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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음 개인展   2007_0502 ▶ 2007_0513

김나음_40×50"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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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50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갤러리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참여연대 옆) Tel. 02_720_9282 blog.knua.ac.kr/gallery175

김나음의 사진은 채집된 일상의 기록이다. 관찰자적인 그의 시선은 뒷골목의 풍경, 대로변의 작은 사건들을 쫒으며 마치 수사관처럼 정황 증거를 포착한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소소한 일들이 텍스트로 기록되고, 이는 다시 임시적인 푯말의 프레임 속에 갇힌 채 '현장' 속에 세워진다. 그가 채집하는 일상들은 공기처럼 가볍다. 무단으로 대문 앞에 투기된 쓰레기봉투를 들고 짜증을 내는 아저씨,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우스꽝스럽게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녀, 길거리에서 여자 친구의 엉덩이를 만지고 웃는 교복 입은 남학생의 표정, 뽑기 기계에서 인형을 뽑아들고 미소 짓는 아저씨, 어느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하는 골목길의 다양한 풍경들이 바로 그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사건 현장들이다. 현장을 기록하는 라커 스프레이처럼, 언젠가는 폐기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겠지만, 사진 속의 임시적인 푯말은 그렇게 그 '사건 현장' 속에 우뚝 세워진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기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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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일상은 비정치적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그것은 아주 촘촘하게 우리의 삶을 채운다. 마치 안전한 배송을 위해 중요한 소포의 포장 안에 빽빽하게 채워 넣는 스티로폼처럼, 일상은 그렇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위해 기꺼이 희생되고 폐기된다. 그렇기에 작가의 시선은 더 작고, 더 소소하고, 별 볼일 없는 일상으로 향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이러한 일상을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해 텍스트를 이미지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사실주의적인 다큐멘터리 사진 형식으로 특정 공간을 사진 프레임 속에 가둔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인물이 제외된 채 그가 목격한 사건 현장을 증명해 주는 최소한의 물리적 배경만 존재할 뿐이다. 대신, 사진 속에 세워진 푯말과 그 안의 텍스트만이 구체적인 증거로 제시된다. 하지만 이미지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텍스트의 진실성은 불확실해지고 애매해진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작가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과연 그 시간에 여기에서 (푯말 위에 씌어진)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났는가? ● 기호학자 찰스 퍼어스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사진과 현실의 관계는 인덱스적인 동시에 아이콘적이다. 사진에 언어를 첨가하는 것은 인덱스적이고 아이콘적인 것에 상징계를 더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사진-문자 작업에서 언어와 시각의 시스템은 관객의 해석 작업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상호적이다. 그런데, 이 둘은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결핍을 보충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보충하고 환치하는 관계, 즉 데리다가 말한 '보환'(supplement)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의 사진은 텍스트/이미지의 모순적인 결합 사이를 유희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포스트모던적이다. 또한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관객의 존재를 불러내고, 이들을 작품의 해석과정에 개입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수수께끼는 결국 관객을 작품 가까이 접근시키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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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진실성이 의심되는 순간 이미지의 진실성 또한 관객의 의심을 사게 된다. 의심을 뿌리치기 위해 사진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면 프레임 속의 낯익은 공간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다가감과 물러섬의 행위가 반복되면서, 이미지와 언어 사이의 충돌이 생겨나고, 그러는 사이 작가의 존재보다는 관객의 실존이 작업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결국 관객의 참여를 통한 소통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푯말(혹은 그 임시성과 폐기성이 푯말보다 더 강조된 '포스트잇') 위에 기록된 텍스트는 더더욱 관객을 유인하기 위한 장치일 수 있다. 결국 내용의 진실성은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의 텍스트는 특정 시간과 공간을 치밀하게 엮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둘 사이의 충돌을 야기하고, 관객의 해석을 유도한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적인 행위로 인해 어느새 이미지와 텍스트는 분리되고, 대신 이 사이의 간격이 관객의 상상력으로 메워진다. 다시 말해, 흔히 볼 수 있는 사진 속 공간에 우리들을 세우고, 상투적인 언어로 기록된 텍스트는 우리의 기억으로 대체된다. 즉, 언젠가 경험했을 법한, 그리고 앞으로 쉽게 부딪칠 그 사건을 위해서 우리들의 기억이 동원되고, 기념된다. ● 다시 작가가 포착하고 있는 그 현장 속으로 가보자. 그가 건져낸 사건들은 일상이라는 틀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인가? 우리가 무심코 하는 행동과 말이 작가의 작품 속에서 예술 소재로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면, 그 작은 행위들은 분명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들의 이야기 1'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 2'에서 사진, 퍼포먼스, 설치, 비디오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일상을 문제시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상에 대한 생각은 주로 신비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다른 말로,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권력으로부터 동떨어져있는 사적인 시공간이라는 믿음이 일상이라는 언어 속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 사이의 구분은 일상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사적인 공간으로 가장하여 일상 속에서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 혹은 권력의 문제를 불투명하게 가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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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에서 일상성의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일상의 문제를 재인식하고, 이를 작품 속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교두보로 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그의 시선이 더 작고, 더 소소한 일상으로 향하게 될수록 그러한 문제의식은 오히려 패러디(parody)로 전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린다 허천은 예술의 독창성과 유일성에 대한 개념에 도전하고 이를 전복시키는 패러디의 정치성에 주목한 바 있다. 그의 작업에서는 자신에 의해 제기된 일상의 범위를 더 작은 틈새로 향할수록 패러디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작가의 의도를 오독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작업으로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거나 행동을 촉발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며, 사실상 그의 작업은 '비정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서 애매한 지점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 수사관으로서 작가의 시선은 분명 적절하지 못한 곳으로 향해있다. 왜냐하면 그가 포착하고 있는 사건과, 수집하고 있는 정황 증거들은 프레임 속에서 의미의 모순과 틈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이 관객이 해석자로 등장하게 되고, 사건 현장은 그들의 경험과 기억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퍼즐조각으로 채워지게 된다. 관객들의 해석과 참여가 활발해질수록 사진의 진정성은 의문시되지만, 그래도 작가는 개의치 않는다. 관객들의 피드백은 무대 세트만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를 지켜보고 있는 작가에게 흥미로운 관찰과 응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최선희

Vol.20070508b | 김나음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