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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530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2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정인숙 -풍경의 의식 ●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세잔 아름다움이란 자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만들지 못한다. 다만 자연이 아름다움을 낳고 인간은 그 아름다움에 가닿을 뿐이다. 자연에 이미 들어와 박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생각해보면 아름다움이란 결코 인간에 속해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으로 간다. 그곳에 인간에게 부재한 절대적인 미가,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 현기증 나는 신비가 피어난다. 그러나 사실 그 아름다움조차 인간의 몫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드러내고 발견하고자 하지만 자연은 결코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보일 듯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얼핏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항상 살아있고 약동하며 수시로 변화한다. 우리들 시선이 눈을 주는 대로 자연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정될 수 없고 정지 시킬 수 없는 것이 자연의 매력이다. 그것은 영원히 포착되기를 거부하고 지속해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잠들지 못한다. 사진은 감각을 끌어 모으는 과정을 통해서 그 자연에 도달하려한다.
정인숙은 자신의 작업실 주변인 양평과 그 주변, 혹은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소요하고 그렇게 떠돌다가 문득 만난 이 땅의 자연을 찍었다. 너무 아름답고 황홀하기에 찍었다. 찍고 또 찍다 보니 자연은 거대한 텍스트였다. 자연의 이치가 눈에 들어오고 식물의 생애와 농사짓고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애가 겹치고 생태와 환경문제 등 이런 저런 상념들이 어지러이 선회한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남한 전역을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촬영한 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사진이다. 경기도 양평과 남한강, 북한강, 인천 백령도, 강원도 정선, 홍천, 인제, 고성, 평창, 삼척, 양양, 충남 서천, 보령, 금간, 홍성, 새만금 갯벌, 전북 무주, 전남 구례, 광양, 소흑산도, 경남 함양, 경북 영덕, 섬진강, 제주 협제와 한림 등이 작가가 찍은 장소다. 특정 지역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발 닿는 대로, 머무는 대로 촬영했다. 그러나 사진 속에는 그 지명과 관련된 어떠한 시각적 정보도 없다. 특정 장소를 표상하는 사진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흔하게 접하는 자연의 모습이다. 우리 산천에서 흔히 보는 그런 비근하고 일상적인 장면이다. 풍경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풍경적인 것이 별도로 자리하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그럴듯한 경관을 찾거나 관습적인 풍경의 프레임을 반복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풍경은 검은 색조의 무한한 계조 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받으며 뒤척이고 일렁인다. 그러나 낭만적이거나 숭고하지 않다. 관념적이거나 개념적이지도 않다. 솔직하고 소박하다. 바로 지척에서 건져 올린 시선에 의해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당하다. 개념에 따른 자연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자연대상을 낚아챈다. '사유에 따른 판단의 그물에 걸려들기 전의 생생한 자연, 인간의 사유가 폭력을 가하기 전의 그 날것으로서의 자연'이다.
화면 가득 대상이 가득 차지하고 있다. 수평으로 자리한 대지의 신체에 육박해 들어간 시선이다. 바닥을 훑고 나간 궤적과 시간이 느껴진다. 이 시선은 무심하게 수락하는 자연의 너그러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오랜 보행과 소요의 길고 착실한 이동의 경과에 따른 시선이다. 원근적 시선이 아니라 대지의 시선, 이동의 시선이다. 그로인해 사진은 생성과 소멸의 시간을 아늑하게 풀어놓는다. 얼핏 동양의 산수화를 보는 듯도 하다. 알다시피 동. 서양의 공간구도의 근본적 차이는 사물을 보는 눈의 위치를 어디에 있는 것으로 설정하느냐 하는 점이다. 서양의 원근법은 고정된 한 눈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가시적 공간을 구성한다. 서양의 회화적 구도는 자아와 세계를 서로 분명한 구획을 가진 고정된 실체들의 관계로서 파악한다. 반면 동양화에서는 고정된 하나의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 혼융상태에 있다. 자연의 형태란 다만 고정된, 물리적인 실체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특질도 지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는 고정되지 않는다. 세계는 정지태가 아니라 운동태며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며 고정이 아니라 떨림과 흔들림이란 것이 동양인들이 깨달은 공간, 세계였다. 서구인들처럼 인간이 세계를 고정시킬 때 그 결과물은 개념적 언어이거나 또는 원근법에 의해 프레임 안으로 걸려들거나 카메라 뷰파인더 속의 사각형 속에 갇힌 이미지일 뿐이다. 우주의 끊임없는 변화의 장으로 부터(객체로서의) 실체가 분리되고 (주체로서의)실체 또한 사상되는 것이 그래서 동양의 그림이다. 모든 것은 실재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인 셈이다.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었다. 결국 그 응시 법은 다원적 시점이고, 움직이는 시점이 된다. 아울러 복판에 내재한 시점이다. 시점을 풍경의 복판으로 옮겨가는 것 즉, 그림 안에서 움직이는 관점인 것이다. 바로 정인숙의 사진에서 보는 그런 시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존의 시선'이다.
별반 특이하거나 유난스럽지 않아 보이는 대상이지만 빛을 받아 스멀거리면서 일어서는 자연은 신비스럽고 황홀하다. 빛이 비로소 자연을 자연이게 한다. 작가는 그 빛에 마냥 매료되었다. 빛은 자연의 표면을 편애한다. 작가 또한 그 편애한 빛을 추종한다. 그러면서도 표면 아래 은폐된 심층, 내부가 그 빛과 함께 떠오르기를 원한다. 황홀의 기억이 사진으로 가 멈췄다. 땅과 풀, 나무와 바위, 그리고 흐르는 물과 대기가 온통 빛으로 인해 부감된다. 촉각적인 사진이다. 작가는 저 자연의 미세한 율동, 리듬, 호흡, 그리고 모락거리는 기운, 비늘처럼 반짝이고 뒤척이는 이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지닌 자연을 보는 이에게 감각적으로 만나게 해준다. 작가는 그 풍경과 하나가 되어 풍경의 의식을 가지고 풍경에 대해 발설한다. 풍경 스스로가 말하게 한다.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고 이미지도 없다.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빛에 의해 응고되어져, 광물질의 표면처럼 빛나기도 했고, 부서지는 색채의 가루로 소멸하기도 하고 흐린 대기처럼 엷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끊임없는 변모가 자연의 실체다. 수시로 자연은 색을, 밀도를 바꾸고 있다. 자연은 쉼 없이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과 역사가 자연에 내장되어 있다. 단단한 질료와 희박한 질료 사이를 오가며 자연은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색들을 시시각각 발산하고 있다. 이 싱싱하고 파득 거리며 날것으로서 뒤척이는 자연의 몸, 물 자체가 손에 감촉될 것 같다. 정인숙의 사진은 감각덩어리로서의 자연, 그 빛을 잡아 놓는다. 사진이 결국 빛이라지만 빛을 이렇게 아늑하고 따스하고, 차갑고 예리하면서도 다채롭게 보여주는 사진은 드물다. 인간의 언어로 포착되기를 거부하는 자연의 색과 빛은 그저 희희낙락할 뿐이다. 작가의 눈과 마음도 그 흐름에 기생한다.
이 풍경은 한국인의 삶이 터전이고 그들의 생과 사가 온전히 하나로 묶인 공간이다. 이곳에서 농사짓고 생을 영위하다 그 땅 어딘가에서 조용히 썩어갔을 수많은 목숨들은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자리에 나무와 풀과 꽃, 돌과 물은 변함없이 피고 지고 흐르다가 머문다. 땅은 그 안에 모든 시간의 기억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어디선가 발원한 물줄기가 지표의 변화를 일으키고 자국을 드러낸다. 작가는 흙바닥에서, 나무와 풀과 꽃 그리고 자연 대상 모두에서 엄청난 이미지의 발화를, 몽상을 자극하는 자취를 듣고 만난다. 이 사진 속 자연에는 사람의 그늘이나 흔적이 부재하다. 모든 문명의 상징들은 지워져있다. 오직 나무와 풀과 물, 그리고 바람과 햇살만이 가득하다. 일렁이고 흐르고 스치면서 시각과 청각에 잠시 머물다가 이내 또 다른 감각을 자극하며 산개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작가의 시선과 렌즈가 슬그머니 들어갔다 나왔다. 그 결과 한 장의 사진이 문득 알처럼 빠져나왔다. 보이는 자연과 보는 자, 느끼는 자 속의 자연이 한 몸으로 결합되는 데서 사진의 삶이 성립한다.
대부분 땅과 물이 있는 풍경이다. 바닥에 붙어 다닌 시선에 의해 포착된 대지는 흙의 질료 성을 드러내거나 풀에 가득 덮여있거나 물에 잠기거나 물이 스며들어있는 모습이다. 정인숙의 사진에서 유독 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와 강, 논 그리고 땅에 스민 물의 자취들이다. 땅은 늘 물과 함께 자리한다. 물의 경계가 땅이고 땅의 변방이 물이다. 작가는 그 접점에 주목한다. 강을 건너지 못하는 땅과 땅을 덮지 못하는 물들이 경계를 만들고 공간을 구획하고 그 어딘가에 인간들의 삶의 자리가 부려진다. 동양에서 이 물은 모든 사유와 철학의 근간을 제공했다. 농경문화와 주어진 자연조건 속에서 그 같은 인식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형태의 다양성과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는 물은 자연이 이치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우주 원리들을 개념화하는 주요한 모델을 제공했던 것이다. 덧붙여 물에서 자양분을 제공받는 식물은 특별히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뿌리 은유로서 사용되었다. 그래서인지 물을 그린 그림, 물이 들어간 그림이 동양 전통회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은 우주자연의 이치를 함축하고 있는 존재며 인간사유와 행동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정인숙은 논과 대지에 들어오고 나가는 물의 자취를 담았다. 촉촉한 물기가 대지에 스며든다. 모들이 고개를 내민다. 물에 박힌 모, 생명체들이 물과 함께 대지에서 자라난다. 촘촘히 떠있는 수초들이 모습은 부표 같다. 직선으로 흐르는 물과 수직으로 자라는 풀들이 표표히 떠돈다. 물의 주름과 풀들의 신체가 마치 드로잉처럼 자리했다. 매력적인 드로잉이다. 잔잔한 물의 피부의 흐름에 총총히 떠있는 풀들은 부드럽고 유장하고 아늑하면서도 슬프다. 수면에 밀착시킨 사각의 프레임은 오로지 물의 신체와 주름, 촉각적인 동시에 물리적으로 밀려들어오는 시간성을 부드럽게 자극한다. 막막하다. 그러다가 시선은 다시 물가로 나간다. 전면에 물만 가득하다. 수면은 구름과 햇살, 하늘과 움직임에 의해 변화무쌍하다. 짙고 번들거리며 마냥 흔들린다. 수면에 솟은 가장 높은 물의 피부가 지렁이의 신체를 닮은 선을 만들고 떠간다. 물은 이렇듯 다변하다. 물가 저쪽으로 풀밭이 가득하다. 작가의 시선은 땅에서 물가로, 다시 바다로 몰려갔다가 이내 뭍으로, 개펄로 다시 풀 섶과 논바닥과 흙더미, 버려지고 섞어나가는 배추밭으로 움직이고 이동한다. 훑고나간다. ● 아울러 정인숙의 사진은 한국인의 공간, 한국의 자연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인간은 특정한 공간에서 산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장소인 그 공간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가설하고 부려놓으면서 삶을 영위한다. 사실 그 공간은 추상적인 것이다. 공간은 인간의 사유에 의해 탄생한다. 모든 공간은 그러니까 인간 사유가 서식하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여백인 셈이다. 인간의 감각활동이 하나인 예술이란 무엇보다도 주어진 공간에 제약을 받고 그 공간에서 파생된 삶의 체험과 감각, 느낌의 결정체를 말한다. 아울러 예술은 역사적, 지리적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객관화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사진이미지란 인간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행위이다. 나를 둘러싼 이 환경,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들여다 볼 것인가가 모든 예술행위의 근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 이전에 유일한 생의 조건이다. 우리는 모두 내 육체 앞에 놓여진 모든 것들을 일정한 조망, 퍼스펙티브 속에서 바라본다. 본다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다. 예술의 역할은 인간으로 하여금 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예술에서 보는 것이란 본다는 것의 여러 가지 의미에도 불구하고 직관을 의미한다. 이 직관은 지적 지식이 아니라 지각에 의해서 대상의 내부에 뚫고 들어가 대상이 가진 내성과 합일하는 공감이다. 일정한 조망의 거리, 퍼스펙티브를 확보했을 때 인간은 사유하고 깨닫고 인식한다. 그런 거리감이 결국 공간, 풍경에 대한 하나의 사고일 것이다. ● 정인숙의 사진은 너무나 '사진적'이다. 한 장의사진에 담긴 자연풍경은 아름답고 고혹스럽다. 정직한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작가의 인성과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소요의 결과이자 수없이 많은 작업 양과 프린트의 숙련에서 비로소 가능한 작업이다. 사진이 사진을 이길 수 없다. 풍경이 풍경을 넘어설 수 없듯이 말이다. 작가의 이 흑백사진은 모든 예술의 단순화의 원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흑백의 화면에서처럼 자연의 소리와 빛을 단순하게 듣고 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박영택
Vol.20070602g | 정인숙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