의 수채화가로서의 길을 선택한 작가이다. 작가가 산을 좋아하는 것은 산의 그 중후함과 安心을 찾는 인간에게 거대한 가슴으로 항상 품어주는 무언의 현자처럼, 계절 따라 많은 변화를 보여주지만 변하지 않는 그 한결같음, 사람의 성품이 갈수록 경조부박 해 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작가는 가슴 깊은 곳에 山을 닮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주위사람보다 특이 한 것은 젊은 날부터 여행 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해서 바쁜 와중에도 수채화구 달랑 짊어지고 전국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멋진 풍경을 즐기며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요즘 세상은 물질주의 팽창으로 경제 원리로만 치닫는 흐름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며 생명의 본성을 잊어버리고 物 그 자체에 끌려가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얼마만은 고통스럽다는 인식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큰 흐름에 마냥 몸을 맡겨 버리고 만다. 삿된 영리함으로 경제 원리와 이기의 원리에 물들여진 우리들은 그 속성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현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생명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정신 훼손과 파괴의 바이러스가 우리사회 도체에 만연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우리의 삶에 어떠한 역할을 지향해야 하는 가 자문해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수개월 동안 유럽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의 붓을 들어 외국의 풍물과 자연을 그렸다. 그의 형편에서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렸던 것을 나는 안다. 떠나기 전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기를 주저 없이 북돋았다. 그의 눈 속에서 소의 눈처럼 순수하고 담담한 열정을 느꼈으며 그를 아끼는 마음이 내 가슴속에 출렁거림을 느꼈기 때문 일 것이다. 나는 그를 작은 황소라고 여기고 있다. ● 요즈음 현대미술의 주류에서 보면 수채화는 얼핏 진부한 방법처럼 느껴진다. 현 미술의 전반적인 동향이 지나치게 물화되어 그 스케일에 신경을 곤두세워 대중에게 작고 부드러운 어떤 일면을 보여주지 못하며, 그림의 본질을 지나치게 외면하고 있는 현상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옛 동양의 작가들은 물의 본성을 잘 이해하여 화지와 물의 교섭을 지혜롭게 잘 다루어. 나타나는 현상 뿐 만아니라 그 작용하는 곳에서 깊은 사물의 정신성을 배워 멋진 작업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었다. 담백함과 기품. 투명성과 절제. 동양화가 그러하고 서예가 그러하다. 수채화에 그러한 엣 선인의 기법과 정신성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구의 유화방법이 물감을 밖으로 밀어내어 혼합되어 나타나는 것과 반대로 수채화는 종이와 물감이 서로 스며들어 같이 상응하면서 작용함으로 그 미묘한 변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맑고 부드러움을 배우게 한다. ● 작가 김 철우의 수채는 지나치게 현란하지 않으며 지나치게 감각적이지 않다. 극도의 번짐 효과를 억제하며 절제한다. 가볍고 부드러운 재료를 너무 가볍게 보이지 않도록 조율하는 것 같다. 그는 그렇게 수채를 한다. 젊은 날 그의 드로잉 솜씨는 남달랐다. 물체의 형태를 잡아내어 객관화 시키는 솜씨가 일품이었고 색을 다루는 솜씨가 그러하였다. 이러한 타고난 재기가 현 작품에서도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형과 색채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교묘히 나타내 보여주고 있으며 정적이면서도 힘이 있는 선묘는 보는이로 하여금 가슴속에 환한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 ● 아무튼 이번 전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를 기대하며 앞으로 멋진 작품 많이 하기를 크게 기대하고 항상 그렇게 살았듯이 소처럼 주인을 섬길 줄 아는 義로움과 묵묵함으로 걸어가는 작가가 항상 되어 주기를 기대하고 또다시 만나서 술 한 잔 읍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를 또한 기대하며 몇 자 적었다. ■ 조주호
Vol.20070613a | 김철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