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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418_수요일_05: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훈갤러리 신관 1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옷에 각인된, 옷이 기억하는 몸 ● 나, 자아, 주체, 에고 등으로 불릴 수 있는 실체는 있는가. 그리고 있다면 그 실체는 무엇인가. 랭보는 자신을 타자라고 부른다. 이는 자신을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의 무분별하고 우연한 집합의 소산으로 본 것이다. 여기에는 주체와 자기 외부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다. 그 관계를 매개로 해서 외부적인 요소들이 주체의 일부로 내재화되기도 하고(이는 관성으로 자리한다), 주체의 고유성과 충돌하기도 한다(이는 갈등의 원인이며 일탈을 불러오고, 경우에 따라선 예술의 원동력이 된다). 주체란 말하자면 관습적인 인자(사회적 주체)와 존재론적 인자(본질적 주체)가 씨실과 날실처럼 직조돼 있는 일종의 기호인 것이다. 발가벗은 몸(미처 기호화되기 이전의 몸)은 그 자체 가치중립적인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지만, 이를 부끄러워하는 의식은 관습의 소산인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때의 의식을 주체와 동격인 것으로 보며, 창세신화는 부끄러움을 자의식과 동일시한다. 사실 아이들은 발가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다만 어른들만 이를 부끄러워할 뿐.
방인희가 소재로서 차용하고 있는 옷은 이런 관습적인 기호로서의 부끄러움과 관련이 깊다. 부끄러움은 말하자면 주체 속에 내장된 기호, 의식화된 기호, 사회적 기호인 것이며, 옷은 주체로 하여금 그 기호를 인식시켜주는 자의식의 껍질이다. 또한 옷은 시선과 응시로 나타난 관음증적 욕망이 교차하는, 몸의 상품적 가치를 더해주는 섹스어필의 아이콘이며, 주체의 취미를 엿보게 해주는 감수성의 바로미터이며, 특히 공공연하게는 주체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반영하는 제도적 치레이기도 하다(이는 특히 제복에서 확인된다).
방인희가 제작한 일련의 판화들에는 다양한 옷들이 등장한다. 진, 재킷, 스웨터, 셔츠, 스커트, 드레스 등의 주로 여성들이 입을 법한 옷이 있는가 하면, 벨트, 백, 우산, 그리고 컵과 같은 기물들도 있다. 그러나 이 옷이나 기물들은 광고용의 카탈로그나 백화점의 진열장에서의 전형적인 상품이나 제품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즉 사물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치시킨 자본주의 시대의 사물의 존재방식과는 그 거리가 멀다. 이것들은 작가가 소유했거나 입었던 적이 있는 옷들이며 소지품들이다. ● 여기서 이 사물들이 실제로 작가가 착용한 것인지의 여부를 다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사물들이 그렇게 보이도록 작가가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한낱 상품으로서의 이미지와는 다른 지점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오래 동안 작가와 함께 해온 탓에 닳고 해진 셔츠나, 부분적으로 올이 풀려있는 스웨터, 우연하게 배어든 비정형의 얼룩이나 세탁 과정에서의 탈색된 흔적이 남겨진 스커트, 그리고 다른 구멍들에 비해 유난히 눈에 띄는 구멍으로 인해 허리 사이즈를 암시해주는 벨트 등의 기물들은 이미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처럼 상품적 가치나 재화적 가치를 상실한 기물들은 이와는 다른 존재론적 가치를 얻게 된다. 일종의 심미적인 오브제로서 거듭나는 것이다. 작가의 체형을 기억하고 있는 옷이나, 작가의 허리 사이즈가 각인된 벨트, 그리고 작가의 정돈하는 습관이 배어든 우산 등이 작가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동질의 격을 획득하게 된다. 이 옷들은 말하자면 작가의 삶의 흔적 즉 지나온 시간이 고스란히 축적돼 있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동격이며, 분신인 것이다.
방인희의 옷은 이처럼 한낱 상품이 아닌 작가 자신과 동격이며 그 분신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여러 다양한 판법을 동원하는데, 우선 콜라그래피 기법을 통해 옷에다 실재감을 더해준다. 주지하다시피 콜라그래피 기법은 레디메이드를 판 대신에 차용함으로써 레디메이드 고유의 질료적인 성질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즉물적인 표현과 함께 특히 촉각적인 표면질감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작가는 콜라그래피야말로 자신의 정체성과 동격인 옷, 분신으로서의 옷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판법으로 본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실재감이 실물 크기의 디지털프린트로 인해 강화되고 보충된다. 이와 함께 애쿼틴트 기법에 의한 섬세하고 부드러운 음영효과로써 옷에다 체형의 흔적을 각인시키는가 하면, 무색 엠보싱으로 나타난 릴리프 판화로는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키는 금욕적인 감수성을 느끼게 해준다. ● 이로써 마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려는 아스라한 것들을 가까스로 복원해낸 듯한 아득하고 정적인, 부드럽고 우호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촉각적인 정서를 자아낸다. 모든 흔적들이 그런 것처럼 옷에 각인된 몸의 흔적 역시 시간의 소산이다. 이런 한갓 사물이나 그 이미지가 특유의 정서를 자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 그것에 부여해준 아우라 때문이다. 더욱이 그 흔적이 구체성을 획득할 때, 이를테면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어떤 주체에게 속해져 있던 것일 때 그 아우라는 더 강화되는 법이다.
한편, 옷은 롤랑 바르트의 기호론을 떠올리게 한다. 롤랑 바르트는 한 이미지에 함축된 기호를 문화적 기호인 스투디움과, 주관적이고 개별적 기호인 푼크툼으로 구별한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옷은 문화적 기호, 사회적 기호의 맥락에 속하게 된다. 그러니까 흔히 그가 착용하고 있는 옷에서 우리는 그 사람을 판단한다. 이때 작용되는 기호가 스투디움인데,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외면 즉 그의 파사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편으로 옷은 어떤 주체의 몸에 속해 있기도 하다. 방인희의 판화에서처럼 늘어난 양말, 닳고 해진 소매, 부분적으로 올이 풀린 스웨터는 가난하고 검소한 주체(이 경우에는 작가)의 삶을 대변해주는 문화적 기호 즉 스투디움의 형태로 어필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일종의 존재론적 상처인 트라우마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때 작용되는 기호가 개별적 기호 즉 푼크툼이다. 스투디움이 이미지 속의 주체와 그가 속해있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작용하는 기호라면, 푼크툼은 그 주체와 대면하고 있는 타자(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 이미지 밖의 익명적 존재) 속에서 일어나는 의미작용이다. 그러니까 트라우마는 이미지에 속해있던 주체의 어떤 부분이 부지불식간에 이미지 바깥에 있는 나를 사로잡는, 그 주체와는 상관없이 내가 불러일으킨 의미작용이며,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다(작가는 심지어 늘어난 양말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조차 있다. 트라우마에 관한한 주체는 최소한의 계기로서만, 그 마저도 우연한 계기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 이처럼 옷은 사회적 주체의 표상(문화적 기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방인희의 판화에서처럼 몸이 남긴 자국, 몸의 흔적이기도 하며, 이는 이를 대면하는 객체에게 존재론적 사건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한다. ■ 고충환
Vol.20070419e | 방인희 판화展