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동

김지연 사진展   2007_0502 ▶ 2007_0515

김지연_마이산_디지털 프린트_20×20inch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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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50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_11:00am∼07:00pm

갤러리 룩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02_720_8488 www.gallerylux.net

묏동 ● 묏동은 단순히 묘지가 아니다. 자연이며 풍경이다. 바다가 산이 되고 산이 다시 강물이 되는, 역사 속에 순응하는 땅이며 우주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묘지는 죽음이며 단절이며 끝이며 절망이며 허무다. 어린 시절, 혹시 이른 봄 뒷동산에 올라가서 햇볕 잘 드는 묏동에서미끄럼을 타고 놀던 기억을 가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것이그저 우리 일상의 풍경이었음을. 자연이 문명의 반어적 의미로 쓰여 진다면 문명은 자연의 반어적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데 때로 문명이 얼마나 우리를 틀에 가두고 옹색하게 만들고 피폐하게 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 문명의 틀 속에서 바라보았던 암울한 묘지가 어느 날 별로 슬플 것도 아름다울 것도 없는 그저 양지바른 언덕에 있는 자연으로 다가 왔다. 그것이 나에게는 또 다른 자유였다. 죽음에 대한 조금은 객관적인 시선, 답답한현실에 대하여 한 발 물러서기, 암울한 미래에 대한 여유, 삶은 때로는 정체되기도 소통하기도 하는 강물 같은 것이더라고. 그러다보면 결국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김지연_마이산_디지털 프린트_11×11inch_2003

묏동은 반만 둥글다. ● 둥글다는 것은 형체다. 형체는 현실이며 증명이다. 그래서 우리의 묏동은 친절한 형식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반만 알고 반만 기억하면 된다. 나머지 반은 지하에 있으니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그것은신의 영역이며 그러기에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가면 둥근 모습은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가 형체를 잃고 만다. 이것이 순리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자연의 순리를 기다리기에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기에, 또한 자나치게 영구불변하는 치장을 하러들기에 묏동은 또 다른 자연의 훼손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 풍경은 어쩌면 100년 후 우리가 그리워 할 또 다른 자연일지도 모른다. ● 풍수지리를 찾아서? ● 땅에도 기(氣)가 있어 택하고 다스려서 명당을 쓰면 자손대대 복을받는다는 주역에 논거 한 학설이다. 나는 풍수지리는 도통 모른다. 뒤에 야트막한 산이 둘러 있고 앞이 좀 트이고 냇물이 그 앞을 굽어 흐르면 좋은 자리인가 부다 하는 생각이 든다. 허긴 이런 자리가 있으면 산 자에게도 편안하지 않겠는가! ● 왜 사라지는 것을 기억하려 하는가? ●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나 아쉬운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려는 의도는 없다. 나는 과거의 이야기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대상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이 시간에 그 공간에 있다는 존재 증명의 제시이다. 기억되어지고 싶어하는 자는 기억하는 자의 의식이 깃털보다 가볍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연은 이 모든 기억을 스스로 정화한다.

김지연_전북 고창_디지털 프린트_16×16inch_2004

풍수 ● 최근 최창조 선생님은『도시풍수』란 책을 펴냈다. 여기에서 선생님은 풍수(風水)란 글자 그대로 바람과 물에 관한 지혜의 집적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바람은 옛사람의 의식으로는 하늘이며, 물은 당연히 땅이다. 그러니 풍수는 결국 자연에 대한 지혜라 할 수 있다. 풍수적 삶이란 자연과 조화된 삶을 이루는 것이다. 어머니 품속 같은 땅에 기대어 편안한 삶을 이루는 것이다. 그 어머님 품속 같은 곳, 그곳이 명당이라 말할 수 있다. 풍수는 굳이 이론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이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이다. 그래서 조상들은 풍수란 용어가 없이도 그렇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다. 생각해 본다. 몇몇 사람들이 정처 없이 떠돌다가 어떤 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입구가 허(虛)하여 어떤 방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렇다고 자리 잡은 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굳이 가고자 하지 않았다. 몇 명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큰 화재가 나서 마을이 완전히 황폐화 되었다. 화재가 발생한 후 마을사람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마을을 황폐하게 된 원인이 밝혀진다. 마을입구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라고... 이후 마을사람들은 나무를 심기로 결정한다. 빨리 자라고, 튼튼하고, 바람을 막아낼 수 있는 수종을 골라 심는다. 될 수 있으면 적게 심어도 효과가 날 자리를 골라 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수구(水口)가 좁은 곳을 선택하여 심게 되었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조금씩 나무심기를 하면서 보호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화재가 줄고 별 걱정 없이 살게 되었다.

김지연_전북 진안_디지털 프린트_20×20inch_2003

그런데 일이 발생했다. 누군가가 마을 숲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큰일 이었다. 그래서 마을규칙을 만들고 서로 감시했지만 훼손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방책을 생각해 내게 된다. 그것은 마을 숲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었고 여기에 신앙성과 신성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마을 숲의 땔감을 가져다 쓰면 죽는다거나 병신이 된다거나 하는 신성성과 함께 여기에 제를 모시면 마을이 평안하고 마을 사람들이 잘 살수 있다는 믿음이 부가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숲이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조상들은 터 잡고 살면서 터가 좋지 않다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모둠살이 공간을 명당화하기 위하여 여러 비보책(裨補策)을 강구했던 것인데, 그것은 숲뿐 만이 아니라 돌탑, 선돌, 장승, 짐대 등 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것이고 이것이 풍수이고 풍수적 삶이었다.

김지연_제주 성산포_디지털 프린트_20×20inch_2005

진안에는 신비로운 산이 있다. 언뜻 보기에도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듯한 산. 마이산이다. 마이산을 진안 사람들은 식상할 정도로 자주 본다. 진안 사람들 기억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매년 소풍 가던 곳이 마이산이다. 언제나 자주 접하니 신비로움 이랄 것이 있을 수 없고 마이산을 보는 것이 지겨웠을 것이다. 그러나 진안을 떠나 생활하다가 고향을 찾을 때면 고향의 상징처럼 다가오는 것이 마이산이다. 마이산 주변에 몇 개의 초등학교가 있는 있는데 마이산을 그려보라고 하면 다니는 학교에서 보이는 마이산을 그린다. 읍내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말귀와 같이 쫑긋 서 있는 마이산을 그린다. 반월리 사는 학생들은 우람한 숫마이산을, 은천마을에 사는 학생들은 폭격 받은 듯한 두 봉우리의 마이산을 그린다. 마령에서는 마이산보다 광대처럼 웃고 있는 광대봉을 그린다. 마이산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김지연_충남 공주_디지털 프린트_16×16inch_2004

기록에 전하는 바 의하면 마이산은 동봉위에는 작은 못이 있고 서봉의 정상은 평평하고, 샘이 있어서 적병을 피할 수 있고, 날이 가물어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고 한다. 이미 신라시대에 소사(小祀)가 설치되어 제사를 지낼 정도로 신령스러움을 인정받는 산이었다. 그 명칭도 다양한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라 때 서다산(西多山)이며 이후 용출산(湧出山), 마이산, 속금산(束金山) 등으로 불렸다. 계절별로 돛대봉, 용각봉(龍角峯), 마이봉, 문필봉(文筆峯)이라 불린다. 이렇게 불리는 마이산에 얽힌 전설도 전한다. 마이산에는 남녀 두 산신이었다고 한다. 수도를 한 뒤에 마침내 승천할 기일이 되었다. 남신은 사람들이 승천장면을 보면 부정을 타서 안 되니 한밤중에 떠나자고 주장하였고, 여신은 새벽에 떠나자고 하였다. 여신의 주장대로 새벽에 떠나게 되었는데, 마침 새벽에 물 길러 나왔던 동네 아낙네가 그 장면을 보고 "어머나 산이 하늘로 올라 가네" 하고 놀라는 바람에 부정을 타게 되어 두 산신의 승천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화가 난 남자 산신은 여자 산신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지금의 애기봉이 아빠봉 곁에 있게 되었고, 여자 산신은 토라져 뒤돌아 다소 곳이 외면하며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한다. 이 전설이 생성된 주요 이유는 마이산의 형국 때문으로 여겨진다. 마이산을 진안읍 쪽에서 보면 동봉(슷마이봉)에 새끼처럼 보이는 작은 봉이 2개가 붙어있고, 서봉(암마이봉)은 반대쪽으로 돌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마이산 남쪽 암벽에 부스러져나간 흔적이 많이 있는데 이것을 '옛날 이곳이 바다였을 때 고래가 파먹은 자국'이라고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김지연_충남 공주_디지털 프린트_20×20inch_2004

풍수적으로 동봉은 목행에 속하는 탐랑성(貪狼星: 풍수에서 산은 하늘의 별이 땅에 내려와 형성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성(星)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이고 서봉은 금행에 속하는 거문성(巨文星)에 가까운 모양이다. 오행의 배치를 보면 목행은 동방이요, 금행은 서방이니 산의 자연적 배치가 풍수설에도 일치하는 산이다. 이러한 마이산은 백두산에서 뻗어 나온 백두대간의 한 줄기가 장수 영취산에서 다시 거슬러 금남호남정맥을 타고 팔공산에서 운장산으로 이어지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금남호남정맥이 진안에 와서 말귀같이 생긴 그 유명한 마이산을 쫑긋 세워 놓았다. 금남호남정맥에는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가 위치한다. 금강의 발원지인 뜸봉샘,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이 그것이다. 그렇게 낮지 않은 산줄기에 맑은 물을 품고 있는 곳이다. 계곡마다엔 언제나 맑은 물이 콸콸 넘쳐나고 있는데 그 물은 이곳 사람들이 모여 살도록 하는 가장 근원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 또한 맑은 물은 이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심성을 맑게 닦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 이상훈

Vol.20070502c | 김지연 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