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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602_토요일_06:00pm
아트스페이스 휴 서울 마포구 서교동 464-41번지 미진빌딩 1층 Tel. 02_333_0955 www.artspacehue.com
Technology is beautiful. Technology is crisis. At the highest point in Asia, I see a beautiful crisis. When beauty becomes crisis I know beauty is always ephemeral.
무의식적 기호의 생산과 이미지 그리고 삶의 프로젝트 ● 사회는 어떤 특정한 기호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은 기호를 통해 사회내적 존재의 질적인 특성들에 관해 이야기할 뿐만이 아니라 미학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정의하려고 한다. 예술계 외부의 대부분의 기호들은 행위와 실재가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일차원적 상황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고, 현상 자체를 정의하려는 기계적인 자기동일성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재욱은 그의 작품에서 기호를 창조하고 그 기호를 파괴하는 과정 자체를 반복한다. 그리고 파괴된 기호들의 잔유물들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존재로 변형(metamorphose) 시킨다. 작가는 이런 자신의 행위를 과정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과정은 예술적 선후관계의 강한 연결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계기적인 변화, 매순간 변증법적 자기동일성을 스스로 확정짓고자 하는 예술적 의지의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아트스페이스휴는 "Temporary Technology"라는 테마를 가지고 프로그램 작가를 선정해 작가들 개인적인 시각에서 (일시성을 지닌) 기술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기술의 일시성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기술이 업데이트 되는 과정에서 존재론적인 변형을 통해 발생론적으로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해석과 시간을 통해 전혀 다른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술적인 일시성이라는 범주로부터 우리는 거시적인 시각의 현상적 통일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미시적인 차원에서의 구체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기술, 순간적으로 소진되는 기술의 당대적인 에너지는 다른 차원의 기술적 지평을 제시해주는 방향성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아트스페이스휴는 그것을 작가들의 몫으로 남겨놓은 것 같다.
이재욱은 기술을 아름다움(Beauty)과 위기(Crisis)라는 두 단어를 통해 정의하고자 한다. 그에게 아름다움과 위기는 동의어이다. 그러나 두 개념이 실제로 동일한 의미를 가지게 되면 아름다움은 치명적으로 투명해짐으로서, 더 이상 의미론적으로 기대할 것이 없는 덧없는 상황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아시아의 가장 높은 곳에서」의 스티커를 통해 재구성되는 도시의 모습들은 우리에게 발전이라는 의미와 존재의 질적인 조건들이 동등할 수도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작가에게 발전과 존재의 질적인 차원은 동등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재욱에 따르면 도시의 외양은 우리가 의식하는 세계이다. 인간 의식의 세계는 구조를 향한 의지의 세계이고, 의미를 창조하려는 대표적인 인간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시개발의 이면에 남겨진 자연, 도시 건설을 위해 파괴된 자연, 도시가 의지하고 있는 자연은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불안해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재욱의 도시 이미지들은 사진으로 재현되고, 재구성된다. 그러나 도시라는 본질은 이미지 자체처럼 허구적이다. 그러나 이재욱이 스티커 작업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도시의 이미지들은 도시 고층빌딩들의 높이만큼이나 우리에게는 객관적으로 제시되는 대상적인 속성들일 뿐이다. 여기서 작가의 또 다른 시각이 개입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도시를 바라보는 행위, 특정한 빌딩의 내부에서 스티커 이미지를 통해 변형된 이미지의 도시는 장소특정적인 예술행위의 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장소 개념은 사진이 작품행위의 기록이 아니라 작품자체로 변화되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재욱의 작품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장소를 변화시키고자 하려는 의지보다는 장소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예술적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면에서 오히려 장소산출적인(site-generated) 작업인 것이고, 도시라는 장소의 이면에 마치 우리 무의식의 심연처럼 존재하는 자연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의 논리적 절대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적 개념의 전개과정은 존재론적 조건들에 대한 반응을 통해 원인되고, 특히 예술작품에서는 시각적인 사유를 통해 개념 탐구 과정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물리적인 방법과 예술적인 의도의 동일성이 일차적인 중요성을 가지기는 하지만 해석의 차원에서는 진리의 영역과 관련이 될 것이다. 단시간 내에 도시의 여기저기에 조성되는 고층건물을 통해 단순히 아시아 사회에서의 초고속의 발전만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시각적 단순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차원의 논리적 환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재욱은 아직 명확하게 스스로 개념화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작품에 상대성에 의해 확보된 사유의 공간이라는 의미론적 영역을 개입시킨다. 의식의 한계와 무의식의 깨달음, 도시의 확장에 비례하는 자연의 파괴, 도시의 폐기물과 유기적인 세계의 사멸화, 물질적인 세계에 상응하는 비물질적 세계의 중요성 등의 개념들이 그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영역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작가에게 사회적 기호는 예술을 통해 반성되어야만 하고, 작품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는 실재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진리와 동등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불확실성은 인간 생존의 활동영역 어느 곳에서나 물질적이고 정신적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예술은 그 같은 불확실성들에 의해 규정되는 의식의 차원들을 무의식적이고 유기적인 진리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된다. 물론 진리성 자체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계의 현상적인 기호들이 가지고 있는 양태들에 대해 적극성을 가지고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이 세계 속의 사건들에 대한 매혹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관심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모더니즘 적인 이성적 시각의 그늘에 가려 지각하지 못했던 것들, 모더니즘적인 소비주의적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논리성 이면에 존재하는 예술적 차원의 이슈들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수 있는 삶의 프로젝트를 만들어내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재욱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혹은 미학적 행위의 기록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정용도
Vol.20070531f | 이재욱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