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면서 그리는 일기

이현정 회화展   2007_0503 ▶ 2007_0509

이현정_일기 no. 1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05

초대일시_2007_0503_목요일_06:00pm

갤러리 영 기획초대

갤러리 영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140번지 Tel. 02_720_3939

회화, 기호의 해독제(解毒劑) 또는 무능력한 문자의 보철(補綴) ● 일기가 불쑥 자신의 비밀의 방을 열고 들어올 독자를 염두에 두는 형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일기는 은밀한 기록이자 자신이 유일한 독자인, 따라서 '소통의 기술'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는 글쓰기의 형식이다. 하지만 바로 이와 같은 성격으로 인해, 일기는 본능적으로 타인에 대한 의식과 긴장을 내재하고 있는 형식이다. 타자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주장되는 '비밀의 방'은 무의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기는 본질적으로 노출과 은폐, 비밀과 표현, 침묵과 소통, 자아와 타아의, 상충하는 두 질서 사이의 경계에 놓여있는 형식일 수밖에 없다. 이현정의 '지워진 일기', 또는 '일기 지우기'는 우선 일기의 이 변증적 속성에 부합하는 형식적인 답변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 이현정의 일기는 지워가면서 완성된다. 여기서 지워지는 것은 일상적인 체험이 시간에 의해 지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재빨리 빗장을 지르는, 일반적인 의미의 일기다. 새로 완성되는 것은 지우기에 의해 쓰여지는 역설적인 또 다른, 동시에 동일한 그 일기다. '지워진 일기'는 일기쓰기의 상식적인 규범을 위반하는 것에 의한 일기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 지워진 일기는 아무 내용도 전하지 않는다. 기호적 요인들이 조형적 요인들로 대체되어가면서, 단어와 문장들은 알아볼 수 없게 안료들로 뒤덮였다. 시간과 공간의 기록들, 체험과 고백이 동일하게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서술의 단서들은 거의 모두 되풀이 된 붓터치의 층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 일기는 이제 사건의 기록이나 상황의 보고 같은 기능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 되었다. 기억들은 매몰되면서 회화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소통은 거의 부재에 가까워 보이며, 낯선 방식을 요구한다. 남은 것은 어렴풋하게 이전의 글쓰기의 흔적을 간직한, 물결처럼 출렁이는 '지우기'의 흔적들이다. ● 보는 자의 관념과 시선에 익숙한 체계, 철자와 문법이 거둬내진 일기장은 마치 푸른 안개가 가득한 밤의 풍경 같다. 물살이 잔잔하게 출렁이는 심해의 인상일 수도 있다. 용어와 텍스트들, 그것들의 배후를 이루는 체계의 규범까지 모두 이 깊은 푸름에 잠겨있다. 차갑고 깊은, 때로는 따뜻하고 평온해 보이는 그것은 텍스트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내면의 상태, 감정의 수위와 심정의 리듬일 수도 있다! 언뜻언뜻 톤의 깊이가 완화되는 지점에서 몇몇 단어들이 요행히도 발견되지만, 대체로 녹색에서 울트라마린으로 이어지는 무심한 톤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언젠가 길버트와 조지(Gilbert & George)는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해 관객을 후려쳐야 한다." 고 했지만, 정작 생각을 돕기 위해서라면 다른 방법들도 적지 않다. 이현정은 '침묵', '말하지 않음'이, 즉 일반적인 소통의 불충분한 환경이 오히려 사색의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구적인 텍스트가 더 포월적인 독해로 나아가는 길일 수 있다고 말이다. 헨리 나우엔이 중증 장애우였던 아담 아네트에 대해 한 말이 이런 맥락에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그(아담)는 또한 색다른 인도자였다. 어떤 구체적인 방향제시나 충고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현정_일기 no. 2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05
이현정_일기 no. 5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06
이현정_일기 no. 6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06

'포월(匍越)적인' 메타-텍스트(meta-text) ● 우리는 더 많은 언어의 규범을 만들고, 더 정확한 용법을 학습하는 것을 소통의 오차를 줄이는 길로 여기지만,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문명세계의 편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도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즐길 수 있다.'(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견고한 기호체계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자연과 만나고 문명을 건설해 나갈 수 있다. ● 이현정의 단어들은 색과 안료의 새로운 신체를 덧입으면서, 기호의 독성으로부터 서서히 해독된다. 텍스트는 독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지만, 더 광범위하게 지각해야 할 '메타-텍스트'가 되었다. 그렇다고, 텍스트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현정의 지우기는 쓰기로부터 기인하는 자신의 출처를 결코 감추거나 속이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지워진 텍스트는 텍스트의 파국이 아니라, 텍스트의 데리다적 지연(differance)이거나 포월이다. 이 지연, 또는 포월의 메타-텍스트는 '탈(脫)'이나, '안티'와 같은 접두사로 시작되는 해체의 서사와는 무관하다. 지우기는 쓰기의 부정이 결코 아니다. 지우기는 쓰기의 대척점에 놓여있지만 같은 쪽을 지향한다. 음양론이 적시하듯 부재도 존재의 일환이다. 감추는 것은 드러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 이는 글쓰기의 연장이면서 결코 글쓰기 자체에 머물거나 갇히지 않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글쓰기 위에서 진행되는 새로운 글쓰기'에 해당된다. 우리는 용어에 의해 용어들의 거짓과 만날 수는 없다. 구문을 탐미하면서 동시에 구문의 사기를 폭로할 수는 없다. 반면, 아무 것도 쓰지 않는 것은 기록행위일 수도, 일기일 수도 없다. 결국 일기를 극복하는 방식을 일기 내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 새롭고 낯선 글쓰기는 볼 뿐 아니라, 느끼기도 하는 통지각적인 소통의 언어로, 차가운 기호체계와 독해로만 구성되는 일차원적 소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의 궁극은 침묵이 아니라, 심오한 지연과 포월의 언술이다. 구체적인 '무엇'에 붙박는 대신, 수많은 '그 무엇들' 사이로 사유를 유영시키는 방식이다. 단어의 견고한 벽을 허물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그 안에 단 한명의 복역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담을 부수고 내부로 들어가고, 뒤를 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그것의 축복뿐 아니라 저주까지 살펴야 한다. 이야 말로 구문들이 제멋대로 갈라놓고, 문법에 못질당한 차원을 회복하는 기술이며, 소통을 살아있으며 생동감이 넘치고, 때론 불안정하게 출렁거리는 것으로 만드는 기술의 시초가 아닐 수 없다. 사물과 무관한 기호로 사물을 관조하게 했던 다니엘 뷔랑(Daniel Buren)의 충고처럼, 우리는 언제나 금지되고, 감추어진 것까지 포함하는 맥락을 읽어야만 한다.

이현정_일기 no. 7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06
이현정_일기 no. 8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06
이현정_일기 no. 9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06

문자의 무능력과 회화적 감싸기 ● 이현정의 그리기는 글쓰기와 지우기 모두를 포함한다. 작가의 고유성이 지우기에 더 기우는 것은 사실이지만, 글쓰기가 없다면 지우기 자체의 존립기반도 없다. 지우기의 붓질은 쓰기의 경로를 고스란히 되밟는다. ● 표현은 어떤 식으로든 기호의 감시, 형식의 억압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감시와 억압의 어떠한 시점에서도 해방을 꿈꾸는 것이 또한 가능하다. 이현정의 지우기는 피할 수 없는 글쓰기로부터 기호의 해독으로 연이어지는 과정이자, 폐쇄적인 기호체계를 모호하고 열려있는 조형체계로 조정, 완화해 나가는 과정이다. 기호들을 회화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고, 문자를 이미지의 지평에 재배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문자의 부인이 아니라, 교정이자 치유며 회복이다. 붓터치들은 철자와 단어와 구문들을 쓸어내는 대신, 그것들로부터 출발하고, 그 주변을 맴돌며, 그 곁을 떠나지 않는다. 색 또한 그것들을 전적으로 무효화하지 않는다. 기호와 회화, 이 상이한 두 세계는 여기서 전적으로 적대적이지 않다. 부정하지 않되, 다만 극복하기 위해 이현정은 기호체계를 도상학적으로 처리한다. 즉, 기호자체의 신체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화가 기호의 흔적을 뒤따르면서, 결국 그 자체를 회화화하는 방식이다. ● 이현정의 지우기는 문자의 무능력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면서 문자를 다루고, 글쓰기자체의 독성을 해독하면서 글쓰기를 지속하는 방식이다.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하는 일" 이라고 부른 것과는 다르게 이현정은 자신의 회화를 기호의 해독제, 또는 보철술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이렇듯, 작가는 자신의 회화를 매순간 생의 신비와 베일로 가득한 신비의 두루마기 기록 같은 순간들, 미묘하고 섬세했던 상황들, 복잡함, 그리고 운명의 복선들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가장 덜 왜곡하거나 경직시키는 표현의 방식을 새로이 발명해가고 있는 것이다. ■ 심상용

Vol.20070508d | 이현정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