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표.면.

4인의 사진가와 6인의 글쟁이展   2007_0502 ▶ 2007_0619

성남훈_Maid in Man_흑백사진_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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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502_수요일_05:00pm

사진_노순택_성남훈_이상엽_이성은 글_김태현_노용석_문건영_박평종_전성원_한홍구

평화박물관 기획전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서울 종로구 견지동 99-1번지 Tel. 02_735_5811 www.peacemuseum.or.kr

속죄의 윤리 ● '전쟁표면'전에 참여한 4인의 사진가는 각기 상이한 방식으로 역사의 결에 스며있는 폭력의 상처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실크로드를 따라 형성된 문명의 배후에 깔린 파괴와 약탈의 흔적에서부터 6.25전쟁 당시 학살된 무고한 민간인 유해 발굴현장, 5.18민주항쟁 희생자들의 일그러진 영정, 민족 갈등으로 전장이 되어버린 동구의 모습에이르기까지 이들의 눈에 비친 문명사는 전쟁과 살육으로 얼룩져 있다. 사실 모든 문명세계의 건설 과정에는 힘의 논리가 어둡게 깔려있다. 약육강식은 인륜을 모르는 동물세계만의 고유한 법칙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저변을 지배하는 숨은 원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힘의 논리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 말이지만 동시에 동물의 본성, 혹은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가장 근원적인 논리이기도 하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는 이 기초 원리가 확장되고 복잡해지는 과정이 어쩌면 문명세계의 건설과정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과정이란 자신의 근저에 깔려있는 야만을 은닉시켜가는 모습에 불과하다. 그리고 실제로 개인 대 개인의 관계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가 개념적으로 확장된 전쟁을 통해 문명세계는 자신의 발전 속도를 앞당길 수 있었다. 잉여재화와 잉여노동을 극도로 확대시켜 얻어낸 전리품과도 같다 하겠다. 거기에는 물론 제물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전쟁은 문명의 초석이다. 한편 고고인류학자들은 문명세계의 기틀이 싹트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전쟁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밝혀내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전쟁은 문명의 초석일 뿐 아니라 그것의 기원이기조차 하다. 문명이란 역사에 다름 아니다. 문명 이전, 곧 역사 이전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문명 세계의 사람들은 폭력을 본능적으로 혐오한다. 그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을 통한 배움이지만, 인간은 한번도 그 배움을 제대로 실천해본 적이 없었다. 폭력을 통해 폭력으로 건설한 자신들의 세계를 아껴야 할 것인가 미워해야 할 것인가. ● 아무리 유순하고 건전한 이성을 실천하는 사람일지라도 본능적으로 몸에 밴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폭력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하지 않은 폭력도 있는가. 어떤 철학자는 선악의 너머에 있는 폭력, 요컨대 초 윤리적 폭력을 수긍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하기도 한다. 그 때의 폭력은 더 나쁜 폭력을 피해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수동형으로서의 폭력이다. 그러한 폭력은 폭력의 주체도, 제물도 없는, 행위만 있는 폭력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모든 폭력에는 항상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폭력은 희생의 구조를 수반한다. 본래 모든 희생의 구조 속에서 제물만이 진정으로 무고하며, 폭력의 주체에게 따라다니는 무거운 죄의식은 그 무고함에 대한 경배이다. 기실 가장 저열한 폭력이란 제물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제물에 죄를 덮어씌워 자신을 정당화하는 폭력이다. 그래서 세상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무고한 제물은 없다. 이러한 정당화 논리는 비단 폭력의 순환을 부르는 복수의 위험에서 비껴가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해자들이 죄의식에 따르는 나약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기만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제물이 다시 한 번 희생되는 이러한 과정은 불행히도 모든 폭력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왔다.

성남훈_Maid in Man_흑백사진_2000

과거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지만 똑같은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폭력의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그 배움과 실천의 한 형태가 폭력의 흔적을 더듬고 찾아내어 의식의 수면으로 띄우는 일이다. 하지만 인류사 전체를 관통해 온 전쟁과 약탈, 살육과 파괴의 자취를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스스로를 시대의 주인으로 자처했던 정복자들은 희생의 구조를 은폐시킴으로써 폭력을 정당화해 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흔적이란 본래 지금 여기에 부재하는 대상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와도 같다. 그래서 4인의 사진가들이 전쟁과 살육의 야만적 폭력을 환기시켜내기 위해 도처에서 찾아낸 수많은 상징들은 사자(死者)를 불러내는 주술과도 같은 마력을 지녔다. 시간의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던 폭력의 자취가 그들의 시야를 통해 형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상엽_고대전쟁의 흔적, 생태 혹은 문명 사이에서_흑백인화_2001
이상엽_고대전쟁의 흔적, 생태 혹은 문명 사이에서_흑백인화_2001

이상엽은 오랫동안 동서교역의 가장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를 따라가며 폐허로 변한 이 지역 문명의 잔해들을 채집해냈다. 그는 이 육상 무역로를 무대로 자행되었던 파괴와 약탈의 역사를 되짚어보고자 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어쩌면 상상력이 제대로 가닿지 못할 만큼 아득한 과거를 사진으로 복원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모한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다니면서 황량한 공간의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전쟁의 상흔을 찾아낼 수 있었다. 화염 속으로 사라진 옛 도시는 형체조차 찾아보기 어렵지만 한 때 그 곳에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존재했었음을 말해주는 자취는 남아있는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성곽의 일부나 떨어져 나간 돌무더기는 자연인지 문명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광대한 사막과 어우러진 기암괴석에 동화되어 버렸다. 그것을 야만성조차 망각하는 세월의 우둔함 탓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세월은 전쟁의 야만성을 증언하는 파괴의 흔적을 완전하게 지우거나 왜곡하지는 않는다. 왜곡과 변형은 오히려 인간의 작품으로 그것만이 진정한 망각의 동인이다. 그래서 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인간의 곁에서 찾지 않고 자연에서 찾는다.

노순택_망각기계_흑백인화_2006
노순택_망각기계_흑백인화_2006

이성은의 사진은 6.25전쟁 동안 경북 경산에서 공산군에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무고하게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유해 발굴 장면에 대한 시각적 보고서이다. 한국 근대사는 송두리째 이념갈등의 시대였다고 해야 할 만큼 이념을 잣대로 네 편과 내 편을 차갑게 갈라 흘러온 역사이다. 갈등과 대립이 치유할 수 없을 만큼 깊어져 극단적 폭력으로 치닫는 것이 전쟁이라면 거기에는 필시 피아가 따로 있을 터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당사자들은 모두가 이념이라는 유령이 걸어놓은 마법에 홀려 피아를 제대로 구분할 만큼 명철하지 못했다. 전쟁은 그 자체로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범죄행위이지만 더욱 불행한 사실은 그 과정 속에 항상 무고한 희생이 따른다는 것이다. 모든 전쟁의 역사에는 이러한 희생의 구조가 따라다니며, 그래서 전쟁은 애초부터 죄악이다. 그 죄악을 감추기 위해 저지르는 또 다른 범죄가 증거인멸이다. 하지만 과거란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재로부터 뒤로 멀어질 뿐이다. 반세기 남짓한 시간이 흘러 유해는 부스러기가 되어 흩어져가지만 지난 세기의 범죄를 증언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흙인지 나무토막인지 돌멩이인지 잘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삭아버린 뼛조각들에는 아직도 한이 서려있고, 흙 속에 파묻혀 절규하는 두개골 위로는 파릇한 생명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 노순택은 5.18민주항쟁 희생자들의 초상을 영정의 형식으로 복원하여 그들 죽음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영정이 망자에 대한 기억을 현재에, 혹은 영속적으로 남겨두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의 사진은 죽음을 손쉽게 망각하는 나태한 의식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기억을 지켜내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이 지속이라면 망각은 순간의 사태이다. 만약 우리 시대가 5.18을 망각했다면 그것 역시 순간의 사태. 하지만 작가는 잠깐 동안의 망각마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고 한스러우며,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동일한 죽음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할뿐더러 잔악하기까지 한 폭력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아있어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염려가 그에게는 기우가 아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비윤리적인 권력을 감시하고 권력의 행사에 개입해야 한다. 야경꾼처럼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은 채 주시해야 하는 이 상황이 고단하지만 그것은 희생자들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이다. 이를 위해서는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죽은 이들의 초상은 일그러지고, 찢기고, 윤곽이 흘러내리고 갈라져 본래의 형체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망각의 메타포일까 혼의 상징일까. 죽음 저편의 세계에서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노려보는 이 망자들의 영정 앞에서 산 자들은 고개 돌릴 수 없다. ● 동구의 내전 지역에 오랫동안 관심을 보여 온 성남훈의 사진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을 그로테스크하게 형상화시켜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측량할 수 없는 노고가 베인 웅대한 도시를 전쟁의 포화가 갉아먹어가는 광경은 이방인의 눈에도 비통하기 그지없다. 행인과 자동차로 그득해야 할 도시의 대로를 차지한 전차와 쓰러질 듯 서있는 전봇대는 도시의 모든 기능이 정지했음을 말해준다. 썰물처럼 도시를 빠져나간 사람들은 포화를 피해 도시바깥의 피난처에서 임시로 기거하지만 거기에도 평화는 없다. 파괴된 전차가 도처에 널려있는 불안한 평화인 것이다. 총탄세례를 받아 주저앉아버린 자동차, 지붕과 창문이 날아가고 외벽마저 구멍 뚫린 주택들, 불에 타 껍데기만 남은 나무들, 재난의 징표들이다. 하지만 정작 사진가의 눈에 비친 도시는 흉측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은은한 비장미를 풍기고 있다. 재난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적막과 폐허가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진가는 전쟁의 참상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기능적인 정보전달자이기를 그치고 재난의 이면을 파헤쳐 다각적으로 보여주는 적극적인 해석자가 된다. 그가 구사하는 시각적 수사의 장치들이 때로 재난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역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재난의 변용이 아니라 잠시 동안의 평화에 대한 찬미로 읽힌다. 그만큼 평화란 본능적인 갈구의 대상인 것이다.

이성은_경산 코발트 폐광 대원골 유해발굴현장_2005
이성은_경산 코발트 폐광 대원골 유해발굴현장_2005

4인의 사진가의 눈을 빌어 바라본 세계는 온통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세계를 이렇게 만든 자는 안타깝게도 인간 자신이다. 폭력이 인간의 심성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고유한 본성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인간은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미덕도 함께 지녔으며 폭력을 피해갈 줄 아는 지혜 또한 갖고 있다. 필요한 것은 이러한 지혜와 미덕을 실천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이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편 올바른 반성에는 잘못과 허물을 낱낱이 드러내 밝히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반성이란 또 다른 기만과 허위에 불과한 까닭이다. 전쟁과 폭력을 피해야 하는 것이 당위라면 우선 세상 앞에 속죄해야 한다. 속죄는 언어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마음이 진실하다면 그것도 괜찮다. 그런 점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4인의 사진가가 폭력의 잔해를 추출해내어 세상 앞에 드러내 보여주는 작업은 속죄를 향한 힘겨운 발걸음이다. ■ 박평종

Vol.20070502d | 전.쟁.표.면.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