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MOMENT

정강 영상·사진展   2007_0420 ▶ 2007_0519 / 월요일 휴관

정강_HOW ARE YOU?_Video projection Approx_00:15:00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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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420_금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_2007_0504_금요일_03:00pm

갤러리 정미소 기획초대전

협찬 및 후원_월간 객석_운생동 건축사무소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정미소 서울 종로구 동숭동 199-17번지 객석빌딩 2층 Tel. 02_743_5378 www.galleryjungmiso.com

갤러리 정미소는 2003년 개관 후 한국의 젊은 작가 발굴, 해외교류, 다양한 문화 네트워크 프로그램 참여 등을 위해 개인전, 외부기획자 초대전, 해외교류전시, 프로젝트, 아카이브, 강연, 잡지 출간 등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매년 Emerging artists들 발굴과 Young Artists의 소개를 위해 경쟁방식 세미나와 비평회, 매니지먼트 차원의 전시 후속 프로그램 기획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국각지의 역량 있는 작가를 모색하고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주력하고 있다. ● 갤러리 정미소 기획초대전, 정강의 "Long. Moment"가 4월 20일부터 5월19일까지 열린다. 정강은 지난 2006년 하반기에 실시된 2007년 기획공모에서 선정된 작가이다. 사진과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서 현대인의 삶을 조망하는 현대 미술 작업 중에서, 작가 정강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들을 전시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 정강은 이번 전시로 한국에 첫 개인전을 갖는다. 정강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에서 사진을 전공하였으며, 1999년 졸업 후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사진으로 MFA를 수여받았다. 이후 시카고 예술대학(school of arts institute of chicago)에서 비디오아트를 전공하면서 작품의 폭을 넓혀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미 뉴욕, 시카고, 캘리포니아 등지 외에 일본과 중국의 각종 전시에 참가하여 영아티스트 대열의 합류를 준비 중에 있다. ■ 갤러리 정미소

정강_HOW ARE YOU?_Video projection Approx_00:15:00_2006

비(非) 전체- 제안 ● 정강의 작품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거나, 하지 않는다. 가령 에서, 인물들은 일상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 '요즘 어때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다. 대답엔, 거의 특별한 것이 없다. 그 내용에는 심오한 의미도 없으며, 은근히 기대해 본 어떤 과거지사를 토로하는 것도 아니며, 희망찬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야기'한다. 스치는 이야기들을. 그리고 또 한편에서 그들 중 누구는, "너 차 마실래? 말좀 해봐. 이거 가질래?" 등의 사소한 제안을 한다. 어쩌면, 정강은 우리 현실이 구성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일상은 어떠한 절박함, 어떠한 욕망의 분출, 판타지도 없고, 티브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러한 불륜도, 끈적함도 없는 게 아닌가. 아니 적어도 없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일상 속에서 누군가가, 성큼, "차 한잔 할래요? 혹은 이거 가질래요? 심지어 요즘 어때요?" 라는 질문을 툭, 던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유쾌한 파장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암묵적인 일상적 관례에 대한 위반일지도... 어쩌면 가볍게 보이지만, 결코 인사치례는 아닌, 애매한 경계에서, 정강은 우리에게, 제안을 하는 셈이 된다. 조금 가볍게, 그리고 약간은 경쾌하게, 그렇지만 어떠한 강박적 제스쳐는 없이, 굳이 어떤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반향은 기대하면서...

정강_SAY_Video projection Approx_00:10:00_2006/2003

무언으로 말하기 ● 반면에「Say, 2006/2003」에서 등장인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표정과 배경으로 그/그녀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연기인지, 그 등장인물들의 어떤 사적인 배경을 암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결국 그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그 무엇, 하지만 그들은 분명,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하는 것 같다. 그들은 무언(speechless)으로, 혹은 우물우물 웅얼거리면서(마치 복화술처럼), 끝내 우리를 응시하고(gaze), 필요로 하고(need), 그리고 욕망(desire)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던지는 파장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들의 불완전하고, 불안한 응시 속에 응축되어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구의 찌꺼기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그들의 조용한 응시와 대면하면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무엇인가를 불러오게 된다. 가령, 그/그녀는 우리에게 그들의 고립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표현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중일까.. 등등. 우리가 말하지 않는 의 대상들을 바라보는 교환의 과정에서 우리는 오히려 평소에 일상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혹은 말하지 않는, 그 무엇을 더욱 많이 풍부하게 듣고 있고,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일상적인 자잘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How Are You」와 아무 말도 하지 않는「Say」는 같은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두 작품 모두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지만, 그 이면에는 어떤, 무엇을 건네거나, 이야기하거나,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강_SAY-도서관에 Jeff_C-type light-jet print_100×100cm_2003
정강_SAY-앉아 있는 이진_C-type light-jet print_100×100cm_2003

비(非)전체로서의 현실의 외양, 반복 ● 정강의「How are you」나 「Say」가 다큐적인 촬영과 스케치, 그리고 몇몇 연출된 장면들이 촬영되고 나서 이후에 편집된 결과를 보고 있노라면, 그것에 공통된 어떤 요건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작업의 주제적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정강의 작품들은 현실의 반복과 일상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현실이 구성되는 방식 또한 암시하고 있다. 즉 정강의 작업 방식에서 드러나는 매체적 특성은 「엘리러펀트, 2006」에서 드러나듯이 짧은 순간들과 미결정된 소리들, 그리고 그것의 반복에 의거하는데, 바로 그 점이 우리 현실이 구성되는 방식과 유사하다. 작품「엘러펀트」는 어떤 전체가 조망되지 않는 전체, 일상적 현실을 일관된 전체로서 재구성할 수 없는 그 어떤 불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 자체가 그 거대한 엘러펀트처럼 재구성하기에 불가능하지만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비(非)전체임임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는 우리가 장님 코끼리 더듬듯이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없다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말해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이런 한계가 바로 우리의 인식의 한계임과 동시에 바로 우리의 현실 그 자체의 한계임을, 우리의 현실 자체가 비전체임을, 그 어떤 존재론적 공백을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실 현대의 어떠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발생하는 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건은 항상 어이없는 어떤 지점에서 발생하며, 그것의 원인, 그것의 범인, 그것의 해결이란 있을 수 없고 오히려 무수한 수수께끼만을 남긴다. 오히려 현실에서의 사건의 비극성과 필연성은 우연하게 결합한다. 게다가 정강은 그 어떤 사건도 매개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정강_Elephant_4 channel video installation, Approx_00:07:00_2006/2002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돌출되는 object a ● 작품의 모든 인물들로부터, 우리는 현대인의 존재성, 존재성의 인식의 순간을 생각하게 된다. 존재는 어떻게 해서 존재가 되는가. 그리고 언제 주체로 호명되며, 또한 그들은 어떤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또한 우리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이토록 반복되는 우리 일상, 사소하고, 어떠한 거창한 일들도 벌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존재성, 타자성을 삶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교환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인식이란 것은, 그것이 정체성으로 불리어지건, 호명으로 불리어지건, 주체로 불리어지건, 어떻게 불리어지든 간에, 타자와의 조우 속에서이다. 우리의 시선과 이야기는 어떤 왜곡된 거울과 같은 것에 반사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그것은 항상 어긋난 반향이고, 왜곡된 거울상이며, 기대하지 못한 의외성으로 되돌아오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에 타자성(otherness)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자성은 항상 내게 되돌아오는 원환(circle)을 구성하고 있다. 아마 그 원환은 나, 타자, 그리고 타자에의 혹은 타자로의, 타자로부터의 어떤 화살들이 내게로 꽂히도록 하는 그러한 원환일 것이다. 그 화살은 응시일수도 있고, 어떤 제안일수도 있으며, 타자와 주체사이의 그 어떤 것(object a)일 것이다. 어쩌면 정강의 끊임없이 말하고, 움직이는 인물들, 혹은 무언으로 표정하는 인물들로부터 받는 그런 제안 혹은 욕망 속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재구성을 위한 조건들, ● 만일 우리들 중에 적극적인 관람자가 있다면, 정강의 작품 속에서 이러한 어긋남을 잡아챌 것이다. 그것은 매체적 어긋남, 관객과의 조우에서의 실패, 현실과 연출된 장면의 교차 편집으로 야기되는 상황간의 간섭과 어긋남 뿐 만이 아니다. 또한 정강의 작품에서 웅얼거리거나 수다를 떨면서도 이야기하지 않음에 맞부딪칠 것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이야기들의 무의미함, 말하지 않음 자체이다. 정강의 작품에 등장하는 연기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제스쳐는 어쩌면 왜곡된 거울상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국에 되돌아오는 자기 자신의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들은 우리들의 초상이 된다. 그 것을 대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왜곡된 거울상과의 응시의 경험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의외의 타자성, 즉 우리 현실은 우리가 보는 대로 구성되고 있지 않다는 의외성은 그/그녀-우리로 하여금 그/그녀에게 되돌아오는 '어떤' 혹은 '무엇'의 화살(object a)의 시발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반복된다. 그 화살은, 사후적으로 하나의 우발적 사건을 통해서 우리 현실을 비(非)전체로서 재구성하는 요건이 된다. 의미 또한 항상 사후적으로 재구성되며 그것은 원인을, 허구적, 상상적, 이데올로기적, 판타지적으로 수반하면서 재구성된다. 이제 우리가 본 이미지들과 들은 소리들은 일종의 이 사후적 재구성을 위한 조건임이 명백해진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 조건으로 우리의 내러티브와 사건과 의미를 조직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제 정강의 "long moment"는 우리에게 '지속, 반복 되는' 불특정 사건과 비(非)전체로서의 세계상에 대한 '조건-계기'로 해석될 것이다. ■ 이병희

Vol.20070422f | 정강 영상·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