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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503_수요일_05: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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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를 대접待接하다 ● 어느 날 지인들과 청도 운문사에 들린 적이 있었다. 비구니 스님들만 계시는 곳이라 정갈함이 느껴지는 절이었다. 스님들이 꾸며 논 화단 한켠에서 수북하게 자란 한 무더기의 억새를 보았다. 한참 동안 그곳을 서성거리며 있었다. 대개 화단이라는 것은 야트막한 초물草物들로 꾸며져 있는 것이 보통인데 두뼘 남짓의 땅위에 느닷없이 큰 크기의 억새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억새라는 야생의 풀이 화단에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 저토록 대접해서 귀하지 않는 존재가 어디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그것을 심었던 사람의 뜻을 헤아려 보았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천재天才라 하면서도 어느 쓸모를 위해 그것에 쓸모 없는 다른 것을 함부로 보는 어리석음의 세월을 살고 있다는 반성 또한 있었던 것이다. ● 삶은 여행이다. 만나지는 모든 것들, 그것이 사물이든 풍경이든 사람이든 삶을 그나마 구체적이고 현장감 있게 하는 모든 것들을 잘 대접하고 잘 떠나 보내는 일이 사람의 일인 것이다. 나는 진보나 발전을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람의 규모를 지켜나가며 다른 것들과의 상생相生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만이 유효할 뿐이라 믿는다. 나는 지금 억새를 대접하고 있는 중이다. 이 일이 지극하게 치루어졌으면하는 바램이다. ■ 이태호
재현의 빈틈으로서 바라보기 ● 사실적인 묘사와 재현된 현실과의 등비는 상투적이거나 일차원적이다. 사실적 현실은 다만 현실의 그 순간일 뿐이지만 사실을 표현하는 혹은 재현하는 노력은 그 순간의 감응과는 다르다. 재현된 그림은 현실 자체보다 그 사실로부터 생성될 수 있는 의미에 관계한다. 사실적 순간은 그림이 되면서 사실성이 강조되거나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관념화 되고 만다. 사실 그 자체가 재현될 수 없다는 때문이다. 재현은 사실이나 구체의 대체가 아니라 의미체로 바뀌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실은 그 사실성을 벗어날 때 비로소 사실로서 우리에게 인지되고 그 의미들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의미들 역시 재구성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사실적인 그림이란 사실을 표현하기보다 사실을 인용하고 그 인용은 또 다른 의미를 확충하는 데 쓰이는 것으로 봐야 한다. 사실적인 그림이란 충실하게 대상의 구체성을 옮겨 놓는 것이 아니라 그 구체성의 인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재현은 단지 어떤 것을 다시 반복해서 표상함만을 가리키지 않고 재현된 것 자체로서 새롭게 표상함을 뜻하기도 한다." 굳이 이태호의 작업을 두고 사실성 운운하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성 운운하는 것은 대상을 확인하는 상투적인 시각이야말로 그를 이해하는 출발점이기에 운을 떼어보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대상의 구체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만 대상의 묘사를 통해 사물을 드러내기보다 대상들의 관계,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고 구체성 자체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 그의 작품은 인물이든 풍경이든 혹은 정물이든 구체적 묘사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의 구체성이 먼저 눈에 뜨인다. 그러나 그 묘사에 머물지 않고 묘사를 벗어나는 것에로 시선이 유인된다. 그것을 응시라고 할 수 있을 게다. 대상에 대한 시각적 지각만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이의 또 다른 감성이나 의미체계에 맥락을 만들어주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억새를 묘사한 이번 작품전은 그 동안의 화면 구성과 다른 특색을 보인다. 우선 억새라는 단일 소재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전의 작품들이 인물과 나무, 곤충과 자연 풍광들이 조우하는 층위가 중요한 구성법이었다면 이번은 단일한 소재에 먹이라는 단일한 채색 방법이 변화를 느끼게 한다. 사물이 가진 풍부한 형태와 색상을 기반으로 하는 사실적 묘사에 비하면 상당한 변화이다. 단색의 사실적 묘사는 대상의 사실성보다 다른 이미지를 보아내는데 있다. 소재와 채색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미묘한 층위와 구성의 소밀(疏密)에 더 무게를 둔 것이다. ● 같은 소재이지만 화면에서의 소밀과 얽힘과 풀림, 겹침, 소재간의 거리부정, 집중된 이미지 처리 등은 평면 아닌 평면적 특징을 드러낸다. 깊이보다 평면의 얽힘이 돋보이고 가까이 있는 억새 몇, 그 뒤의 것, 그리고 그 뒤쪽은 묘사되지 않고 옅은 선이나 먹색으로 처리되고 있다. 억새풀 사이로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있는 것을 전제로 한 없음이다. 부재 아닌 부재이다. 드러날 것들의 전제이면서 있음이 부정되는 공간이다. 게다가 겹쳐지는 이미지가 화면 층위를 구사하듯 이번 작품은 화면의 후경이 아닌 전경에 빈 곳, 혹은 묘사되지 않은 곳을 두어 묘사된 것들로부터 단절, 연속이라는 양가적 시선을 같은 층위에서 요구한다. 그려진 것들의 연장으로 빈 곳으로 시선을 유도하고 잠시 멈추게 한다. 그리고 다시 본 것들의 선행 체험의 연속성에 의해 보아가게 한다. 이런 변화는 화면의 변화를 최소화 하면서 다른 층위로 시선을 옮기게 이끈다. ● 빈 곳이 있음으로 묘사가 단절되고, 단절은 이것들이 그려진 것이며, 평면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사실적 묘사의 구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평면은 사실 재현이 아닌데다 먹색으로 현실감을 한 번 더 벗어버린다. 그런 인식은 재현이라는 상투적인 보기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한다. 빈 곳, 그려지지 않은 형태는 묘사에 대한 물음,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 지를 묻게 만든다. 그 물음은 회화에 대한 전반적이 질문으로 이어지고, 대상과 대상을 대신하는 회화, 혹은 언어에 대한 질문, 인간이 구성한 것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다르지 않다. ● 상투적 이해가 이런 물음에 의해 순간 멈칫하지만 그려진 것들에 대한 더 강한 묘사, 재현성을 강조해주는 역기능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작품 중 먹색 사이 붉은 빛의 색 점이 흔적처럼 드러나는 것도 목격하게 된다. 그런 흔적들은 이 억새가 묘사임을, 그 묘사로부터 우리가 떨어져 있음을, 이미지일 따름임을 보여준다. 그려진 대상을 둘러싼 현실적인 사물로서의 사실적 세계가 어느 순간 이미지로 전이되는 층위를 드러낸다. 그저 그리는 행위의 연속이 그림이라는 것, 그리는 것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것, 세계를 이해하는 우리들의 기호체계가 구성된 것이라는 깨달음 앞에 서게 한다. ●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의 목격은 그려진 것과 빈 것 사이에서 소격감이 드는 배치의 정당성 혹은 그 필연성에 대한 물음에 다르지 않지만, 우리의 이해는 이 정도에서 상투적으로 맴돌거나 더 깊은 이해를 포기해버리고 만다. 그의 작업은 이 부분에서 다시 보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상징의 가시성과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는 한 몸이다. 즉 상징의 가시성은 자신의 의미 자체이다. 반대로 이미지는 자신이 재현하는 대상으로부터 의미가 확장된다. 요컨대 이미지는 자신의 가시성으로부터, 가시성을 통해 드러난 재현대상을 넘어서, 새로운 의미를 주장한다." 그것을 이해하고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억새가 그려진 것과 억새를 닮았지만 빈 공간으로 처리된 사이를 주목해본다. 그려진 모든 것을 그저 억새 하나로만 보아버리는, 억새 하나하나의 형태와 색상을 다른 개별성으로 보아내려 하지 않고 억새라는 명사로 보아버리고 만다. 이름 붙여진 사물, 언어화된 사물을 보고 있을 뿐임을 지각한다. ● 그리고 억새 사이로 빈 틈, 공간, 흰색을 본다. 그런데 그 빈틈이 억새라는 단순한 대상을 억새로만 보게 하지 않고 개개의 사물로서, 서로 다른 억새로 보이게 이중성을 만든다. 그리고 빈 공간이 이 억새가 그려진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확인을 환기시켜 그려진 것과 사물 간의 차이를 인지하게 한다. 이런 이중성, 한 작품 안에서의 소격감은 우리가 보고 있는 상투성에 대해, 그리고 그 상투성을 벗어나는 어떤 것을 응시하게 한다. 그려지지 않은 것조차, 빈 곳조차 억새로 보아내려는 유인과 빈 곳임을 확인하려는 틈에 시선은 멈춰 선다. 그의 작품은 이런 상투적 보기와 상투적 이해의 빈틈에서 비가시적 무엇을 생성한다.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의미를 포기함으로 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보기를 통해 세계를 응시하는 순간에 대한 제시이다. ● 화면에 가장 잘 드러나는 흰색 부분은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려진 억새와 같은 층위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이다. 화면의 전반부도 아니고 후반부도 아닌, 자세하게 묘사되는 것들과 같은 층위에 있다. 실재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실재성을 부정하기도 하지만. 같은 층위에서 있음과 없음이 공존한다. 억새들은 서로가 서로에 겹쳐지는, 스며들어 하나가 된, 그러나 앞의 것으로 드러나는 뒤의 형태, 앞의 것에 영향을 주는 잠복된 형태로서 있는 없음을 보여준다.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보이고,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드러낸다. 억새라는 그림을 통해 억새라는 사실적 구체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억새라는 명사를 이해하고,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 빈틈을 통해 상투화되고 관념화된 자신의 시선을 본다.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구성은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려진 것과 비어 있는 것 사이를 오가며 우리 사념의 형상들이 견고한 존재로 바뀐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한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 대한 응시의 순간이다. 이미지 자체가 새로운 사물이 되려 한다. 억새의 푸른 잎에 손을 베이는 그런 순간의 일이다. ■ 강선학
Vol.20070503b | 이태호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